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는 취침 전 가벼운 허브티로 티타임 갖는 걸 꽤 좋아했기 때문에 반드시 헤일라를 앉혀 두고 티타임을 가졌다.
그리고 오늘이 헤일라와 베르디안이 약속한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방 안에는 리안과 자신밖에 없었고, 이제 곧 노데이나라는 하녀가 들어와 약이 든 차를 리안에게 건넬 것이다.
부디 계획대로 되어야 할 텐데.
헤일라는 소매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칼을 매만졌다. 다이네가 몰래 넣어 준 것이었다. 칼날이 손잡이 쪽으로 접히는 작은 칼은 꽤 날이 서 있었다. 티 테이블 아래 모아 둔 손에 땀이 찼다.
“주인님, 말씀하신 허브티입니다.”
문밖에서 끝이 약간 떨리는 노데이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 계획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여자였다. 저 여자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할 텐데. 헤일라는 초조함을 애써 억눌렀다.
그러나 노크에서도 노데이나의 긴장은 여실히 드러났다. 아, 저렇게 떠니까 더 불안하잖아. 헤일라가 리안이 고개 돌리는 사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손바닥으로 파고든 손톱 때문에 살이 푹 패는 게 느껴졌다. 드디어 하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음.”
리안은 방으로 들어온 노데이나를 향해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짓했다. 노데이나는 네, 주인님, 하는 말만 남기고 부리나케 방을 나갔다.
티 테이블 위에는 꽃이 그려진 찻주전자와 찻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그러나 뜨거운 차가 따라져 있는 잔은 하나뿐이었다. 헤일라가 이전에 뜨거운 차로 제 손을 지지려고 했던 사건 이후 헤일라는 미지근한 차만 마실 수 있었다. 찻주전자 안에 있는 게 헤일라의 몫이었다.
그런데 리안은 가만히 멈춰 있기만 했다.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는 건 언제나 리안의 일이었는데. 그는 고요하게 헤일라를 응시할 뿐이었다. 검은 보석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눈은 깜빡이지도 않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혹시, 계획이 어그러졌나? 설마 저 어눌해 보이는 하녀가…….
진득한 고요에 질식해 죽을 것 같다 생각한 찰나였다. 리안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움직이는 손은 떨림 한 점 없이 차분했다. 그가 찻잔을 입에 대고 허브티 한 모금을 꼴깍, 넘겼다.
드디어!
헤일라는 스스로에게 신호를 보내듯 숨을 여러 번 쉬고 천천히 목을 움직였다. 그녀는 일이 번거롭지 않도록, 노데이나가 제 몫을 잘 해냈길 바랐다.
리안은 헤일라를 앉혀 놓고 계속 차만 홀짝였다. 평소에는 무슨 말이든 붙여 보려 안달이었는데. 그녀는 멍한 눈빛을 꾸며 내며 그를 응시했다.
티 테이블 위의 찻주전자를 한 번 보고 천천히 리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탁, 하고 찻잔이 테이블로 내려앉았다. 힐긋 본 그의 찻잔은 비어 있었다.
정말로 다 마신 거다. 헤일라는 자꾸만 기대가 차오르려는 마음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리안은 그런 헤일라를 비웃듯 천진하게 물었다.
“재밌었어?”
“…….”
“네가 재미있었으면 됐어.”
그는 나른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헤일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남자는 헤일라를 약간 안쓰럽게 바라봤다.
후두둑, 순간 소름이 끼쳤다. 헤일라가 입술을 빠끔대다가 간신히 물었다.
“……왜, 마신 거야?”
다 알면서 왜. 헤일라의 뒷말이 조용히 흩어졌다. 그녀는 마지막 확인을 하는 마음이었다. 정말로, 다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노데이나가 정말 리안에게 모든 사실을 고했을까. 그녀에게는 정말로 중요한 일이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헤일라는 자신을 돌보지 않는 신에게 마지막으로 빌면서 손안의 땀을 무릎에 닦아 냈다.
“네가 준비한 건데 안 마시면 서운할 거 아냐.”
아.
리안은 그런 헤일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얇게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는 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이건 타면 못 일어날 것 같아서, 수면제만 넣으라고 했어. 미안.”
노데이나에게 건넸던, 네이오라가 들어 있는 귀걸이였다.
아, 역시.
또 배신당했구나.
노데이나가 리안에게 계획을 발설한 게 틀림없었다. 베르디안과 그의 사람들이 어떤 말로 겁박을 했는지 몰라도, 하녀는 결국 리안에게 붙는 걸 선택했다.
다행이다.
“……미친놈.”
헤일라는 탄성처럼 욕설을 내뱉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녀는 사나운 표정 아래로 희열을 숨겼다. 다행스럽게도, 그 어눌한 하녀는 리안에게 쪼르르 쫓아가 수면제에 관한 걸 실토했다.
“역시 너는, 너는 괴물이야.”
계획대로 리안이 모든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경멸을 덧씌워 그에게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당황한 사람처럼 말을 더듬으며 눈물을 매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테이블 아래에 있는 소맷자락에서 작은 칼을 꺼내 들었다. 남자에게 달려들어 칼을 휘두른 건, 그다음이었다.
* * *
“흡, 흐윽…….”
