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75화 (75/97)

75화.

“꺄아악!”

누군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무미건조한 얼굴이던 파이라까지도 이번에는 꽤 놀란 눈치였다.

“아기…….”

헤일라가 손잡이만 남은 딸랑이를 들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노데이나는 재빨리 쓰러지는 하녀장에게서 세리아를 안아 들었고, 하녀장의 몸은 그대로 무너졌다.

“하, 하녀장님!”

신입 하녀 다이네가 쓰러진 하녀장을 부여잡고 사람을 불렀다. 파이라와 함께 침실을 지키던 기사 하나가 다가와 하녀장을 업었다. 유모는 세리아의 눈과 귀를 막고 급히 방을 나갔다.

노데이나도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방 안에는 반드시 하녀가 상주해야 한다는 리안의 명에 따라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다이네와 함께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난장판이 된 침대 아래를 눈으로 훑은 뒤 다이네에게 눈짓했다. 헤일라가 내려와 발을 다치지 않게끔 하라는 의미였다.

“헤일라 님, 우선 그것부터 내려 두시고…….”

노데이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응당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헤일라의 멍한 눈이 노데이나에게 닿았다.

챙그랑!

그리고 헤일라가 유리 손잡이를 바닥에 던졌다. 노데이나는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침대 밖으로 비죽 나와 있는 헤일라의 발을 쥐어 침상 위로 올려 주었다.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어 주셔요, 네?”

그녀는 최대한 상냥히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얼른 치울 것을 들고 와 바닥을 쓸어야 했다. 그리고 새로운 하녀 두어 명을 더 불러 함께 시중을 들어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의 끈이 끊기는 건 금방이었다.

“내가 가만히 있길 바라면.”

“…….”

“나랑 대화를 좀 하죠.”

어느 때보다 또렷한 헤일라의 목소리 때문에. 노데이나는 이채가 감도는 맹금류의 눈동자를 본 사람처럼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목을 돌려 파이라를 바라봤다. 주인의 충실한 심복이자 헤일라의 감시자가 아닌가. 그러나 노데이나와 눈을 맞춘 파이라는 고요함만 유지할 뿐이었다. 그 옆에 있던 다이네 또한 과하게 침착했다. 헤일라의 변화에 놀란 건 자신뿐이었다.

대관절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노데이나는 뛰룩뛰룩 눈을 굴리며 입술을 벌렸다. 헤일라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였다.

팍!

얼이 빠진 노데이나의 멱을 잡고 헤일라가 자기 쪽으로 끌어들였다. 와삭, 하고 구두에 유리 조각들이 짓이겨졌다.

“정신 차려요.”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냉연한 목소리, 초점이 돌아온 눈동자, 억센 힘…….

“당신이 해 줘야 할 일이 있어요.”

저택의 모두가.

“그리고 날 돕지 않으면, 당신을 죽일 거야.”

이 여자에게 속고 있었구나!

“시간이 없으니 빨리 끝내시지요.”

노데이나의 뒤에서 파이라가 헤일라를 독촉했다. 헤일라는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열흘 뒤, 난 이 저택을 떠나요.”

경악에 찬 노데이나가 눈을 크게 뜨고 힉, 소리를 냈다.

“그때 당신은 리안의 차에 이걸 타요.”

달그락, 하고 하녀의 손 위에 알약 몇 개와 귀걸이 한 개가 놓였다. 헤일라는 친절하게 알약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 두라고 조언하고는, 귀걸이를 열어 안에 든 액체를 보여 주었다.

“저, 전, 저는…….”

“왜, 못하겠어요?”

“그, 열흘 뒤라면, 주, 주인님도 계시는…….”

“판단은 내가 해요.”

헤일라는 단호하게 노데이나의 반박을 일축했다. 사실 헤일라 또한 리안이 없을 때 도주하는 게 나을 거라 여겼던 때가 있었다. 그게 빠져나가기는 더 쉬울 테니까.

하지만 리안을 피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리안이 심어 놓은 인간을 다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저택에 리안이 없어도 그는 하루가 채 가기 전에 자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고, 그건 그가 전장에 있다 해도 다르지 않으리라.

반드시 그를 깰 수 없는 잠 속으로 유인해야만 했다. 약을 쓰든, 저주를 이용하든 머리를 잠재워 손발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조치해야 한다.

헤일라는 계획에 대해 전혀 모르는 어리숙한 하녀의 어깨를 쥐고 속삭였다.

“배신하면, 당신은 저택 지하에 묻힐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노데이나의 다리 힘이 완전히 풀렸다. 그녀는 한참 동안 주저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서는 울먹이며 유리 조각을 치웠다. 그리고는 나가 보아도 되겠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헤일라는 거기에 대고,

“입을 잘못 놀리면 어떻게 될지는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라고만 말했다. 노데이나는 울먹이면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고 쫓기듯 방에서 나갔다.

* * *

노데이나가 나간 뒤 헤일라는 침대 위로 꾸물꾸물 올라갔다. 남아 있는 다이네와 파이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다.

“저 하녀, 믿을 수 있는 애인가요?”

다이네가 가볍게 물었다. 그녀는 팔랑팔랑 걸어 다니며 침실 안을 둘러봤다. 방 안을 품평하려는 의도를 숨기지도 않은 채였다.

