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79화 (79/97)

79화.

잇새로 작은 신음조차 새지 않았다. 인간이 창조한 검이었다면 필시 목숨이 다했을 것이다.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으니.

그러나 여자가 쥔 검은 신의 유산이었다. 검이 뽑힌 자리에서는 새붉은 피 대신 맑은 구슬 하나가 톡, 하고 굴러떨어졌다.

드디어 떨어져 나갔다. 드디어.

그녀는 머리칼을 늘어트린 채 앉아, 멀건 얼굴로 정면만을 바라봤다. 그러다 손을 올려 제 뺨을 더듬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피다, 아래에 떨어진 검과 구슬을 발견한다. 그녀는 구슬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그녀의 오른 눈동자가 색 없이 투명한 구슬을 통과했다.

헤일라는 텅 빈 눈으로 자신의 구슬을 감상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한참을 앉아 고개만 갸웃댔다.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무기질적인 표정이었다. 검에 찔려 쓰러져 있을 때처럼, 아니 그보다 더, 시체 같은 모습이다.

어쨌든 헤일라는 자유가 되었다.

구슬을 품에 넣은 여자는 천천히 걸어 리듀카를 빠져나왔다. 여자의 걸음걸이는 무서우리만치 차분했다.

09. 검이 뽑힌 자리

타론 제국의 황제가 바뀐 지 삼 년이 지났다.

탄신 연회에서 독을 마신 황제는 이 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서거했다. 그녀는 꽤나 끈질기게 황제위를 꿰차고 있었으나, 죽음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그 뒤로 곧바로 새로운 황제가 등극했다.

페이네리아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항간에서는 황태자였던 라베이츠가 지고의 자리를 얻고자 천륜을 저 버릴 수도 있지 않겠냐고 떠들어 댔다. 무엄한 이들은 자리를 보전하고 누운 페이네리아의 침소에 암살자들이 숨어들지도 모른다 점쳤다.

그러나 황태자는 병상에 있던 황제보다 더 일찍 죽었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상처 하나 없는 채로 시신이 되어 나왔다. 뿐만 아니라 라베이츠를 견제하던 삼 황자도 돌연 사라졌다.

결국, 황제 자리를 꿰찬 건 사 황자 헤넬라드였다. 지고의 자리 따위에는 관심 없던 겁쟁이 열다섯의 소년.

황위는 불안정했다. 그의 아비는 전장에서 전사한 기사였으며 가문도 형편없었기 때문에. 공작의 비호를 필요로 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아니, 필요하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못했다. 휴리트 공작가와 견줄 만했던 루데인 후작가의 가주 또한 어느 날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스러져 가는 황권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일 인물은 리안 휴리트 외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걸음 해 주어 고맙군, 공작.”

헤넬라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투를 꾸며 내며 리안을 바라보았다. 팔걸이를 꽉 쥔 채였다. 휴리트 공작은 여유로운 낯으로 싱긋 웃고는 천천히 예를 갖추었다.

“타론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는 언제나처럼 단정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어디로 보나 기품 있는 공작가 가주의 모습이었다. 둘은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다과와 향이 좋은 차가 올라와 있었다.

“……다음 출정이 보름 후였나.”

“예, 그렇습니다.”

리안은 눈을 한껏 휘었다. 꿀꺽. 황제의 목울대가 울렸다. 그는 공작의 저런 얼굴을 볼 때마다 목이 죄이는 듯 갑갑했다. 어쩌면, 사람의 목을 베러 가는 데 저리도 설레는 표정을 띠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폐하의 타론이 더욱 위대해지겠지요.”

리안은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넘겼다. 황제 또한 공작을 따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손에 땀이 가득 차올랐다. 헤넬라드가 테이블 아래로 팔을 내리곤 손가락을 꿈질댔다. 리안은 예의 그 친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봤다.

깔끔하게 올린 머리칼과 선명한 눈동자가 검은 채로 조화를 이루었다. 뭇 여성들이 칭송하는 외피는 아름다우면서도 정갈했다. 그러나……. 감정이 말라붙어 모든 걸 꾸며 내는 모양이 마치 밀랍 인형과 비슷해 보였다.

헤넬라드는 숨을 흡 들이마시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언제나 그랬듯 공작이 원하는 바를 내어주기 위해서였다.

“로넬라이드의 국경을 넘어 함락한 뒤에는, 자네가 원하는 대로 수색을 하게.”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그대가 제국의 광영을 위해 이토록 노력하는데 당연한 일이지.”

기실 헤넬라드는 제국의 영토를 넓히는 데 관심이 없었다. 아니, 사실 황제위와 관련된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어린 소년은 그저 살고 싶었다. 그래서 황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리안 휴리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외부의 적을 만들어야 내부의 단결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지극히 진부한 설득 때문이었다.

하지만 열다섯 먹은 헤넬라드조차 리안의 목적이 다른 데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그가 원하는 건 제국의 광영 따위가 아니다. 리안 휴리트는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를 마음껏 헤집을 수 있는 권한을 원했다. 그렇게 해서, 숨어 있는 제 아내를 찾아내려고.

