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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81화 (81/97)

81화.

아프면 나타나 준다. 그건 정말 간단한 일이었다. 환영은 정말로 그랬다. 몸을 망친 데 대한 선물을 베풀 듯 선명한 모습으로 나타나 주었다.

그래서 환영인 것이다.

헤일라는 그가 죽는다 해도 눈앞에 나타나 주지 않을 테니까.

“아, 아아…….”

드디어 그녀가 조금 선명하게 보였다. 헤일라는 침대에서 떨어진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리안이 그녀에게 닿기 위해 일어났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쿵, 바닥에 닿은 무릎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리안은 무릎걸음으로 기어 헤일라가 앉아 있는 의자 앞으로 다가갔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리안의 무릎은 단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다.

리안이 헤일라의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팔을 뻗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허공을 짚는 남자의 손은 꽤나 진중하게 움직였다. 여자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리안은 그 모습을 홀린 듯 지켜보았다. 헤일라의 눈이 천천히 구부러지더니 아름답게 휜다.

“괴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리안은 그 모습마저 좋아서 따라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그녀가 말을 걸어 주었다. 기뻤다.

“응, 응…….”

리안은 끙끙대며 헤일라의 허벅지에 제 얼굴을 뉘었다. 그녀가 손으로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며 간절히, 간절히 울었다. 그러나 헤일라의 환영은 금세 무표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연기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리안은 언제나 그랬듯 환영이 사라지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 * *

“오, 오늘 아버지 오는 거야?”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방이었다. 온갖 인형과 반짝대는 장난감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다. 침대에는 풍성한 레이스가 둘려 있었고 아이는 그 중앙에 앉은 채 우물댔다. 아이는 어딘가 불안한 사람처럼 눈을 천천히 굴렸다.

“나 그럼 뭐 해야 돼?”

세리아. 리안 휴리트와 헤일라의 아이는 어미를 쏙 빼닮은 얼굴을 하고 노데이나를 올려다보았다. 노데이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이의 머리를 빗겨 주다가 입술을 살짝 물었다.

“별일 없으실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되어요. 제가 옆에 있을 테니까…….”

“아, 안 보면…… 그러면 안 돼?”

“…….”

“노데이나, 혼나?”

아이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비를 무서워하는 모양새였다. 노데이나가 세리아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짧게 자른 황금빛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주인님께선 결코 아가씨를 해치지 않으세요. 아프게도 하지 않아요. 우리 예쁜 아가씨의 아버지인걸요.”

무서워하실 게 없어요. 그녀는 저에게 달라붙어 색색 대는 세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이는 그래도 불안한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보드라운 볼이 하녀의 어깨에 납작하게 퍼졌다.

“그래도…… 무서워.”

“…….”

노데이나는 다른 말을 찾지 못하고 아가씨를 안아 주었다. 그녀는 세리아의 두려움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토닥, 토닥 등을 두드려 주니 아이는 서서히 울음을 멈추었다.

그때, 방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노데이나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세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세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하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런 체념 어린 모습이 하녀의 가슴을 찌르르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젖은 수건을 다른 사용인에게 부탁한 뒤 세리아의 눈 아래를 닦아 주었다. 다행히 열이 오르지는 않았다.

얼굴이 깔끔해진 세리아는 이제 아비를 마주하러 가야 함을 눈치채고 침대에 앉은 채 두 손을 뻗었다. 노데이나가 살풋 웃으며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대로 방을 나가 계단 아래까지 노데이나가 안고 가는 게 보통이었다.

“세리아.”

그런데 방을 나서려는 때, 누군가 먼저 문을 열었다.

리안이었다.

“잘 지냈어?”

그는 환한 낯으로 세리아에게로 다가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리아를 안고 있는 노데이나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노데이나는 뒷걸음질 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남자는 여전히 완벽했고, 서늘했다.

“자.”

그런 하녀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리안이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아빠한테 와야지.”

세리아가 와앙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을까. 노데이나는 리안의 웃는 얼굴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나 다행히도, 세리아는 리안에게로 손을 뻗었다. 이전처럼 서툴게 반항하지도 않았다. 아비는 냉큼 아이를 받아 들었다.

“옳지.”

“다녀오셨어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는데도 리안은 기분 좋은 사람처럼 헤실댔다. 그는 능숙하게 아이를 안고 노데이나에게 눈짓했다. 나가라는 의미다.

“아, 저…….”

하지만 둘을 한 방에 두어도 괜찮을까. 그런 일은 없었지만 혹시나 아가씨에게 해가 되는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다.

