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83화 (83/97)

83화.

로넬라이드의 동쪽 끝, 투라이나.

평지가 드문 투라이나의 언덕을 제 구역 마냥 쏘다니는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나비를 피해 춤추듯 하늘댔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한참 동안을 그렇게 뛰놀았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나비와 노는 데 질린 다음이었다.

“어!”

방금까지 천방지축처럼 방방 대던 아이가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금세 다소곳한 걸음걸이로 언덕 위로 올라갔다. 은발을 하나로 곱게 올려 묶은 여자 하나가 점점 더 선명히 보였다.

“파멜라!”

아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찾아온 게 썩 기쁜지 활짝 웃었다. 파멜라라 불린 여자 또한 아이의 애정에 화답하듯 생긋 웃었다. 잘 정제된 미소였다.

“카델.”

이름을 불린 아이는 헤헤 웃으며 파멜라의 앞에 섰다. 손을 뒤로 맞잡고 몸을 배배 꼬면서 키 차이가 한참 나는 파멜라를 위로 흘긋댔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아…… 음…….”

나비랑 놀고 있었다고 말하면 파멜라가 실망할지도 모른다. 카델은 열 살이었지만 어린애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파멜라 앞에서는 그랬다. 그녀는 카델의 의젓함을 칭찬한 바가 있으며 자신의 갓난쟁이 아들을 카델에게 맡겼다. 그러므로 어리숙해 보여서는 안 됐다. 카델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냥…… 나비…….”

카델은 말을 늘이며 발로 흙바닥을 긁었다. 파멜라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비랑 춤추고 있었구나.”

아이의 바람이 무색하게, 파멜라는 단번에 카델이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눈치챘다. 그러나 불쾌한 비아냥은 결코 아니었다.

“내가 방해했니?”

그것은 그저 사실을 묻고 답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아, 잊고 있었다. 파멜라는 이런 사람이었다.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섣불리 재단하거나 평가하려 하지 않았다. 비단 카델에게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그랬다. 그런 점이 좋았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볼이 씰룩댔다.

“아뇨.”

카델은 수줍게 대답했다.

“그럼 갈까? 엄마가 기다리셔.”

“응!”

언덕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아이는 파멜라가 자신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어 주고 있음을 알았다. 익숙지 않은 친절에 귓가가 달아올랐다.

풀들이 눕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그 순간 파멜라의 왼눈을 가리고 있던 은발이 살랑이며 옆으로 흩어졌다. 가려져 있던 왼 눈의 상처가, 감겨 있는 눈꺼풀이 드러났다. 고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흉한 상처였다.

알게 모르게 파멜라를 흘금대던 카델은 실례라는 사실도 잊고 입술을 약간 벌렸다.

“아.”

파멜라가 시선을 눈치채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잠시 카델을 내려다보았다.

“미안.”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정돈하는 모습은 태연했다.

“죄, 죄송해요.”

“괜찮아.”

파멜라는 언제나처럼 상냥한 목소리로 괜찮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나 그 태연함이 아이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파멜라의 상처와 은발을 보고 그녀를 미워했다. 로넬라이드에서 금발이 아닌 머리 색은 불운의 상징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카델의 어머니는 사람들이 파멜라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낯설어하는 것이라 정정했으나 카델은 무엇이 다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린아이의 눈은 순수한 만큼이나 직관적이었다.

“저어…… 파멜라.”

파멜라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머리 색 말예요. 언제 원래대로 돌아와요?”

하지만 파멜라는 사실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빛 머리칼을 갖고 있는 걸.

카델은 사람들이 파멜라를 미워할 때마다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마을의 그 누구보다 빛나는 머리칼을 가진 게 파멜라라는 걸, 카델은 알았다. 아이는 파멜라를 좋아했고, 그녀가 사람들 사이에서 힘들지 않기를 바랐으므로 종종 이를 물었다.

“글쎄.”

파멜라는 친절한 어른이었다. 그러나 종종 다른 어른들처럼 입을 다물 때도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는 알아선 안 된다는 것 마냥. 카델은 입을 한 발 내밀기는 했으나, 상대가 파멜라였으므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델.”

“네.”

“비밀, 꼭 지켜 줘.”

부탁해.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비밀에 관해 함부로 떠들었다고 혼내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하게 읊조렸다. 카델은 이런 이유로 파멜라가 너무나 좋았다. 아이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감에 차 말했다.

“응! 아무한테도 말 안 해요. 나는 다리온의 누나니까!”

“음?”

비밀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제 아이의 이름이 나오자 파멜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카델은 천진하게 웃었다.

“나는, 그…… 다리온의 누이예요. 다리온도 그렇게 부르고요. 그러니까, 나는 또…… 파멜라의 가족이에요! 가족의 비밀은 꼭 지켜야 하는 거예요.”

