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노데이나는 저택의 조용한 복도를 지나 문 앞에 준비되어 있는 마차에 탔다. 마차 안에는 헤일라와 파이라, 그리고 정신을 잃은 공작이 함께 타고 있었다. 다른 호위들은 신전까지 은밀히 뒤를 따르기로 하였고, 반절은 세리아 아가씨를 지킨다 하였다.
탁.
마차의 문이 닫혔다. 마차가 움직이자마자, 노데이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도저히 압박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 죄, 죄송합…… 니다.”
그녀의 사죄에도, 마차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침묵과 피 냄새. 오직 그 두 개만 작은 공간 안에 흘렀다.
“정말, 정말 죄송합…….”
“됐어요.”
드디어 헤일라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고통에 찬 얼굴이었지만 발음은 아주 정확했다.
“애초에 당신이 배신하지 않을 거란 기대는 안 했어요. 그럴 이유도 없고. 오히려 협박한 건 내 쪽이잖아요.”
“아, 하, 하지만 제 가족들을, 죽, 죽이실 게…….”
아닌가요? 노데이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훌쩍였다. 그러나 돌아온 건 퍽 다정한 목소리였다.
“걱정 말아요. 당신은 루데인 후작도 휴리트 공작도 배신하지 않았으니 해를 입을 이유가 없어요.”
루데인 후작을 배신한 게 아니라고? 노데이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 그게 무슨…… 루데인 후작님의 모략이 아니어요?”
노데이나는 헤일라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었다. 후작과 주인마님이 한통속이 아니었나? 분명 다이네가…… 그런데 다이네는 어디 있지?
흠칫. 노데이나의 뒷목이 서늘해졌다. 후작의 사람이, 다이네가 보이지 않았다.
헤일라는 노데이나의 표정을 읽은 듯 그녀가 궁금해하는 걸 친절히 알려 주었다.
“후작은 내가 자길 배신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원래 난 지하로 빠져나가서 그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럼, 그럼 다이네는…….”
“그녀는 기절시킨 채로 지하에 뒀어요. 알아서 후작이 있는 쪽으로 빠져나가겠죠.”
헤일라는 피가 줄줄 흐르는 왼눈을 꾹 누르며 웃었다. 이제 답이 다 되었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콧잔등에는 고통으로 인한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노데이나는 얼이 빠져 입을 약간 벌린 채 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어느새 마차는 저택의 정문을 지나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 * *
저택을 완전히 빠져나온 뒤, 조용하던 파이라가 품 안에 있던 보자기에서 무언가를 꺼내 헤일라에게 건넸다. 그건 초록색 덩어리였다. 마치 약초를 곱게 빻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시키신 대로 준비했습니다.”
“고마워요.”
헤일라는 파이라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왼눈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는 천을 떼어 내자 잘게 빻은 약초를 눈 쪽에 덧댄 거즈가 보였다. 아마도 지혈을 위해 임시로 붙여 둔 것 같았다.
“제, 제가 들어 드리겠습니다.”
노데이나는 그렇게 말하며 피 묻은 천과 초록색 덩어리가 쌓여 있는 보자기를 받아 들었다. 그런데 받아 드는 순간, 피 냄새와 함께 익숙한 향기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루아두?”
언젠가 헤일라가 정원에 가득 심어 달라 부탁한 꽃이었다. 그 꽃이 왜. 순간 노데이나는 언젠가 다른 하녀 하나가 투덜대던 걸 기억해 냈다.
‘진통 계열에 효과가 있긴 한데…… 번식력이 좋은 약초라 흔한 탓에 신전에서도 딱히 키우는 걸 규제하지 않는대. 그냥 초록색 들꽃인 거지, 뭐. 마님은 왜 저런 걸 키우나 몰라.’
노데이나는 루아두를 곱게 잘라 빻은 덩어리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걸까. 언제부터…… 파이라 님과는 처음부터 한통속이었나? 어떻게?
노데이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하며 손을 떨었다. 그때 헤일라가 그녀의 손 위에 있던 루아두 덩어리를 들고 갔다. 그녀는 자상으로 엉망이 된 제 눈 위에 그걸 올리고 다시 거즈를 덮었다.
언뜻 보기만 해도 끔찍한 상처였다. 저 정도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이제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의문이었다. 노데이나가 이런저런 생각들에 빠져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에도 질문할 수 없어서 답답하고 또 겁이 났다. 혹여나 무언가 잘못될까 봐. 이 또한 자신을 시험하는 것일까 봐.
“……아기를 부탁해요.”
노데이나를 현실로 끌어 올린 건 헤일라였다. 노데이나는 깜짝 놀라 헤일라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조금, 놀랐다. 헤일라는 세리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공작을 보고 있었다.
“리안은 아기를 해치지 못해요. 날 잡아 둘 명목은 이제 아기뿐이니까. 하지만 사랑을 주면서 키울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러니 아이를 부탁해요.”
아. 그제야 노데이나는 헤일라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식은땀 때문에 덕지덕지 말라붙은 잔머리들, 음울에 젖은 눈, 굳은 입매…… 그녀는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본 하녀는 홀린 듯 이제껏 궁금해 왔던 걸 묻고 말았다.
“……세리아 아가씨는 왜 두고 가세요?”
너무 충동적인 질문이었나. 노데이나는 헤일라가 대답을 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 끌지 않고, 헤일라는 답을 내놓았다.
“어차피, 신전에서 나갈 때의 난 아기를 데리고 갈 생각조차 하지 않을 테니까.”
