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78화 (78/97)

78화.

수풀이 우거졌다는 표현만으로는 묘하게 부족했다.

신전의 모든 것은 불규칙해 보이면서도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뿌리 내린 나무도, 풀도, 꽃들도 모두 소름 끼칠 정도로 가지런히 조형되어 있다. 누군가가 건들지 않는데도 유지가 된다 하였던가. 신전은 이 또한 아주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이전에는 신전의 자랑거리를 같잖다 여겼으나……. 적어도 지금은 도움이 되었다.

헤일라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리듀카로 향했다. 산에서 오래 살았던 여자는 초목이 가득한 길을 기억하는 데 능했다.

리듀카로 향하는 길에는 기묘한 정적 속 자박대는 헤일라의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그녀는 걸으면서 피어난 꽃과 싱그러운 풀을 자비 없이 짓밟았다.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화풀이일지도 몰랐다. 걷는 내내 잡념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일라는 파이라의 마지막 모습이 유독 기억에 박혔다.

‘저도, 죄송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웃었던가. 도톰한 입술에 미소가 맺혔다. 자신도 그런 표정이었을까? 언니를 간호하는 내내.

그렇다면 언니가 저의 미소에 진저리 쳐 왔던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우그러들어 당장이라도 짓뭉개질 것 같은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멍청해.”

……나랑 비슷하고.

헤일라는 자신과 엇비슷한 파이라의 어리석음을 곱씹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조금 더 일찍 놓아주지 못한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신이 정해 준 기한 동안만 숨을 쉬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결국, 연인에게 마약을 쓴 남자는 제 손으로 사랑하는 연인을 죽여야 했다.

죽여 달라는 절규를 외면하지 못하고 벌인 일이었다.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음에 이르게 해 준다는 약을 베르디안에게 받아 연인을 죽이고, 연인으로 위장한 다른 여자를 병상에 눕혀 리안을 속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헤일라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헤일라 님의 뜻대로 움직여 드리려 합니다.’

더 이상 누구도 따를 필요가 없어진 남자는 속죄의 마음으로 헤일라의 부탁을 들어주겠다 했다. 그 덕에 헤일라는 베르디안까지 따돌리고 이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파이라의 사랑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이지를 잃게 만들고, 부질없는 것에 집착하게 만들어 결국은 서로를 불행에 빠트리지 않았나.

게다가 정말로 질리는 점은,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사랑에 취한 자들은 똑같은 선택을 반복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나도.

헤일라는 끔찍하다는 단어만 중얼중얼 반복하며 걸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그러다가 뚝 멈춰 서서는, 지독한 인간이 파이라와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녀는 스쳐 지나가는 많은 기억들을 뭉개며 자신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몸을 떨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내려다본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레테와 리안이 번갈아 가며 떠올랐다. 그들이 퍼부어 주었던 사랑들이 떠올랐다. 토기가 올라왔다.

“다행이야. 이제라도 알게 돼서…….”

그래도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깨달음도 기회도 모두 손에 쥐었으니.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는데 입술에 습한 기운이 닿는다. 헤일라는 그것이 눈물이라는 걸 알았지만 닦지 않은 채로 다시 나아갔다.

그녀의 우직함에 보답하듯, 곧이어 웅장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쩍 마른 손이 문을 천천히 민다.

“아.”

리듀카다.

리안의 아버지가 죽고, 나의 언니가 죽은 곳.

속엣것을 버리기 위해 인간들이 날파리처럼 모여든다는 신의 공간.

헤일라는 말을 삼키며 발을 들였다. 여전히 광활한 빛만이 공간의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이외에는 모두 암흑이었다. 그녀는 침음을 삼키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빛기둥은 다가갈수록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그 안에 있는 검 또한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흣…….”

갑자기 왼눈에 통증이 일었다. 아무래도 약초의 효력이 다한 것 같았다. 새것으로 갈아야……. 헤일라는 품을 뒤적였다. 파이라에게 받아 둔 루아두를 써야 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인영 하나가 빛기둥 앞에 서 있었다.

레테였다.

“결국 여기까지 왔네.”

“언니.”

저것은 허상이다. 내가 만들어 낸. 헤일라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죽은 날처럼.

“왜 베르디안을 따라가지 않았지? 그럼 훨씬 더 쉬웠을 텐데.”

헤일라는 레테가 자신의 상처 입은 왼눈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내가 준 약을 썼으면 더 편했을 텐데…….”

레테는 화내지 않았다. 차분했다.

“처음부터 내가 준 약 따위는 쓸 생각 없었던 거지?”

“……응.”

“왜?”

레테는 정말로 궁금한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깊이 침잠한 고요함이 레테를 감싸고 있었다. 여자는 정말로 생전의 언니와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였더라. 이런 모습에 겁을 집어먹지 않게 된 게.