“아뇨.”

헤일라는 어딘가 초연한 얼굴이었다.

“나는 누구도 안 믿어요.”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헤일라는 가슴이 욱신대는 걸 느끼며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모두가 신입 하녀라 알고 있는 다이네가 헤일라의 침대 맡에 도착했다. 그녀는 앉아서 꺄르르, 웃었다.

“어머, 베르디안 님 말대로 정말 재미있는 분이네. 그런데 왜 저 하녀한테 약을 줘요? 저 하녀 입은 어떻게 막을 생각이신지.”

다이네의 말에는 묘한 책망이 담겨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심어 리안의 차에 수를 쓰자는 베르디안의 제의를 거절한 데 대한 반감 때문이리라.

헤일라는 피식 웃으며 침상에 기대 누었다.

“그건 당신들이 알아서 해야죠.”

순간 다이네의 눈빛이 예리하게 바뀌었다. 그녀의 낯은 웃은 채로 굳어 있었다.

“정말 날 도울 생각이면 하녀 하나 구워삶는 일 정도는 해 줄 거라 생각해요.”

아, 그러니까 저 여자는…… 부러 낯선 하녀를 끌어들여 베르디안을 시험하고 있었다. 정말 헤일라를 빼내지 못해 애가 닳은 거라면 알아서 수습해 보이라는 것이다.

건방진…….

다이네가 잔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입매를 우그러트렸다. 그걸 뒤에서 보고 있던 파이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

“당신의 주인이 한 말을 잊지 마.”

파이라는 그 말만 하고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리안이 올 때가 되어 경계하기 위함인 듯했다. 다이네가 턱에 힘을 잔뜩 주었다가 이내 눈꼬리를 확 휘었다.

“네, 물론이죠.”

베르디안은 헤일라의 말에 복종하라고 일렀다. 어릴 때부터 그의 심복으로 살아왔던 다이네로서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럼 전 저 하녀를 열심히 겁박하고, 음, 당일에 세리아 아가씨를 데리고 지하로 가면 되는 거죠?”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녀는 살기를 숨기며 헤일라의 손을 꼭 잡았다.

“걱정 마세요. 베르디안 님은 헤일라 님 편이거든요. 못 믿고 계시지만…….”

점점 더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헤일라는 아픈 티를 내지 않고 다이네의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것을 깬 건 파이라였다.

“리안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창밖을 보고 있던 파이라가 다가와 경고하듯 속삭였다. 다이네와 헤일라는 언제 눈을 맞춰 신경전을 벌였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헤일라는 침상에 완전히 누워 몸을 돌렸고, 다이네는 그 옆에 서서 평범한 하녀처럼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게 정돈되었다.

끼익.

문이 열렸고,

“다녀왔어, 헤일라.”

리안 휴리트가 돌아왔다. 그는 헤일라에게 몹시 미안한 사람처럼 허둥지둥 침상으로 뛰었다.

“미안해, 화가 많이 났다고 들었는데.”

그는 이미 아래에서 헤일라에게 머리를 얻어맞은 하녀장을 치우라고 이른 참이었다. 헤일라의 심기를 건드린 사람을 고용하여 아주 공교로운 낯이었다.

“아, 아…….”

헤일라는 백치처럼 말을 더듬으며 리안을 흘금댔다. 그리고는 손을 꼬물대며 어쩔 줄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눈알을 굴렸다.

“많이 놀랐구나…….”

리안은 그런 헤일라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그 사람 이제 여기 못 와. 헤일라 못 괴롭히게 내가 혼내 줬어.”

나 잘했지? 리안이 헤일라에게서 조금 떨어져 눈을 빛냈다. 칭찬을 바라는 듯했으나 그녀는 제 손만 내려다보며 검지의 거스러미를 뜯었다.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는 등뼈가 도드라진 등을 천천히 두드리며 헤일라를 진정시키려 했다. 기실 여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도 리안은 괜찮다고 계속 속삭였다. 이 상황을 약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리안은 헤일라를 안은 채로 하녀가 준비해 온 과일을 흘금 보았다. 그는 청포도 한 알을 포크에 찍어 헤일라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헤일라는 우물대며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댔다.

그녀의 눈이 찰나에 번뜩였다가 다시 빛을 잃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붙어 있던 둘은 정원에 산책을 나갔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리안이 안고 산책을 시켜 주는 격이었다. 기르는 개를 끔찍이 여기는 주인처럼 그날도 리안은 헤일라의 모든 걸 관찰하고, 관리했다.

그런 단조로운 날들이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리고 열흘이 지났다.

“드디어.”

레테의 망령이 헤일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드디어, 약속의 날이 되었다.

* * *

“헤일라, 오늘 세리아랑 산책한 거 재밌었지?”

리안은 살갑게 묻고는 헤일라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멍한 얼굴을 하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에 초록색 잎을 가진 꽃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리안이 헤일라의 주의를 돌리려 입을 열었다.

“세리아 말이야. 어제 혼자 기는 데 성공했대.”

그는 요즘 들어 아기에 관한 이야기를 부쩍 많이 해 댔다. 헤일라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의미한 반응을 하지 않으려는 부단한 노력이었다. 그녀의 정신은 오롯이 방문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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