“……!”
“사실 당신을 데리고 나온 이유는 따로 있어요. 말을 좀, 전해 줘요.”
아, 아, 설마.
노데이나는 헤일라의 씁쓸한 눈빛을 보고 어떤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다. 그것은 아주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깨어날 리안에게 전해 줘요. 난 오늘 신의 검을 쓸 거라고요.”
노데이나의 눈이 커졌다. 헤일라는 눈을 꽉 감고 다시 뜬 뒤에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그녀는 호흡을 고른 후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난 오늘 사랑을 버릴 거예요.”
말도 안 돼!
노데이나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깨닫고 손을 떨었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루데인 후작을 따돌리고, 공작가의 마차를 타고 신전으로 온 것이다. 가서 검을 쓰려고!
“그러다가 잘못, 잘못되면!”
말리고 싶었다. 말려야 했다. 노데이나는 천한 평민이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알았다. 감정이 거짓된 것이라 소거하지 못하면 그대로 심장에 검이 찔려 죽는다고 하였다. 실제로 몇 년 전 펠든 백작이 검을 쓰다가 그대로 죽었다.
그리고 사랑이라니?
이 여자는 공작에게 그렇게 시달리고도 남자를 사랑하는 건가? 믿을 수 없었다. 착각이 분명했다. 필시 심장이 뚫려 죽고 말 것이었다. 그녀는 그냥 공작의 뜻대로 어딘가 망가져 그를 사랑하고 있다 착각하고 있다. 노데이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녀는 공작의 옆에 앉은 파이라를 보면서 눈짓했다. 제발 좀 말려 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파이라는 묵묵히 창문 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속이 타는 건 노데이나 혼자였다.
속이 타들어 가던 찰나, 어딘가 초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차라리 그랬으면 해요.”
헤일라는 다시 리안 휴리트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회한에 사무쳐 있는 듯도 하였고, 애틋해 보이기도 했다. 노데이나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만류가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빠져나가시게요…….”
“내 걱정해 주는 거예요? 고마워요.”
헤일라는 약간 장난스러운 태도였다. 애써 지어내는 모습인 걸 알지만, 노데이나는 그럼에도 조금 놀랐다. 주인마님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 또래의 계집처럼 평범하게 웃을 줄 아는 여자였구나.
“마차는 주인을 신전 본관까지 모신 뒤 다시 나와야 해요. 난 중간에 내려서 검을 쓰고, 마차가 빠져나갈 때 즈음 다시 이걸 타고 나갈 거예요. 만약 살아남는다면요.”
헤일라는 노데이나의 불안을 잠재워 주려는 듯 친절하게 설명을 이었다. 약초 덕에 고통이 조금 가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마차의 의자, 안이 비어 있어서 이 안에 숨으면 돼요. 난 예전에도 한 번 이런 방법으로 빠져나간 적이 있으니 걱정 말아요.”
노데이나는 더 이상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응하느라 속이 조금 메스껍기도 했다.
“……신전입니다.”
그리고 마차가 신전 앞에 도착했다. 동시에 헤일라는 걸치고 있던 케이프의 모자를 푹 눌러 썼다. 그 모습은 헤일라를 노데이나와 다를 바 없는 하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곧이어 신전의 문지기들이 다가와 마차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파이라가 무어라 설명을 하니, 문지기들이 황급히 공작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신전의 문을 개방했다.
“마차는 두 시간 이내에 다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마차에 타신 분들 이외에는 신전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문지기들은 깍듯한 목소리로 신전의 규율에 관해 설명하고는 마차의 문을 닫아 주었다. 신전으로 진입하고부터는 마차 안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그닥 다그닥. 말이 달리는 소리만 유리창 너머로 희미하게 전달될 뿐이었다.
노데이나는 혹여나 기절한 공작이 깨지는 않을까, 헤일라가 마음을 바꿔 주지는 않을까, 파이라가 헤일라를 말려 주지는 않을까 살폈다. 어쩌면 셋 중 하나를 바랐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문으로부터 한참을 또 달렸을 때, 마차가 멈췄다. 나무가 우거진 것을 보아, 신전의 본관은 아닌 듯했다. 노데이나는 불안감에 휩싸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헤일라가 천천히 움직였다.
“……고마워요. 그리고 많이 미안해요.”
헤일라는 그렇게 말하며 노데이나와 파이라를 번갈아 보았다. 이번에는 공작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은 채였다. 자신은 둘째 치고, 파이라에게는 무엇이 미안한 것일까? 노데이나는 잠시 생각했지만 마차에서 내리는 헤일라의 모습 때문에 이를 금세 잊었다.
홀로 멀어지는 헤일라의 뒷모습은 작고 초라했다. 그러나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풀숲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리듀카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는 듯했다.
노데이나는 인영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마차의 문을 닫았다. 다시 신전의 본관으로 향할 것이라고 들었다. 아마 파이라는 리안이 쓰러져 신전에 다녀온 사이 헤일라가 사라졌다고 거짓을 고할 속셈인 것 같았다.
정말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겠지.
헤일라 님은, 살아서 여길 나갈 수 있는 걸까.
세리아 님은 앞으로 어떻게…….
나는, 내 가족들은…….
사고가 마비될 정도로 불안이 범람했다. 노데이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제 치마를 틀어쥐었다. 왠지 모르게, 마지막으로 본 헤일라의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아.
모든 게 너무 복잡해서, 그냥 기절해 버렸으면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