헤일라는 실감 나게 유영하는 언니의 환영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무의미한 꼬리 물기임을 깨닫고 눈을 깜빡였다.

레테는 죽었다. 그녀에 관해 되짚는 건 산 자의 미련일 뿐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헤일라는 품 안에 있던 걸 천천히 꺼냈다. 반짝, 하고 무언가 빛났다. 네이오라가 담긴 귀걸이였다.

“언니.”

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레테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고마워.”

“…….”

“어릴 때 나 지켜 준 거. 원치는 않았겠지만…… 나 살려 준 거. ……그리고, 내 언니로 살아 준 거.”

“너…….”

레테는 자신이 헤일라에게 남긴 마지막 유품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네이오라를 담은 귀걸이는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헤일라는 레테의 환영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 공간을 훑었다.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귀걸이의 윗부분을 톡, 땄다. 안에 들어 있던 네이오라가 작게 출렁였다.

“그런데 나는, 난…… 더 이상 언니 뜻대로 살기 싫어.”

탁, 하고 헤일라가 발돋움했다. 그녀는 레테를 지나쳐, 검이 있는 빛기둥에 네이오라가 담긴 귀걸이를 던져 넣었다. 안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미안해…….”

울먹이는 목소리는 네이오라와 함께 저 아래로 묻혔다. 흔적도 없이 모든 것을 빨아 들이는 신의 구덩이 속에 레테의 선물은 영영 잠들게 되었다.

헤일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신의 검이 지척에 있다. 빛을 통과한 손이 검 끝에 닿았다.

가벼운 진동이 몸에 전달되었다. 비로소 손에 검의 손잡이가 완전히 잡혔다. 그걸 빛에서 빼낸 헤일라는 검을 쥔 채로 망설이다 이내 천천히 뒤돌았다. 어미에게 혼이 날까 두려워하는 아이의 눈을 하고.

왜 그랬을까? 자신을 원망할 게 뻔한, 어쩌면 폭언을 퍼부을지도 모를 언니인데. 왜 아득바득 뒤를 돌아 언니의 인영을 확인하려 했을까?

어쩌면 죽음이 덮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어리광을 부릴 대상을 찾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검을 든 여인은 제 언니를 보기 위해 빛을 등졌다.

그러나 돌아서서 확인한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언니.”

평평한 어조로 레테를 불렀으나 자신의 목소리만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언니.”

헤일라는 길을 잃은 아이가 어미를 부르듯 몇 번이고 언니를 찾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언니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섬광처럼, 또는 신의 계시처럼, 어떤 깨달음 하나가 헤일라에게 내리꽂혔다.

이제는 만날 수 없다. 예상했던 레테의 분노에 찬 얼굴도, 실망감이 씐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이제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다.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가 자신에게로 날아들고 있음에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에,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말아 쥐었다. 인간의 피를 취하는 데 혈안이 된 마귀처럼, 검은 격렬하게 울려댔다. 어리석은 인간을 재촉하는 신의 유희였다.

헤일라는 천천히 검을 올려 왼쪽 가슴 위로 조준했다. 그녀는 그것을 내리찍듯 아래로 휘두른다. 여린 살갗을 쇠붙이가 찢어 갈랐다.

찰나의 시간 동안, 그녀의 눈앞에 어떤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뛰지 말라고 했지. 다쳐.’

‘우리는 가족이니까. 내가 지켜 줄게.’

그것은 아주 어린 시절의 언니이기도 했고

‘식사하고 호수에 가자.’

‘그럼 계속 같이 있으면 돼.’

따뜻하다 믿었던 리안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마지막은…….

‘……좋아해.’

“허억.”

울컥, 몸속의 무언가 역류했다. 아니, 빠져나간다. 아, 아니다. 이건…….

사고가 정지했다. 눈조차 감기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그러나 아름다웠던 소리들이 사그라든다. 검이 심장에 닿는 순간부터 모든 게 뚝, 뚝 끊겨 종래에는 눈앞이 점멸했다.

가냘픈 여체는 그대로 쓰러져 일각 동안 미동이 없었다. 황금빛 눈은 동그랗게 뜨여 있는 채였고, 머리칼은 형편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영락없이 생명이 뽑힌 인형의 모습이다. 누군가가 봤다면 시신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손끝이 움직였다.

방금까지 ‘헤일라’였던 여자가 천천히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검이 심장에 박혀 있는 상태인데도 그녀는 흐물흐물 몸을 움직이며 무어라 중얼댔다.

소곤소곤. 속닥속닥. 텅 빈 눈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하던 여자의 오른손이 움직인다. 그리고 가슴에 박혀 있는 검의 손잡이를 턱, 하고 잡았다. 그것이 살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빠진 건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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