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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73화 (73/97)

73화.

헤일라는 무언가 미심쩍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 남자, 대체 언니와 무슨 관계이길래 황제와 공모까지 한 걸까. 리안을 속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언니는 죽었는데. 언니와 보통 깊은 관계가 아니고서야…….

그녀는 차마 생각을 맺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당신 우리 언니랑 무슨 관계예요?”

“아…….”

베르디안은 침음을 흘리고 잠시 숨을 참았다. 헤일라는 그 모습을 미심쩍게 바라봤으나, 그는 이내 약간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연인?”

베르디안은 약간 벅찬 목소리였다. 일순 헤일라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사기꾼 보듯 그를 응시하고 말았다. 몸을 살짝 뒤로 물려 그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낸 건 덤이었다.

“……당장 이 방에서 나가요.”

언니가, ‘그’ 레테가 연인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헤일라는 레테가 남자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잘 알았다. 레테가 연인을 만들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적나라한 반응에 베르디안이 급히 말을 주워 담았다.

“아, 농담이야. 그냥 나 혼자 좋아한 거지.”

그는 과장된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어댔다.

“걘 진짜 완벽했거든. 죽어 버렸지만.”

헤일라는 슬슬 그가 정상이 아님을 눈치챘다. 언니와의 관계에 관해 물어봐야 정상적인 답변을 얻기는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남자는 헤일라가 미친 척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자칫 방치했다가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녀는 질문의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그럼 내가 수면제를 숨기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휴리트 저택에 간 날, 집에 가는 척하고 네 방 발코니로 숨어들어서 널 봤지.”

“하.”

발코니 뒤에서 훔쳐봤다니.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헤일라는 점점 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짜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나 해서. 그러면 내가 일을 벌인 보람이 없잖아.”

“언니가 부탁해서 하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헤일라가 톡 쏘듯 이야기하자, 베르디안이 잠시 주춤하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음, 그렇지. 어쨌든 저택에서 나가고 싶은 거라면 그걸 써. 리안에게는 일반 수면제가 들지 않아.”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베르디안이 말하고 있는 건 헤일라도 대충 눈치챈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수면제를 모으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를 자극하려고. 그래서 눈을 파이면, 며칠의 여유가 생기니까.

헤일라는 부러 이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쥐고 있는 가장 좋은 패를 함부로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네가 뭘 생각하든 이게 나을 거야. 레테의 안배는 틀리지 않으니까.”

그러나 베르디안이 준 약이 확실한 효능만 가지고 있다면, 그가 하는 말이 맞았다. 왼눈을 포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일은 더 편하게 굴러갈지도 몰랐다. 게다가 언니는 예언의 힘을 갖고 있었으니까. 리안과 헤어질 완벽한 방법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하지만…….

헤일라는 잔잔하면서도 또렷한 얼굴로 수많은 경우의 수를 가늠해 보았다. 베르디안은 꽤 신중한 여자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무언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정 의심스러우면 네가 모으는 수면제랑 네이오라를 함께 써. 그리고 그날 내가 저택을 빠져나가는 걸 도와주지.”

베르디안의 제안을 듣던 헤일라가 명징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어느 때보다도 온전하고 이성이 번뜩이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약간 비아냥대며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날 도와요? 언니가 이것도 시켰어요?”

“아니. 이건 안 시켰어. 그런데 꼭 말을 해야 아나? 걘 분명 내가 이러기를 바랐을 거야.”

“…….”

“너랑 리안이 붙어 있는 꼴을 끔찍해했으니까. 그 앤 좀 끈질겨서, 죽어도 제가 원하는 그림을 보고 죽어야 할 것 같았거든. 내가 대신 이뤄 주려고.”

그는 그냥 그러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까 넌 도망을 가야 해. 아주 멀리멀리.”

“날 죽이지 않는 건요? 언니는 그걸 가장 원했을 텐데.”

헤일라가 씁쓸히 웃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였다. 레테라면 차라리 동생을 죽여 달라 부탁했을 것 같은데. 언니는 그러고도 남을 인사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언니를 이해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베르디안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을 비웃듯 피식댔다.

“너는 네 언니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구나.”

무언가에 잔뜩 물이 들어 우그러진 것 같다. 베르디안은 그만큼 축축하고 종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이 헤일라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언니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알아요.”

언니와 평생을 함께 살아온 사람은 자신이었다. 언니가 자신을 얼마나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했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레테와 자신의 역사라고는 한 톨도 알지 못하는 이는 함부로 판단할 계제가 못 되었다.

“글쎄.”

그럼에도 베르디안은 의뭉스런 대답만 남기고 화제를 전환했다.

“약속한 때에 리안에게 약을 먹여 재우기만 해. 그럼 내 사람이 널 데리고 공작가의 지하로 안내할 거야. 밖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가 있는 곳이거든.”

“……당신의 사람?”

“아아, 너도 아는 사람인데.”

베르디안은 가볍게 웃고는 덧붙였다.

“내 말만 잘 따르면, 다른 나라 가서 자리 잡고 사는 건 힘들지 않을 거야.”

“아니, 잠깐…….”

“나머지는 다음에 사람을 통해서 전하지. 곧 리안이 돌아올 테니.”

