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82화 (82/97)

82화.

세상의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게 당연했을 때 죽을걸.

요즘 들어 리안 휴리트는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그는 헤일라와 자신의 방 침상에 널브러진 채 눈을 감았다. 수면 아래로 자신을 매장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리안에게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최소한의 안식도 찾아오지 않았다.

불면에 시달리는 남자는 복용하는 수면초를 찾기 위해 눈을 떴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옆에 있는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 수면초는 잘 정리되어 있었다. 리안은 그걸 한 움큼 향로에 집어 던지듯 넣었다.

그리고 다시 누우려는 찰나, 협탁의 마지막 칸이 유독 모나 보였다. 드륵, 리안은 자신이 과거를 더듬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추억을 열었다. 그 안에는 거친 천으로 만들어진 흰 손수건 하나가 들어 있었다.

“버릴까.”

리안의 목소리는 녹슨 쇠가 드득대며 갈리는 것 마냥 음산했다. 그러나 그는 내뱉은 말과는 다르게 조심스런 손길로 손수건을 쥐고 입술 끝을 가져다 댔다. 눈을 내리감고 속눈썹을 살짝 떠는 모습이 퍽 처연했다.

“이건 너무 낡고 헤졌어.”

다른 이들이 봤다면 미친 사람 취급했으리라.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데도 리안은 계속 중얼댔다.

“새로 만들어 줘, 헤일라.”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리안은 손수건을 그대로 협탁 안에 넣고 털썩 누웠다. 손목 안쪽이 천에 닿았다. 씁쓸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려 눈높이에 맞췄다. 들춰 보니 제때 치료하지 않아 곪은 상처가 눈에 띄었다.

“아파.”

그는 아픔을 꾸며 내 허공에 흩뿌렸다. 고통에 찌든 패잔병의 신음처럼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파, 아파.”

아프다는 말을 몇 번 반복하자, 헤일라와의 옛 추억이 떠올랐다. 그의 헤일라는 사람의 고통에 예민했으며, 안타깝다 여겼다. 그래서 리안은 언제든 아프고 싶었다. 자신이 피라도 보이면 헤일라는 사색이 되어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는 꼭 이렇게 소리쳤다.

‘조심하라고 했지!’

그녀는 질책이 비난이 아닐 수 있다는 걸 처음 알려 준 사람이었다. 리안은 헤일라의 다정한 질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끼고 아껴 두었던 약을 듬뿍 발라 주는 작은 검지도, 저가 아프다는 듯 잔뜩 찌푸리는 눈매도 모두 좋았다.

그랬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리안의 아픔에 슬퍼하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헤일라.”

명치에서 무언가 꽉 막혀 역류했다. 그러나 토기는 아니었다. 뜨겁고 묵직한 게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그는 이게 무엇인지 알았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헤일라…….”

외로움이었다. 열감이 과했다. 그것은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만들었다. 주룩, 옆으로 흐르는 물이 귓불에 닿았다.

도려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언젠가부터 자신을 좀먹기 시작한 고독을 깨끗하게 떨쳐 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 리가.

리안은 헤일라를 사랑했다. 이것은 사랑에 덧붙어 오는 고통이었다. 너무 늦게 깨달았다. 헤일라가 그의 사랑에 지쳐 모든 걸 버리고 떠난 뒤에서야…… 리안은 흐느끼면서 입꼬리를 올려 헛웃음을 뱉었다.

신의 검을 쓰고 달아난 헤일라는 다시 만나도 웃지 않을 테다. 사랑한다는 말도 듣지 못할 것이고, 제 사랑은 깊은 구덩이 속에 처박혀 영영 빛을 보지 못하고 천천히 천천히 질식할 것이다. 의미 없는 구걸만 하다가 생이 바스러질 것이다.

헤일라에게 동정 한 조각 받지 못하고 그렇게…….

“헉, 헉…….”

갑자기 호흡이 힘들었다. 리안은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말았다. 웅크린 남자는 덜덜 떨면서 헤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성대를 타고 터지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리안은 최선을 다해 헤일라를 불렀다.

그럼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출정하는 날 아침이었다. 결국, 며칠째 잠을 설친 리안의 얼굴에는 옅은 피로가 얽혀 있었다. 늙은 집사가 방 밖으로 빠져나오는 리안의 뒤를 따랐다.

집사는 리안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눈에 띄게 한숨을 쉬었다. 휴리트 가문의 충직한 집사는 가주가 전장에 나설 때마다 시름을 지고 사는 사람처럼 울상을 지었다. 왜 그러는지는 저택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가주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전장에 직접 출정하지 않는다. 뿌리가 상하면 나무가 말라 죽기 마련이다. 하여 대부분은 후계자나 가문의 정예 기사 정도만 내보낸다. 휴리트 가문의 가주가 이토록 정기적으로 자리를 비우는 건 가문에 이로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리안은 이에 관해 완고했다. 그는 저주가 사라져 광증을 해소하지 않아도 되는 몸이 된 후에도 전장을 떠돌았다. 타국을 침범하고 휘저어서라도 헤일라를 직접 찾아내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부디 무탈히 돌아오십시오.”