노데이나는 사용인들이 기거하는 별관 제 방에 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훌쩍대는 울음소리가 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써야 했다.
“어머니…….”
그녀는 이 순간 가장 염려되는 사람을 부르며 하염없이 울었다. 불안감이 똬리를 틀고 노데이나를 자극해 댔다.
주인님께 귀걸이를 넘기고 모든 사실을 실토해 버렸다. 루데인 후작이 겁박한 대로, 정말 가족들이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후작과 주인마님 쪽에 붙었다간 자신이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가족들이었겠지…… 공작은 그런 사람이니까.
“어쩔 수, 어쩔 수 없었…….”
노데이나는 이런 말들을 중얼대며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헤일라를 맨발로 걸어 다니게 했다는 이유로 발목이 잘린 하녀처럼 비참하게 죽고 싶지도 않았고, 하녀장처럼 지하에서 목이 맨 채 발견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녀장이 죽은 바로 다음 날 리안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다행히 공작은 아주 기뻐하며, 자신과 가족들의 안위를 약속해 주었다.
그래도 불안하다. 혹시, 아주 만약에 주인님이 실패해서, 그래서 나와 내 가족들이 잘못되면…….
똑똑.
그녀의 이불 한구석이 눈물로 푹 젖어 들었을 때 즈음이었다. 누군가가 오래된 나무 문을 두드렸다. 노데이나는 흠칫 떨며 문 쪽을 응시했다.
똑똑.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두려움이 그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눈앞이 뿌옜다.
날 죽이러 왔어. 날, 날…….
아아…….
숨이 가빠지는 걸 느끼며 하녀는 덜덜 떨었다. 그녀는 문을 따고 들어온 장정들이 자신을 끌고 가는 상상을 했다. 아니, 어쩌면 이 자리에서 목이 썰릴지도 몰랐다. 상상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때, 누군가 문밖에서 그녀를 불렀다.
“노데이나.”
“……집사님.”
이 목소리는 늙은 집사였다. 노데이나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대충 닦으며 일어났다. 집사라면 적어도 자신을 죽이러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묘한 안도감과 민망함을 느끼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집사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얘져 있었다. 마치 아주 큰일을 맞닥뜨린 사람 같았다.
“잠시 나와. 네가 해 줄 일이 생겼구나.”
노데이나는 싫다고 하고 싶었으나 상전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로 그를 뒤따랐다. 집사도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앞장섰다.
둘이 도착한 곳은 주인의 방 앞이었다.
“지금부터 네가 보고 듣는 건 모두 비밀에 부쳐야 할 게다.”
집사의 경고를 끝으로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을 본 노데이나는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아, 아, 헤, 헤일라 님…….”
노데이나의 눈동자가 헤일라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만큼 잔인하고…… 또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보다시피 주인마님과 주인님의 몸이 좋지 않다.”
노데이나는 집사의 설명을 들으며 눈알을 천천히 굴렸다. 그러고 보니 주인님이 없었다. 공작이…… 그리고 마침내 노데이나의 시선이 침상에 닿았다.
주인은, 노데이나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주인은 죽은 사람처럼 침상에 누워 있었다. 미동도 없는 모습은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경한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여자 쪽은…… 왼쪽 눈을 다쳤다. 피가 철철 흘러 왼 얼굴과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작은 사고가 있었어.”
분명 공작의 소행이었다. 그럼에도 집사는 태연자약하게 사건을 포장했다. 노데이나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버렸다.
“주인님과 주인마님께서 많이 다치셨다. 그러니 신전에 가야겠지.”
“그, 그럼 얼른 사람들을 불러서…….”
노데이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러나 집사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많은 인원은 안 된다.”
그래. 그렇겠지. 공작이 결국 미쳐 제 부인의 눈알을 파냈다는 소문이 제국 전체에 퍼질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러니 너와 파이라 님, 둘이 주인님과 마님을 모시고 신전으로 가.”
아, 아…….
노데이나는 멍청한 소리만 내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는 집사를 한 번 보고, 헤일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헤일라는 왼눈을 지혈하며 발발 떨고 있었다.
저 집사는 알고 있을까? 우리가 백치라 믿었던 주인마님은 아주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어쩌면 이것도, 모두 헤일라의 계획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결국 하녀의 도움 없이 리안 휴리트를 잠재우는 데 성공했고, 이렇게…… 밖으로 나갈 구실을 만들어 냈다. 여기서 오직 집사만 그 사실을 몰랐다.
노데이나는 피가 차갑게 굳는 것 같았다. 그러나 종래에,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틀렸다. 공작은 결국 자신의 부인에게 당해 몸져누웠다. 자신은 이제 곧 저택 어딘가에 묻힐 것이다. 그건 지금 여기서 사실을 말하나 그렇지 않으나 비슷하겠지.
“저, 저는…….”
노데이나는 자신 쪽을 보고 있는 헤일라와 파이라를 흘긋 보고 천천히 말했다.
“네, 네,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신전으로…… 따르겠습니다.”
결국 그녀는 헤일라의 치맛자락을 잡고 가족의 안위만이라도 보장받게 해 달라 빌어 보는 쪽을 선택했다. 가족만이라도 살려 달라 빌어 봐야 했다. 처절하게 죽더라도 그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