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달칵.
그 순간, 헤일라의 눈이 반짝 뜨였다. 리안이 밟은 타일이 요란한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다행히 리안은 정사에 완전히 취해,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헤일라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달칵, 달칵.
리안이 약간씩 자세를 움직일 때마다 그가 밟고 있는 타일이 들썩였다. 헤일라는 그제야 끔찍한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리안이 밟고 있는 타일 아래, 수면제가 숨겨져 있다.
“아아, 헤일라…….”
긴장감에 질 내벽이 확 수축하며 남근에 다닥다닥 들러붙었다. 리안은 느른하게 숨을 내쉬며 잠시 눈을 감았다. 안쪽을 온전히 느끼기 위함이었다. 습한 동굴이 성기 뿌리까지 탐하려는 듯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른 뒤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헤일라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아, 흣, 그만, 그만!”
헤일라는 리안에게 애원하며 울먹였다. 당장 행위를 멈춰야 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들킬지도…….
“아아!”
쑥, 하고 들어온 기둥이 헤일라의 자궁구를 문지르며 밀어 올렸다. 짓눌렸다가 미끌대며 틀어졌다. 몸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망가지는 듯한 감각에, 헤일라는 허리를 떨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단단한 어깨에 물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하아…….”
그걸 느낀 리안이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고 중얼대면서 다시 헤일라를 카우치에 눕혔다. 그리고는 진득하게 얼굴을 관찰하며 볼에 입을 맞췄다. 아무래도 헤일라의 표정을 느긋이 관음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남자는 더 흥분해 허리를 흔들어 댔다. 헤일라는 엉엉 울면서도 그가 자리를 옮겨 천만다행이라 여기며 그를 받았다.
정사가 모두 끝났을 때 즈음에는 탈력감에 눈앞이 아롱대는 걸 간신히 견뎠다.
잘못을 저지른 뒤에 꼬리를 치며 주인에게 잔망을 떠는 강아지처럼, 리안은 격한 관계 뒤에는 더욱 상냥해졌다. 그는 헤일라에게 가운을 입히고 침실로 돌아와 이불 안으로 그녀를 밀어 넣고 한참 동안 토닥여 주었다.
베르디안과의 거래, 그리고 낯선 장소, 마지막으로 리안과의 거친 정사까지. 불면증 환자 행세를 하는 헤일라였지만, 지금만큼은 잠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체취를 좇으며 까무룩 잠들었다.
그리고 헤일라가 잠든 지 두어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림자처럼 방에 숨어 있던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검게 물들이고 있는 남자는 한참 동안 침묵하며 리안의 뒷모습만을 바라봤다. 공격할 때를 기다리는 맹수라기보다는, 주인의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냥개 같은 모습이었다.
리안이 헤일라의 뺨을 어루만지고는 목을 울렸다.
“말해. 잠들었어.”
지금은.
리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심복에게 물었다. 파이라는 아니었다. 파이라는 지금 연인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그는 파이라 이외에 리안을 보필하는 심복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파이라도 모르는 리안의 사람이었다. 리안이 헤일라의 머리칼을 검지로 꼬며 물었다.
“약은 어디에 숨겼지?”
“……욕실 구석의 타일 아래였습니다.”
아. 리안이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감탄과 은은한 안타까움이 배어든 목소리다.
“그래서 오늘 그렇게 조였구나.”
구석진 곳에 몰았을 때 아래를 바짝 조이던 걸 기억해 낸 리안이 설핏 웃었다. 귀여운 헤일라. 그가 잠든 여자의 귓가에 속살댔다. 그리고는 상체를 숙여 헤일라의 도톰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헤일라 님이 숨겨 두신 약들과는 무관하지만, 베르디안 루데인 후작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가 저택에 사람을 심었습니다.”
유능한 부하는 자신이 파악한 바를 지체 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베르디안과 황제의 거래, 그리고 앞으로 그들이 헤일라를 어떤 방식으로 빼돌릴지 예측하여 설명하는 솜씨는 꽤나 훌륭했다.
“후작 쪽을 잘 살펴. 내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헤일라를 빼낼 수 있는 건 베르디안밖에 없으니.”
“예.”
“정문 쪽은 은밀함과는 거리가 머니까, 아마 지하와 이어지는 통로 쪽에 있다가 헤일라를 데려갈 거야. 그러면…… 그때 죽여.”
리안은 오랜 친우를 죽이라 명하면서도 고저가 없는 목소리였다.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것처럼 철저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심복을 내보내고는 침상에 누워 있는 여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달빛과 침묵, 그리고 내려앉은 어둠뿐이었다. 파란의 중심에 설 여자는 여느 때보다 더 순진한 얼굴로 잠에 취해 있었다.
* * *
리안과 헤일라가 저택에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다. 노데이나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세리아를 돌보고 있었다. 옆에서는 유모가 세리아의 입 옆에 흐른 침을 닦아 주고 있었다. 보드라운 천의 촉감이 좋은지, 아기는 입을 오물대며 헤죽 웃어 댔다.
“아이구, 우리 예쁜 아기씨.”
노데이나는 뿌듯한 얼굴로 함께 따라 웃었다. 평화로운 오후의 한때였다.