“괜찮아. 나 아버지랑 둘이 있을래. 노데이나는 쿠키 가져와.”

노데이나가 망설이자, 자신의 하녀가 혼날까 걱정이 된 세리아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럼, 다과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하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아마 문밖을 나서는 순간 전속력으로 주방에 달려가리라.

리안은 닫힌 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딸을 안고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아이용 의자에 앉히고 맞은편에 앉으니 제 손가락만 응시하는 작은 머리통이 보였다.

아이의 솔직한 감정은 시선만으로도 잘 드러났다. 리안은 경계를 풀어 주려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오전까지 도착해서 세리아랑 식사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일이 많았어.”

“괜찮아요.”

아이는 전혀 섭섭해하지 않았다. 리안은 그것을 알면서도 또 미안하다 덧붙였다. 오히려 그가 섭섭해하는 것 같았다.

또 대화가 중단되었다. 어색한 사이에서나 나올 법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감돌았다. 리안은 약간 안달이 난 사람처럼 세리아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러다 화젯거리가 다 떨어졌다 느껴지자, 가장 식상한 질문을 던졌다.

“오늘은 뭐 하고 놀았어?”

세리아는 여전히 눈을 아래로 고정한 채 대답했다.

“……밥 먹고, 책 읽고, 산책도 했어요.”

“음, 그랬구나.”

리안은 그렇게 답하고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달칵, 노데이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안색이 대번 밝아졌다.

노데이나는 다른 하녀 하나와 함께 깔끔하게 다과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리안은 채워져 가는 테이블 위를 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되짚는 얼굴로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는 제 앞에 놓여진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을 마신 뒤 내려놓았다.

“그런데 세리아.”

“…….”

“어머니께 인사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세리아는 그걸 깨닫고 움칠 떨었다.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음색이었고,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눈빛이. 눈빛이 미묘하게 날카로웠다.

세리아는 이런 순간 때문에 아비가 두려웠다. 무엇인지 모를 압박감이 자신을 내리누르는 듯한 느낌은 아이가 견디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순간은 대체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리안은 자신의 방에 걸려 있는 헤일라의 초상화에 대고 아이가 매일 아침 인사하도록 했다. 세리아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의무였다.

아이는 아주 무서운 가정교사에게 꾸중을 듣는 학생처럼 바짝 얼어 버렸다. 방을 나서려던 노데이나 또한 근심 어린 눈으로 세리아를 바라봤다.

잘 대답해야 했다.

“해, 했어. 했어요.”

리안은 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

“뭐라고 했어?”

“보고 싶어요. 세리아가 기다리고 있어요.”

세리아는 즉각적으로 대답을 뱉어 냈다. 언젠가 아버지가 헤일라의 초상화 앞에서 말하라고 한 대로 읊은 것이다.

“그래. 잘했어.”

만족스러운지 눈을 휜 리안이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세리아. 아주 잘하면 말이야. 이번에야말로 어머니가 돌아오실지도 몰라.”

이것도 항상 하는 말이었다. 그는 아이에게 어미가 존재하며,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가르쳤다. 이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휴리트 가문의 저택에 한 명도 없었다.

“그러면, 어머니께 어떻게 해야 하지?”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기에, 세리아는 언제나 배운 대로 대답했다.

“보, 보고 싶었어요. 세리아랑 놀아 주세요. 사랑해요.”

사실은 전혀 보고 싶지 않았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도 몰랐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아이는 당장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너무너무 무서워. 아버지 무서워.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응, 착하다.”

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흐뭇한 아비처럼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니, 그렇게 하려 손을 뻗었다.

“힉!”

하지만 아이가 저도 모르게 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아직 나가지 않고 조마조마한 눈으로 둘을 지켜보던 노데이나 또한 놀라 한 걸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멈춰 섰다.

“……놀랐어?”

“……네, 네에…….”

리안은 잠시 멈추어 있다가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또 미안하다 사과했다. 아이는 여전히 아래만 보고 있었다. 놀랍지도 않다. 거의 매번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거절 당한 뒤에는 언제나…… 공작의 저런 얼굴이 따라왔다. 지극히 인간적인, 씁쓸함이 밴 얼굴.

노데이나는 그것마저 소름이 끼쳤다. 괴물이 인간인 체하는 것 같아서. 저 표정까지 가짜일 것 같아서.

그는 아이를 몇 번 토닥여 주고 방을 나갔다. 노데이나는 리안이 완전히 방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한 뒤 세리아에게 달려갔다. 아이는 익숙한 품 안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리안은 방 밖에서 잠시 그 울음소리를 듣다가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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