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85화 (85/97)

85화.

집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문을 젖히고 나오라 소리 질렀다. 카델은 소음 때문에 깬 다리온을 안아 얼렀다. 빽빽 우는 다리온을 묘한 눈길로 지켜보던 남자가 아기도 데리고 나오라고 했다.

“집에, 집에 있어, 카델.”

“한 명도 빠짐없이 가야 합니다.”

사라가 카델에게 한 말을 갑옷을 입은 군인이 받았다. 사라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손을 꽉 쥐었다.

셋은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목발을 짚어야 하는 사라 대신 카델이 다리온을 안은 채였다. 사라는 어딘가 불안한 눈빛으로 제 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짚은 목발이 오늘따라 유독 땅에 더 많이 끌렸다.

“정말 괜찮은 거죠? 약속한 대로 다 했으니까…….”

사라가 앞에 걷던 병사에게 바짝 붙어 속삭였다. 카델은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남자는 무어라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카델은 안심했다. 어린아이가 느끼기에도 충분히 위압적인 상황이지만, 엄마가 한 말은 같은 편에게나 할 법한 이야기였다. 아이는 안겨 있는 다리온을 고쳐 안으며 뽀얀 이마에 작게 입을 맞췄다.

“괜찮아, 괜찮아.”

다리온은 훌쩍대면서도 카델의 품이 편안한지 금세 배싯댔다. 아이는 자신보다 더 어린아이의 안정을 위해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도착한 곳은 마을의 중앙에 있는 작은 광장이었다. 광장의 사방은 군인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니, 얼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듯했다. 그리고 광장의 사방은 군인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셋을 데려온 남자들이 손짓하자 작은 틈을 만들어 주었고, 사라와 카델은 몸을 구겨 그 사이로 들어가야 했다. 꽉 안긴 다리온이 갑갑한지 칭얼댔지만 어를 겨를은 없었다.

“어…….”

그런데 이상했다. 군인들은 사라와 카델을 광장의 중앙으로 안내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중구난방으로 서 있는데 오직 셋만 중앙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카델은 겁이 나서 울먹이는 눈으로 엄마의 옷깃을 쥐었다. 그러나 사라는 괜찮을 것이라는 말만 반복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카델은 결국 광장의 중앙 탑 앞에 발을 들여놓았다. 커다란 사람 하나가 그 앞에 있었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 머리부터 어깨에 걸치고 있는 얇은 망토와 신발까지 모두 검은 남자였다. 카델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파드득. 소름이 돋았다.

남자는 웃고 있었다.

“왔구나.”

거친 전장을 구르는 남성이라 하기에는 미려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짐승이 심장을 할퀴기 직전 먹잇감의 상태를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기괴한 공포가 카델을 감싸 안았다.

“상처 하나 없이 잘 데려왔겠지.”

그는 상냥하게 물었다. 예, 라는 대답이 뒤에서 들려오고 나서야, 카델은 그것이 병사들을 향한 질문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남자가 가리키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안고 있는 다리온.

그의 눈은 카델에게 안겨 있는 작은 다리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떨림이 가시기도 전에,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어느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델 또한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타니오 아저씨의 손에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머리칼을 콱 쥔 두툼한 손이 억셌다. 큰 죄를 지은 죄인인가 봐. 카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 두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끌고 오지는 않을 테다. 게다가 모두가 끌려오는 여인을 외면했다. 찝찝하지만 어딘가 안도하는,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카델의 엄마, 사라까지도.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끌려오는 여자의 머리칼이…… 온통 하얬다.

꼭 파멜라처럼.

“파멜라……?”

카델이 얼빠진 사람처럼 단어를 토해 냈다. 주위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마치 뱉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것처럼. 그것이 카델의 심장을 더 거세게 뛰게 만들었다.

“파, 파멜라.”

아이는 조금 더 명확한 발음으로 여자를, 그러니까 파멜라를 불렀다.

“엄마, 저 사람 파멜라 같…….”

카델은 다가오는 여자와 사라를 번갈아 보면서 울먹였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그저 굳은 얼굴로 앞만 보고 있었다. 저건 외면이었다.

다들 왜 이러는 거야. 카델은 다리온을 더 꽉 안으며 울먹였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기가 엄마의 비참한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끌어안아 주는 것뿐이었다.

“얼른 데려가십시오.”

타니오 아저씨가 중앙에 다다라, 검은 남자에게 말했다. 아저씨는 어딘가 화가 난 것 같았다.

“음.”