“아우우, 아우우우!”
세리아가 몸을 뒤척대며 눈앞의 딸랑이를 향해 손을 휘적댔다. 뒤집기를 할 기세였다. 세리아는 이제 곧잘 뒤집기를 하였다. 얼마 전에는 스스로 앉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곧 길 수도 있을 것이라며 유모가 말했으니, 이제 정말 다 컸다. 팔불출의 마음으로 노데이나는 가슴을 틀어쥐었다.
그때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세리아 아가씨 식사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주인 마님에게 아가씨를 데려가려는 하녀의 등장이었다. 오늘은 리안이 황궁으로 잠시 출타 중이라, 하녀장이 헤일라의 옆에 딱 붙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하녀를 보낸 것이리라. 아침은 마님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서 유모가 분유를 먹였는데, 지금은 괜찮으려나.
노데이나는 걱정되는 마음을 안고 주섬주섬 세리아의 짐을 챙겼다. 요즘 들어 칭얼댐이 잦아진 아가씨를 달래기 위한 여러 장난감들이었다. 장인이 섬세하게 세공한 유리 안에 조개 조각들이 들어가 있어 흔들면 청량한 소리를 내는 딸랑이도 챙겼다. 요즘 세리아가 특히 좋아하는 장난감이었다.
“겨우 정신이 돌아오셨어요. 얼른 가자고요.”
새로 들어온 신입 하녀가 귀찮다는 듯 노데이나를 채근했다. 유모님에게는 차마 말 못 하고 나한테만. 다이네라는 저 하녀는 싹싹한 성격으로 하녀장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아부 떠는 실력이 남다르다는 의미였다. 노데이나는 입을 삐죽대면서도 빠릿하게 움직였다.
세리아를 데리고 공작의 방문 앞에 당도하는 건 금방이었다. 그들은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셋은 익숙하게 기다렸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파이라였다. 요즘 들어 통 보이지를 않더니,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나 보다. 노데이나는 그렇게 여기고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헤일라 님, 세리아 아가씨예요.”
노데이나는 부러 경쾌하게 헤일라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한 번에 세리아의 주린 배를 채워 주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유모가 그에 화답하듯 비쩍 마른 여자에게 세리아를 내밀었다. 다행히 헤일라는 아기를 거부하지 않고 안아 들었다. 모두가 안심했다.
“여기 젖병을…….”
노데이나는 헤일라에게 젖병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순간, 세리아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웅, 으우, 으우우우……!”
안긴 자세가 불편한 건지 계속 뒤척이며 허우적댔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어미를 보면 좋아 헤죽대기 바빴는데…….
노데이나가 급히 딸랑이를 꺼내 들었다. 꽤 묵직한 것을 열심히 흔들어 경쾌한 소리를 내어 보았으나 아기를 달래기는 역부족이었다. 노데이나는 딸랑이를 헤일라의 옆에 내려다 두고 다른 장난감을 찾았다.
“아휴…….”
그때 하녀장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침상 쪽으로 성큼 다가와 무표정한 얼굴로 헤일라를 내려다보았다. 하녀장이 세리아를 빼앗아 든 건 순식간이었다. 세리아의 울음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그럼에도 하녀장은 자신이 달래겠다며 헤일라에게 세리아를 내어주지 않았다. 굉장히 단호한 태도였다.
따지고 보자면 꽤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정신이 나간 여자에게 우는 아기를 맡기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짜증이 난다고 아기를 던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목이 날아가는 건 사용인들이었다. 그러나 헤일라도 물러서지 않고 무엇에 씐 사람처럼 팔을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아기, 아기…….”
헤일라가 멍한 얼굴로 세리아를 불렀다. 방 안의 모두가 헤일라와 하녀장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기, 아기가…….”
헤일라는 침상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 서 있던 하녀장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차마 그것을 쳐 내지 못한 하녀장이 하, 하고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헤일라의 힘이 억센지, 그녀는 풀썩, 하고 침대에 걸터앉게 되었다.
“내 아기, 돌려, 돌려주세요…….”
헤일라가 중얼중얼 말했다. 세리아는 이제 히끅대며 숨넘어갈 듯 울고 있었다. 노데이나와 유모는 세리아가 걱정되어 안절부절못했다.
“이거 놓으…….”
“아기, 아기, 아기…….”
하녀장이 세리아를 안은 채 제 치마를 부여잡고 헤일라를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헤일라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아, 정말!”
결국 폭발한 하녀장이 헤일라를 탁, 하고 밀쳤다. 순간 선을 넘어 버렸다고 생각한 하녀장의 몸이 얼었다. 그녀는 리안의 심복인 파이라를 흘긋 보았다. 그러나 그는 딱히 하녀장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
하녀장은 등줄기에 땀이 주룩 흐르는 걸 느끼며, 나중에 저 남자에게 돈이라도 조금 쥐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일단 안심하며 다시 헤일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찌 되었든 무례를 저질렀으니 사죄를…….
퍽!
그러나 그 순간, 둔탁한 마찰음이 하녀장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주룩, 하고 무언가 흐르는 감각이 목덜미에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