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80화 (80/97)

80화.

그녀는 한 번의 잠자리만으로 리안 휴리트를 완전히 홀릴 수 있다 자신했다. 그녀의 밤 기술에 홀리지 않는 남자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주머니 안에는 미약을 담은 유리병이 있었다. 이걸 먹여 그를 홀리는 데 성공만 하면, 아이를 가져 공작가에 입성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솔레니아는 부러 고개를 푹 숙이며 천진한 영애 흉내를 내었다.

“무례처럼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녀는 흘금 위를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뜰 듯했던 공작이 의외로 가만히 서 있었다. 솔레니아는 그가 자신에게 흥미를 보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참에 쐐기를 박자.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는 단지, 공작께서…… 외로우실 듯하여, 공작 부인의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메워 드리고 싶었답니다.”

문장을 뱉으면서도 그녀는 두근대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건 그녀로서도 꽤나 도박인 셈이었다.

아버지가,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리안 휴리트의 앞에서 아내의 이야기를 꺼내는 걸 금기시했다. 그 여자의 빈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면서도 여자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지금 리안 휴리트를 붙잡으려면 이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그분에 비하면 저는 한없이 부족하겠지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리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솔레니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잘게 떨리는 몸과 함께 나풀대는 황금빛 머리칼을 쫓고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아…….”

리안이 손에 쥔 것은 솔레니아의 머리칼이었다. 그녀는 훅 끼쳐 드는 그의 향기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친다. 리안 휴리트는 활짝 웃고 있었다. 누구든 홀릴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엉켜 부드럽게 흩날렸다.

“내가 그 여자를 찾으면 어찌할 줄 알고.”

“…….”

“정말로 ‘그녀 대신’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방금까지의 두려움은 금세 휘발되었다. 솔레니아는 드디어 자신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이제껏 누구도 그의 곁에 접근하지 못했는데……!

“네, 기꺼이.”

리안이 솔레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정중함이 담긴 손짓이었다. 그녀는 손을 맞잡고, 설레는 마음으로 공작가의 마차까지 걸어가 탑승했다.

마차는 황궁을 완전히 벗어나 달리고 달렸다. 솔레니아는 그 안에서 리안 휴리트를 흘금대며 훔쳐보았으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의외로 굉장히 다정했으며 부드러웠다. 솔레니아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지금은 헤일라라는 여인의 대신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완벽한 공작 부인이 되어 권력을 휘두를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자이투스 가의 저택에 작은 상자 하나가 도착했다. 그 안에는 고운 여자의 손과 발, 그리고 다갈색 눈동자 한 알이 들어 있었다.

* * *

“대체 어쩌실 생각으로 일을 벌이셨어요?”

미아르는 신전의 가장 끝에 위치한 조용한 방에 앉아 리안을 독대하고 있었다.

“자이투스 백작가가 이전만 못 해도 귀족이라고요. 그렇게 티 나게 죽이시면 어떡해요!”

그녀는 새된 목소리로 리안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나 이건 화를 내는 것보다 한탄에 가까웠다. 이미 벌어진 일인 데다가 수습을 못 할 정도의 사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사람을 써서 조용히 처리하셨어야죠. 아, 한동안 또 얼마나 시끄러울까.”

리안은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담배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미아르도 작게 한숨을 쉬고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왜 그러셨어요?”

“…….”

“그래도 적당히 선은 지켜 오셨던 것 같은데. 이제 못 견디시겠는 거예요?”

그녀는 짐짓 걱정된다는 투였다. 그러나 리안은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미쳐 버렸냐는 의미였다. 사리 분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면 더 이상 리안과 거래할 수 없으니 그를 떠보는 것이다. 오 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녀의 세상은 여전히 돈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아직 미치지 않았으니 걱정 마.”

미아르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입을 삐죽였다.

“헤일라 대신이 되고 싶다고 하기에 원하는 대로 다뤄 주었을 뿐이야.”

“세간에선 그런 걸 미쳤다고 하죠…….”

그녀는 혀를 차면서 뒤에 있던 심복에게 손짓했다. 은쟁반을 든 시종이 바짝 다가와 허리를 굽혀 반짝이는 유리병 하나를 건넸다.

“여기요. 음용하시고 내일 오후에 저택으로 돌아가세요.”

“아침에 출발할 거야. 세리아랑 식사하기로 했거든.”

“……약 기운이 남아 있으실 거예요.”

미아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에게 제공하는 약은 신전만의 방식으로 배합하여 만든 환각제였다. 적당한 양만 복용하면 몸에도 해롭지 않고 수면을 도왔다. 하여 웬만한 귀족들에게도 경매로만 넘길 만큼 귀한 물건이었다. 밖으로 새어 나가면 곤란한 건 신전과 미아르였다.

“이렇게 비협조적이실 거면 차라리 저택 안에서 약을 하세요. 그럼 세리아 아가씨랑 식사도 제시간에 맞춰 하실 수 있으실 테고.”

“그건 곤란해.”

미아르의 둥근 어깨가 가볍게 으쓱였다. 리안이 담배 연기를 뱉고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리아는…… 겁이 많아.”