모호한 논리였다. 다리온은 파멜라의 아들이고, 카델은 그저 낮 동안 다리온을 돌봐 주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그러나 카델은 자신이 다리온의 친누이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했다.

“그래. 고마워.”

파멜라는 아이의 동심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는지 유하게 넘어갔다. 어느새 카델의 집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리온은 집에 있는 거죠?”

“응. 카델 어머니께서 봐 주고 계셔.”

파멜라는 낮 동안 식당 주방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다리온은 카델의 집에 맡겨졌다. 둘은 카델의 집 앞에 다다라 멈춰 섰다.

“그럼 오늘도 다리온 잘 부탁해.”

“……그냥 가요?”

파멜라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응, 곧 일 시작할 시간이라.”

아, 맞다. 카델은 파멜라가 자신을 찾으러 나오는 바람에 일하러 가는 시간이 다 되었음을 뒤늦게 눈치챘다. 조금 미안했다.

“갈게.”

“네에…….”

파멜라는 더 시간을 지체하기 힘든지 바로 돌아서서 걸었다. 방금보다 걸음걸이가 빨랐다. 카델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다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카델?”

“응, 나 왔어요.”

카델은 집에 들어서 손을 씻고 바로 엄마와 다리온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다리온!”

아이는 활짝 웃으며 침대로 달음박질했다. 엄마가 무어라 잔소리를 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늘도 누나랑 즐겁게 놀자!”

“누우, 노오!”

이제 두 살 난 아기는 포동포동한 볼살을 씰룩였다. 어설프게나마 말도 따라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카델은 아기를 꼭 안아 주었다.

“그렇게 좋으니?”

카델의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다리온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눈빛에 상냥함을 머금은 채였다. 엄마가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카델은 생각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사실 카델의 어머니, 사라 또한 처음엔 파멜라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일 년 전 파멜라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다리온이 마을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다.

몇 년 전 카델의 아버지가 사고로 죽고, 사라의 지병이 점점 악화되어 돈이 궁하지 않았더라면 다리온을 맡지도 않았을 테다. 그때만 해도 사라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자신의 아픈 다리를 원망할 만큼 외지인을 꺼렸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사라는 다리온을 아주 예뻐했다. 그리고 파멜라를 꺼리지 않았다. 되레 그녀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일 년간 지켜보며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파멜라의 남편은 그들이 마을에 터를 잡은 뒤 한 달도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당시 다리온은 태어난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은 핏덩이였다. 파멜라가 해산하고 몸을 완전히 풀기도 전에 세상을 뜬 것이다. 사라는 파멜라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과부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간식 먹고 다리온한테 책 좀 읽어 줘. 파멜라가 동화책이랑 네 책을 선물로 사 왔더구나.”

이제는 이름도 스스럼없이 부르는 사이였다. 카델은 새로운 책이라는 말에 잔뜩 신이 났다. 아이는 어머니의 말대로 간식을 먹은 뒤 한참 동안 다리온과 놀았다. 장난감을 흔들기도 했고 동화책을 읽어 주기도 했으며 걸음마 연습을 돕기도 했다. 그러다가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수도가…… 점령…… 타론이…… 여기도 곧 들이닥칠…….”

카델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어느새 침실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옆에 다리온이 있는 걸 보니 아직 파멜라가 온 건 아닌 듯했다. 그런데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침대 옆 목발이 없는 걸 보니 엄마의 손님이었다. 부엌 쪽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꽤나 은밀했다.

“여자란 여자는 다 잡아 두고 뭘 확인한다는데…… 그 무뢰배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돌아가겠어? 분명…….”

“도망을…….”

“도망치면 그날로 눈알이 파여서…….”

옆집 아주머니였다. 파멜라를 아주 싫어하는 타니오 아저씨의 부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집도 잘 찾아오지 않았는데…… 카델은 객의 방문을 의문스러워하면서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우리도 망국의 국민이…….”

무슨 이야기지? 카델은 전쟁놀이를 하는 사내아이들의 대화를 엿듣는 기분이 들었다. 살짝 열려 있는 문가에 더 귀를 바짝 댔다. 그런데 그때, 말소리가 뚝 끊겼다.

“……카델?”

엄마였다. 카델은 속으로, 들켰네, 하고 씩 웃어 보였다. 사라는 그런 딸을 내려다보다가 목발을 짚고 천천히 다가와 얼른 들어가 자라고 일렀다. 카델은 아주머니에게 들리지 않게끔 작은 목소리로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물었다. 그러나 사라는 어린 애들이 알 필요 없는 이야기라 일축했다.

카델은 역시나, 하고 입을 비죽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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