리안은 집사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고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 기사의 복장을 갖춰 입고 나왔다. 저택 본관 쪽으로 걸음을 옮겨 가 보니 사용인들이 늘어져 있었다. 리안이 무기질적인 눈을 하고 중앙을 지나 문 쪽으로 향했다.

그때, 조그마한 인영이 문 앞에서 톡 튀어나왔다.

“아, 아버지.”

세리아였다.

“아버지,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

“세리아가, 기다릴게요.”

세리아는 두 손을 모아 아래로 내린 채 우물쭈물 이야기했다. 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세리아를 바라봤다. 사랑하는 여자를 빼다 박았으나 저를 두려워하는 아이였다.

“다녀오세요…….”

세리아는 했던 말을 반복하며 리안의 눈치를 봤다. 인사를 하기는 해야 해서 나왔는데 여전히 무서운 모양이었다. 리안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고마워, 세리아.”

그의 선선한 대답에 아이도, 주변의 사용인들도 모두 안심한 눈치였다. 사용인들은 세리아가 리안을 무서워하는 게 리안의 심기를 건드려 화를 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헤일라의 거부를 끔찍해하던 남자니, 그녀를 닮은 아이에게도 같은 반응을 보이리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이는 쓸데없는 염려였다. 리안은 아이의 사랑을 받지 못해 억울하다 생각한 적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리아는 그로 하여금 어떤 대단한 감상을 불러일으킬 존재가 못 되었다. 리안을 자극하는 건 헤일라가 유일했다. 자식이라 한들 이 진리를 훼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세리아는 헤일라를 묶어 두기 위한 마지막 보루이자 그녀와 리안 휴리트가 연결되었던 순간의 증명이었다. 그러므로 리안이 아이에게 관대할 이유는 충분했다. 아이도, 사용인들도 리안이 아이를 해칠까 봐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리안은 세리아의 볼에 가볍게 입 맞춰 주었다. 언제나처럼 인지한 미소를 보인 채였다. 그리고 저택의 문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시종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리안의 옆으로 다가섰다.

“주인님, 저, 신전에서 예언이 내려왔습니다! 로넬라이드에 관한 것이라고…….”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려 신전에서 출정지에 관해 내린 신탁이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끝에서 일어난 전쟁 중 무엇도 예언을 받은 바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일까? 리안은 신의 의뭉스런 속내를 점쳤다.

“출정 직전이라 신전의 사자가 곧 이리로…….”

“오랜만입니다.”

그때, 시종의 말을 누군가 막았다. 썩 반갑지 않은 목소리였다.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모습을 드러낸 신관의 사자를 본 리안의 입매가 약간 비틀렸다. 눈앞의 남자는 레테가 죽은 뒤 신의 선택을 받아 신관이 된 이였다. 어린 소년에서 청년이 된 남자는 꽤나 말쑥한 껍데기를 두르고 그의 앞에 다가섰다.

세리아는 그의 모습을 빼꼼 관찰하고는 입을 헤 벌렸다. 제 아비보다야 못하지만 꽤나 번듯했다. 세리아는 어여쁜 것을 좋아했으므로 그에게 희미한 호감을 느꼈다. 그래 봐야 리안의 눈에는 아직 미아르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어린 애로만 보였다.

리안은 더 말을 섞기도 귀찮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급한 상황에서 신탁은 종이로 옮겨져 전달되었다. 출정 직전 또한 그런 상황이었다. 다만, 건성으로 손을 내미는 작태는 신전의 신탁을 받는 경건한 태도가 아니었다.

“신탁 앞의 무례는 불경인데.”

“신께서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오시라 한 건 아닐 테지. 목숨은 귀한 거니까.”

신관, 타이노르는 피식 웃으며 은실이 묶여 있는 둥근 종이 뭉치 하나를 내밀었다. 그는 의뭉스런 표정이었다.

“확실히 우리의 아버지는 짓궂은 면이 있으시지요.”

리안은 종이 뭉치를 받아 들고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말아 천천히 은실을 풀었다. 종이를 펼치는 순간, 타이노르가 한마디를 더 얹는다.

“그대의 짝에 관해 이제서야 입을 여셨으니.”

종이를 펼쳐 안의 글자 조각들을 확인한 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타이노르의 말을 알아들은 사용인들 또한 바짝 굳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만이 수줍은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손장난을 치며 하녀를 향해 배싯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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