그러나 남자는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목을 울렸다. 타니오 아저씨는 연설하듯이, 그러나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각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계집 때문에 우리가 망국의 백성이 되었다고! 큰 죄를 짓고 달아나 숨은 탓에 이미 몇 개의 마을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고 하셨잖습니까!”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집요할 정도로 파멜라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얼른 이 계집을 데리고 가십시오.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저 속은 것뿐입니다. 재차 말씀드렸지만…….”

타니오 아저씨는 결백을 주장하는 죄인처럼 시뻘게진 얼굴이었다. 굉장히 분하고 원통해 보였다. 그는 혼자 숨을 고르다가 쥐고 있던 머리채를 팍 놓았다. 동시에 여자의 몸이 앞으로 거꾸러졌다. 순식간에 나뒹굴게 된 파멜라가 흙바닥을 손으로 짚는 게 보였다.

남자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파멜라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아, 안 돼.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카델은 전신을 떨면서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아이는 파멜라를 구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힘과 동시에 공포에 먹혔다. 그것은 죄책감이라는 올가미가 되어 아이를 움켜쥐었다.

그러는 사이,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 둘을 바라보았다. 흡사 무대에 선 아름다운 극단의 배우들 같았다.

“네가 나와 가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데.”

“…….”

“저건 아니지.”

남자의 눈이 카델에게 닿았다. 정확히는, 카델이 안고 있는 다리온에게.

그걸 눈치채고 바짝 얼어 있던 카델의 어깨 위에 누군가의 손이 얹어졌다. 사라였다. 사라는 자신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손의 악력이 조금 더 세졌음을 느끼고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사라는 카델과 다리온을 떨어트리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가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카델은 화들짝 놀라 엄마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든, 파멜라는 남자만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뾰족하지도 뭉툭하지도 않았다. 마치 아무런 유감이 없는 사람처럼.

방금까지 웃고 있던 남자가 입매를 굳혔다.

“데려갈 거야?”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 끝이 조금 갈라져 있었다. 누구를 가리키는지 뻔했다. 다리온이리라. 왜인지 저 남자는 아기와 엄마를 떨어트려 놓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눈치챌 정도로, 아이의 존재에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파멜라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단호히 대답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응.”

푸욱.

여자가 대답한 순간이었다. 옆에 서 있던 군인 하나가 파멜라를 끌고 왔던 타니오 아저씨의 배에 칼을 찔러 넣었다.

“아악!”

타니오 아저씨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끅끅대기만 하다가 입으로 피를 뱉어 내며 쓰러졌다.

“안 돼!”

그때 멀리 떨어져 지켜보던 타니오 아저씨의 부인이 인파를 헤치고 달려 나왔다. 카델도 잘 아는, 옆집 아주머니였다. 광장이 고음을 질러대는 사람들에 의해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카델은 똑똑히 들었다.

“데려갈 거야?”

남자가 한 번 더 물었다. 파멜라는 옆에서 쓰러진 타니오 아저씨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응.”

대답해 버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타니오 아저씨를 붙들고 울고 있는 아주머니의 등에 칼이 꼽혔다. 카델은, 아니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주춤대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군인들이 막고 있어 광장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포위된 것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군사들이 타론의, 적국의 군사들임을 상기할 수 있었다. 언제든 자신들을 도륙할 수 있는 침략자들인 것이다.

“아, 안 돼…….”

카델의 옆에 있던 사라가 몸을 떨면서 카델에게 바짝 다가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타니오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찌른 군인이 단단한 검을 들고 카델 쪽으로 오고 있었다. 카델은 다리온을 떨어트리지 않도록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온몸의 힘은 더 쉽게 빠졌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데, 그 말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때, 선명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데려갈 거야?”

카델은 끼긱대는 목을 움직여 파멜라를 바라봤다. 파멜라는 남자를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카델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순간 안심했다. 파멜라가 자신을 위해 아까까지와는 다른 대답을 할 게 분명했기 때문에.

“응.”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쉽게 깨지는 것이던가.

카델이 상황을 깨닫기도 전에, 군인이 들고 있던 검이 카델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리고 카델을 향해 내리꽂힌 검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진 어미의 몸을 관통했다.

“허억…….”

고통에 헛숨을 내뱉는 엄마를 멍하니 바라보던 카델의 입에서 어, 어, 하는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엄……마.”

아이의 부름에 응하지 못한 어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사라의 등에서 물줄기처럼 피가 줄줄 흘렀다.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카델은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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