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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84화 (84/97)

84화.

그때 탁탁, 하고 문고리가 나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이 끝나고 다리온을 데리러 온 파멜라가 틀림없었다. 카델은 엄마가 몸을 돌리기도 전에 튀어 나가 황급히 문을 열었다. 집 안에 다른 객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였다.

“파멜라!”

“응, 카델.”

파멜라는 언제나처럼 짧게 웃으며 카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분명 카델과 사라에게 줄 요깃거리일 테다. 아이는 신이 나서 눈알을 데록데록 굴렸다.

“아, 왔어요?”

사라는 약간 어색한 투로 말을 건넸다. 파멜라는 고개를 들어 사라에게 무어라 대답하려고 하다가, 의자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보고 입을 닫았다.

드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카델은 그제서야 옆집 아주머니가 아직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채곤 숨을 죽였다.

“그만 가 볼게요.”

그녀는 쌀쌀맞게 이야기하며 파멜라를 지나쳐 갔다. 파멜라가 작게, 안녕히, 라고 무어라 말을 걸었지만 완벽하게 무시했다. 카델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입술을 잘근잘근 물다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에다 대고 자랑하듯 이야기했다.

“우와, 이거 우리 먹으라고 가져왔어요?”

“응.”

“블랑쥬다!”

로넬라이드 남쪽 지방의 전통 과자였다. 카델은 얼마 전 저가 먹고 싶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구해 온 파멜라에게 폭 안겼다. 그리고 부러 더 큰 소리로 고마워요, 파멜라! 하고 말했다. 파멜라를 미워하는 아주머니에게 목소리가 꼭 닿기를 바랐다. 아이다운 심술이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사라는 천천히 다가와 약간 의례적인 위로를 건넸다. 파멜라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며 다리온이 있는 방을 흘긋댔다.

블랑쥬를 한입 가득 베어 먹던 카델은 먹던 걸 식탁 위에 내려놓고 손을 옷에 문질러 닦은 뒤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리온을 안고 나왔다. 아기는 졸린 눈을 끔벅대고 있었다. 다리온은 졸음이 덜 달아난 와중에도 나타난 제 엄마를 보고 손을 뻗었다.

“마, 어마아…….”

열이 오른 작은 손이 꼬물대며 파멜라 쪽으로 뻗어 왔다. 파멜라는 제 아기를 받아 안고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다리온은 금세 졸음이 쏟아지는지 고롱고롱 잠들었다. 그걸 보고 있던 카델은 오늘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다리온을 돌봐주었는지, 얼마나 즐거웠는지를 설명했다. 그런데 보통은 조용히 자신의 말을 경청하곤 하던 엄마가 말을 막았다.

“카델, 이만 들어가 보렴.”

“왜에…… 나 아직 안 졸려요.”

“얼른. 어른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또 어린애 취급이었다. 자신은 이제 글도 다 읽을 줄 알고 다리온도 잘 돌보고 스튜도 잘 끓이는데. 카델은 구조 요청을 하듯 파멜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녀 또한 애매한 미소만 지으며 잘 자라고 아이의 등을 떠밀었다.

카델은 씩씩대며 방으로 들어갔다. 정확히는, 들어가는 척하며 문을 살짝 열어 두고 그 뒤에 숨었다. 소리를 푹 죽인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도가 완전히 뚫렸대요. 황제의 목을 검에 꽂아 거리에 내던졌다는데…….”

“네, 저도 들었어요.”

약간 떨리는 엄마의 목소리와는 달리 파멜라의 목소리에는 동요가 없었다.

“사람들을 다 모아 두고 뭘 확인한다는데, 도망가면 죽인대요. 이미 마을 하나가 통째로 불타기도 했대요. 만약, 만약…….”

우리 마을도 그렇게 되면…….

사라는 아주머니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던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엇보다 카델을 가장 염려했다. 문 뒤에서 엿듣고 있던 카델은 저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한 상황에 침을 꼴깍 삼켰다. 무서웠다. 정확히는 엄마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게 무서웠다.

“전장을 돌아다니는 사내들은 거칠다는데, 혹시라도…….”

“사라.”

드물게 사라의 이름을 부른 파멜라가 진정하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진정해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단호한 어조였다. 사라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안심이 되었는지, 그녀는 파멜라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파멜라는 사라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그러나 사라도, 엿듣는 카델도 이상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 * *

며칠이 더 흘렀다. 마을은 여전히 조용했다. 카델은 옆집 아주머니가 허풍쟁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 카델은 언제나처럼 파멜라가 사다 준 간식을 먹으며 책을 읽었다. 저번에 사다 준 책의 마지막 챕터였다.