“아, 네에.”

미아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리안의 딸 사랑은 아주 지극할 정도여서, 결코 저택 안에서 비상식적인 행위를 벌이지 않았다. 약도 그중 하나였다. 징그러운 내리사랑이었다. 물론 그것도 그 여자 때문이겠지만.

미아르는 찡그리고 있는 리안 휴리트를 바라봤다. 언뜻 보기에 남자는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아니, 그는 더욱 완벽해졌다.

묵직한 중압감과 묘한 여유로움을 동시에 풍기는 남자는 아쉬울 게 없어 보였다. 실제로 그는 마음고생한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미아르는 그의 이면에 관해 아주 잘 알았다. 그는 몸이 야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끔찍이 노력했다. 거의 억지로 음식을 섭취하는 수준이었다. 꾸역꾸역 식도에 음식을 밀어 넣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지독한 식이장애를 앓았음에도 결코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 모든 걸 게워 낸 뒤에는 꼭 정량만큼 더 식사했다.

언젠가 왜냐고 물었을 때, 뭐라고 했더라.

‘헤일라는 내 껍데기를 꽤 좋아해.’

그는 그렇게 말했다.

리안은 헤일라가 좋아했던 부분을 훼손하여 미움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다시 만나 가둬 두면 안 그래도 미움을 잔뜩 받을 테니 조금이라도 잘 보일 구석을 남겨 두어야 한다고.

이 정도로만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리안 휴리트는 요즘 사라진 부인에 대한 폭력적인 욕구를 참지 못하고 엉뚱한 데 풀곤 했다. 이제는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증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정말 다시 만나면 손발을 자르고 오른쪽 눈까지 파 없애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렇게 미쳐 버리면 정말 곤란했다. 아직 그는 뽑아 먹을 구석이 많은 귀족이었다.

미아르는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금 내일 오후에 나서시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방을 나갔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리안은 그대로 약을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 * *

그는 준비된 침상에 누워 있었다. 오른쪽 팔을 두 눈 위에 올려 시야를 가렸다. 소매가 살짝 올라가 안쪽 팔을 점령하고 있는 징그러운 자상들이 드러났다. 리안은 한참 동안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잠에 빠지지도 않았다.

“……오늘은 안 나타나 줄 거야?”

눈을 가린 채로 허공에 묻는 목소리는 어딘가 처량했다.

“헤일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이 천천히 내려갔다.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투정을 부리는 아이 같기도, 정신이 빠져 중얼대는 미치광이 같기도 했다. 리안은 흐릿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면서 계속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약간 흐릿하게, 저 멀리에 무언가가 보였다.

“헤일라.”

그녀는 물 안에서 눈을 떴을 때처럼 뭉근한 형태로만 보였다. 그녀가 입을 뻐끔대며 리안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남자는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약 기운에 취해 금방 몸이 무너져 내렸다.

“얼굴 좀 보여 줘, 제발.”

그는 이불에 얼굴을 처박은 채 중얼댔다. 그러면서 왼 주머니에서 작은 칼 하나를 꺼냈다.

헤일라가 남기고 간 칼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의 왼 눈알을 훼손시킨 칼이리라.

그는 광기에 잡아 먹혀 헤일라의 왼눈을 도려내었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리안은 언제나 이 칼로 자신을 상처 냈다. 흐릿한 모습의 헤일라는 자해를 할수록 약간씩 선명히 보였다. 마치 상을 주듯.

“가까이 좀 와 봐, 응? 헤일라, 흐읏…….”

리안은 헤일라의 잔상을 보며 망설임 없이 팔뚝을 그어 내렸다. 붉은 피가 주욱, 하고 흘러내렸다. 툭, 투둑. 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모양이 꼭 빗방울 같았다.

“흣, 나 아파. 아파, 헤일라…….”

잔뜩 어리광을 부렸다. 그럼에도 여자는 다가오지 않았다.

“무서워? 무서워서 그래?”

리안은 쉬이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헤일라에게 애가 닳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너한테 그러려는 거 아냐, 그 여자가 자꾸 널 대신 하겠다고…… 그래서 그냥 혼을…….”

헤일라의 환영이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순간 남자의 눈에 핏발이 선다.

“가지 마!”

그가 혼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얼굴 근육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가지 마, 가지 마! 가면 아프게 할 거야! 손도 발도 다 잘라서, 눈도 다 파내고, 흐윽…….”

리안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꾸물꾸물 움직여 침대 아래로 쿵, 떨어진 남자가 고개를 들고 환영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 거야…….”

비정상적인 충동이 그를 난도질했다. 당장 앞에 있는 여자의 신체를 훼손시키자. 영영 가둬 두고 어여뻐 해 주자.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다시는…….

아니, 아니다. 그러면 안 돼. 미움받을 테다. 영영 관심 한 자락 받지 못하고 말라 가게 될 거다. 그러니까, 아, 그러니까…….

푹, 리안이 제 어깨를 칼로 찔렀다.

“잘못했어…… 나 좀 봐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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