그가 아내를 찾기 위해 부순 국경만 다섯이 넘었다. 대부분은 속국이 되거나 타론에 흡수된 뒤 리안 휴리트가 성에 찰 때까지 헤집었다. 헤넬라드가 황제가 된 후 삼 년 내내, 그랬다.

“이번에는 기대가 큽니다. 로넬라이드처럼 폐쇄적인 나라는 몇 없으니까요.”

몸을 숨기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리안은 약간 아득하게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찻잔을 들었다. 황제가 쭈뼛대며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때, 젊은 시종이 누군가의 등장을 알렸다.

“자이투스 백작이 폐하의 알현을 청합니다.”

* * *

리안은 자이투스 백작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황궁을 나섰다. 용건을 마쳤기 때문에 더는 황제의 옆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자이투스 백작이 기름진 얼굴을 들이밀고 아부해 대는 모습은 지나치게 역했다.

그는 황궁의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감상에 젖어 꽃구경 따위를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단지 작은 정원을 지나야만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문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리안은 어지러울 정도로 풍겨 대는 독한 꽃향기들 때문에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그런데 그런 남자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양산을 쓴 채 정원의 꽃을 감상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흐르듯 쏟아지는 백금발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 모양이 누군가와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리안은 잠시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아주 그리운 무언가를 그리는 듯한 눈빛이 태양 아래의 여인을 훑으며 점점 집요해져 갔다.

쿵. 쿵. 심장 박동이 손끝까지 전해질 정도로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머리통 안쪽이 지끈 대기 시작했다. 리안이 핏줄이 선연히 돋은 손을 쥐었다 폈다. 저도 모르게 땀이 찼다.

“안녕하세요.”

“…….”

그리고 얼굴을 확인한 순간, 폭풍처럼 솟구쳤던 감각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도.

리안은 자조하며 저에게 인사하는 여인에게 적당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지나치려고 하는데, 여자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솔레니아 자이투스라고 합니다.”

그녀는 다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고아하게 웃었다. 자이투스. 이름 뒤에 붙은 단어를 듣자마자 리안은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했다. 비죽, 웃음이 샌다.

“황제 폐하와 알현하고 나오시는 길이신가요?”

솔레니아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부서지듯 고막을 거쳐 들어왔다. 순간 리안은 자신의 귀를 잘라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두통이 일었다.

리안의 얼굴에 변화가 없단 걸 확인한 여자는, 그게 긍정적인 신호라 생각했는지 더 적극적으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한 발, 리안에게 다가선 채였다.

“아무래도 로넬라이드와의 국경 분쟁 때문이겠죠?”

물론 공작께서 계시니 큰 걱정은 덜어 둔 셈이지만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눈꼬리를 둥글게 접었다. 동그란 눈동자가 예쁘게 휜 채 그를 바라봤다. 햇살을 머금은 눈동자는 아까보다 조금 더, 옅었다.

“이런.”

리안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미려한 외모는 웃을 때 더 빛을 발했다. 순간 솔레니아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오늘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 귀가 닳도록 잔소리를 해 댄 아버지의 명에 따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는 양 볼에 보조개가 짙게 팰 만큼 활짝 웃었다.

“아버지께서도 평소 공작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신답니다. 워낙…….”

“솔레니아 영애.”

리안이 그녀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명백한 무례였지만 묘하게 다정하다 느껴져 화를 낼 수가 없는, 그런 어조였다.

“아쉽게도 선약이 있습니다.”

“아…….”

그녀는 답지 않게 우물대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얼굴을 했을 때 남자들이 어떤 마음을 먹는지 알았다. 허둥대며 그녀를 달래려 들 테다. 그러나 솔레니아의 기대와는 다르게, 리안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

그녀는 결국 다급히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살짝 드러난 남자의 팔은 단단했다. 그리고 동시에 잘은 상처들로 범벅되어 있었다. 여자는 손목 부근의 상처를 보지 못했지만, 리안의 눈빛은 약간 가늘어졌다.

“아, 실, 실례했습니다.”

말을 더듬으며 얼굴을 붉혔다. 물론 계산된 행동이었다. 기실, 입궁하여 이 자리에 서 있었던 것, 리안에게 말을 건 것 모두가 짜여진 각본이었다.

솔레니아는 리안 휴리트를 유혹해 공작 부인의 자리를 꿰차야만 했다. 욕심이 났기 때문에.

황좌 위에 있다는 공작가의 위세를 업는다면 못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야심만만한 여자였다. 그녀는 잡고 있던 옷깃을 천천히 놓았다. 그리고는 순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렇다면, 달밤에라도 제게 시간을 내어주시면 안 될까요?”

의심할 바가 없는 유혹이었다. 달이 뜨는 밤에 남녀가 만난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가벼운 만남을 주로 즐기는 귀족들 사이의 은어였다. 물론 솔레니아는 가벼운 만남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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