* * *

어느 날 밤, 잠들기 전에 옆집의 타니오 아저씨가 찾아왔다. 아주머니도 함께였다. 그날은 파멜라가 카델에게 새로운 책을 사다 준 날이었다.

카델은 울그락불그락한 타니오 아저씨의 얼굴이 무서워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뒤에 숨었다. 엄마는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고, 카델은 또 방문을 완전히 닫지 않고 뒤에 서서 셋의 말소리를 경청했다.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춘 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했다. 확실한 건, 엄마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고, 파멜라의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점이었다.

방에 돌아온 엄마는 침대 위로 올라가 카델을 꼭 안아 주었다. 카델은 그날 엄마가 우는 걸 처음 보았다.

* * *

사라가 파멜라가 가져온 간식을 거절했다. 카델은 엄마가 파멜라의 성의를 거절해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딱딱한 얼굴로 말하는 엄마를 보고 입을 딱 다물었다. 아무래도 엄마와 파멜라는 싸운 것 같았다. 친구끼리는 다투기도 하니까.

카델은 짐짓 어른스레 그들을 이해하며 얼른 화해하기를 바랐다.

* * *

며칠이 더 지났다. 여느 때와 같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카델은 아침에 눈을 뜬 직후 몸을 말았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꾸물꾸물 일어나 침대 밖으로 발을 디뎠다.

엄마가 없다. 주방에서 수프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아침 식사를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처럼 카델은 뭉근하게 끓인 수프와 텁텁한 빵 한 조각을 먹고 파멜라를 기다릴 것이다. 그동안은 다리온과 무엇을 하며 놀지 고민하는 시간이다.

카델은 야무지게 계획을 짜며 주방을 향해 걸었다. 사라는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살펴보니 그녀의 맞은편에 반쯤 비어 있는 찻잔이 보였다.

뭐지?

카델은 고개를 갸웃하며 조심스레 엄마의 팔에 손을 댔다.

“엄마……?”

사라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에서 손을 떼며 잘 잤니, 하고 물었다. 얼굴에는 피로가 잔뜩 발려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다. 목발을 짚으며 일어나는 뒷모습이 유독 작아 보였다. 꼭……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직후처럼.

카델의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 아이는 제 엄마가 또 무기력증을 앓을까 두려워했다.

“엄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사라는 엄마의 등을 와락 안았다.

“엄마는 내가 지켜 줄게.”

“…….”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

기껏해야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였다. 카델은 엄마의 기분이 풀리기를 바라며, 자신이 컸을 때 엄마를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지 과장해서 늘어놓았다.

사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손을 내려 자신의 배에 얹어져 있는 딸의 손을 쓰다듬어 주었다.

“응…….”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 카델을 안아 주었다.

“엄마는, 엄마는 카델만 있으면 돼…….”

그렇게 말하면서 바르르 떨었다. 아빠가 죽었을 때와 같다. 카델은 엄마가 죽은 아빠를 떠올린 것이라 생각했다.

“너를 위해서는…… 못할 게 없단다…….”

그래서 이 말에도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 * *

다리온은 여느 때처럼 잘 잤다. 카델은 침대에 누운 다리온을 흐뭇하게 보다가 옆에 앉아 있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사라는 언제나처럼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카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 맞다! 이 층 청소해야겠어요. 요즘 통 못해서.”

카델이 헤헤 웃으며 일어났다. 그녀는 다리가 불편한 엄마를 대신해 집 안 청소를 도왔다. 카델은 언제나처럼 청소 도구를 챙겨 계단을 올랐다. 창고처럼 쓰고 있는 다락 위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이렇게 생각날 때마다 바닥을 닦는데 왜 이렇게 쉽게 더러워지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얼른 하고 나도 낮잠 자야지.”

아이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열심히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청소를 시작한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누군가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카델의 어깨가 바짝 튀어 올랐다. 깜짝 놀란 아이는 혹여 다리온이 깨서 울까 싶어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걸레를 팽개친 손은 축축한 물기에 젖어 있었다. 아이는 조심성 없는 이웃을 탓하며 구시렁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엄마가 이미 손님을 맞아 문을 열어 드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그러나 사라가 열어 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이웃이 아니었다.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카델이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두 남자가 집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자 집이 꽉 찬 것처럼 묘한 압박감이 일었다. 어쩌면 그들이 온몸에 두르고 있는 단단한 갑옷들 때문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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