헤일라는 시간의 흐름을 그제서야 깨닫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리안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긴장으로 목이 죄어 왔다.

그녀는 베르디안을 추궁하는 걸 포기하고 우선 누웠다. 베르디안이 자신이 원래 앉아 있던 소파 쪽으로 가 앉는 게 보였다. 그는 담배 파이트에 곧바로 불을 붙였다. 그걸 확인한 헤일라는 곧바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베르디안이 바꿔 끼운 오른쪽 귀걸이가 유독 더 무겁게 느껴졌다.

* * *

사흘 전 황궁으로 바퀴를 굴렸던 공작의 마차가 휴리트 저택 앞에 멈췄다. 그 안에서 헤일라를 안은 채로 내린 리안이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황궁에서 있었던 소동을 암암리에 전해 들은 사용인들은 공작이 무사히 돌아온 데에 안심했지만, 동시에 그의 비틀린 심기에 긴장했다. 공작은 돌아온 직후부터 헤일라와 방에 틀어박혔다.

“미안해, 헤일라.”

둘은 옷만 갈아입은 채로 침상 위에 기대앉아 있었다. 혼인 서약을 미처 마치지 못하고 저택으로 돌아온 게 죄스러운지, 리안은 헤일라를 껴안고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누가 보면 헤일라가 정식 공작 부인이 되는 걸 필생의 염원으로 여긴 줄 알았을 것이다.

“응, 으응…….”

헤일라는 백치 같은 목소리로 칭얼대며 리안의 목을 껴안았다. 꼭 껴안고 품 안으로 파고들자, 리안은 무엇에 감동을 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여자를 꽉 껴안았다.

“걱정 마. 곧 해결될 테니까…….”

리안은 어르는 투로 속삭이고는 황금빛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었다. 쪽쪽, 귓불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여자의 가는 다리 사이로 향하는 두툼한 손의 움직임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헤일라는 다리를 바짝 모으며 신음 소리를 냈지만 리안은 등을 토닥이며 등 뒤의 단추까지 끌렀다.

참으로 한결같은 작태다. 헤일라는 속으로 짜증이 이는 것을 느끼며 단단한 가슴을 살짝 밀쳤다. 리안은 익숙한 듯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

“많이 피곤해?”

“잘래, 잘래…….”

“음.”

리안은 대답하지 않은 채 헤일라의 머리칼만 한참을 쓰다듬었다.

“그럼 씻고 자자.”

리안은 헤일라의 옷을 한 꺼풀 벗기며 웃었다. 그녀는 리안에게 몸을 맡기고 눈만 끔벅댔다. 마른 알몸이 두툼한 팔에 들려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건 금방이었다.

리안은 손으로 물 온도를 확인하고 헤일라를 욕조에 앉혀 놓았다. 그리고는 욕조 턱에 앉아 손으로 물을 퍼 헤일라의 어깨에 뿌려 몸을 적셔 준 뒤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뜻하다, 그렇지?”

“응…….”

그리고 예상한 대로 헤일라와 리안은 욕실에서도 손을 뻗어왔다. 그는 정성스레 씻긴 여체를 카우치에 눕혔다. 헤일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불안하게 좌우를 둘러봤다.

“싫, 싫어…….”

“아니야. 무서운 거 아니야.”

리안은 킥킥대며 헤일라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상냥하게 이마에 입 맞춰 준 남자의 성기는 흉흉하게 발기해 있었다. 배꼽까지 닿아 있는 남근을 본 헤일라는 겁을 먹은 사람처럼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리안에게 손목을 잡혀 꼼짝없이 몸을 내어주었다.

그다음부터는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리안은 일방적으로 헤일라를 밀어붙였다. 음핵을 문대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구멍을 넓혔다. 그리고는 곧바로 삽입해 허리를 쳐올렸다.

헤일라는 수증기가 어그러진다 느낄 정도로 아찔했다. 그녀는 행위가 얼른 끝나기만을 바라며 그에게 매달렸다.

“아, 아응!”

“흣.”

리안이 삽입한 상태에서 마른 여체를 들어 올렸다. 무릎 아래를 제 손으로 받쳐 상체만 벽에 붙이자, 바짝 긴장한 헤일라의 안쪽이 확 졸아들었다. 흰 발끝은 곱아들었고 종아리는 위아래로 허우적댔다.

“아, 아아…….”

불안한 자세에 헤일라의 엉덩이가 움찔댔다. 리안은 축축한 혀로 목덜미를 핥으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동시에, 팔에서 힘을 약간 뺐다.

“히익!”

헤일라의 몸이 약간 내려간 순간 리안이 허리를 쳐올렸다. 어느 때보다 깊은 삽입감에 헤일라가 진저리를 치며 리안의 팔뚝을 잡았다.

“시, 시러, 아, 아……!”

“헤일라, 헤일라.”

리안은 혀로 윗입술로 핥으며 눈이 풀린 헤일라의 얼굴을 감상했다. 그리고 몇 번이고 같은 방식으로 성기를 박아 댔다. 헤일라는 자궁이 밀려 올라가는 것 같은 압박감을 오롯이 견디며 리안의 어깨를 긁었다. 그는 그것조차 황홀한지 더해 달라 속삭이며 도톰한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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