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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72화 (72/97)

72화.

황제 음독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은 황태자가 맡았다. 주요 가문의 귀족들이 다수 용의 선상에 올라 있는 만큼, 황족이 조사를 주관해야 한다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귀족은 없었다. 이 사건은 황제 측에 아주 좋은 기회였다. 황족을 견제하는 신전과 귀족들의 중추를 잘라 버릴 수도 있는 대형 사건이었다. 아직도 황제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정도로 지독한 음독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사건이 벌어진 직후 본관의 문을 폐쇄했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도 성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배정된 방에서 심문의 차례를 기다렸다. 데려온 호위들 또한 따로 심문을 받아야 했기에 방 안에는 귀족들만 머무를 수 있었다. 황실의 기사들이 방 안팎을 지키고 있는 건 덤이었다.

그런 이유로, 리안과 베르디안, 그리고 헤일라는 황궁에서 배정해 준 방에서 심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귀찮네.”

리안은 금빛 투구를 쓴 황실의 기사들을 의식하지 않는 듯 뇌까렸다. 그는 가까스로 잠이 든 헤일라를 두어 번 더 토닥인 뒤 침상에서 일어났다. 베르디안은 리안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황제 시해 의혹에 휘말릴 테니 얌전히 있으라는 거지.”

“음.”

리안은 성가신 눈치였다. 혼인 서약을 핑계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더니 결국 사람을 이리도 짜증 나게 만들다니. 그는 저를 어여뻐하는 황제가 사경을 헤매는 데도 지루한 낯으로 한숨을 쉬었다.

“뭐, 적당한 놈들 추려서 목을 썰겠지. 평소에 거슬리던 것들 한둘쯤.”

베르디안의 입에서 반황제파 귀족의 이름 몇 개가 나왔다. 희생자로 지목될 만한 귀족들의 이름이었다.

“내가 하면 좋겠는데.”

죽을지도 모르는 이들을 지명하던 베르디안이 입맛을 다셨다. 옛날부터 그가 가진 기이한 취향이었다.

베르디안은 아무나 잡아 죽이는 걸 즐기지 않았다. 쉬이 건드릴 수 없는 질서를 파괴하고 불문율을 재조립하는 데 쾌감을 느끼는 종자였다. 그가 귀족들의 참수형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했다. 악우의 조악한 취미 생활이 익숙한 리안은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침상 쪽을 힐끔 확인했다. 베르디안이 약간 질린다는 투로 물었다.

“차라리 심문받을 때도 주머니 속에 넣어 가지 그래?”

빈정거림이 리안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 너 정도면 이르게 끝낼 테니 걱정 말고 다녀와. 내가 있잖아?”

베르디안은 부러 곰살맞게 웃었다. 약을 올리는 태도였다. 모든 사람이 심문을 받아야 했고, 심문은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다. 황족 시해가 중죄에 해당하는 만큼 철저하게 조사를 벌여야 했다. 리안 또한 예외 없이 헤일라를 두고 심문을 받으러 가야 한다는 의미다.

리안은 베르디안의 얼굴이 천진하게 밝은 만큼 기분이 더러워져 헤일라에게 다시 다가갔다. 이렇게 보면 거의 분리 불안을 겪고 있는 개새끼 같다고, 베르디안은 생각했다.

“내가 다녀올 동안,”

“절대 안 깨우고, 안 다가갈게. 일어나도 말 안 걸게.”

친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르디안이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자신이 방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내내 리안에게 들은 말을 줄줄 읊었다.

“그래.”

리안은 탐탁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헤일라를 황실의 기사들과 덩그러니 둘 수는 없었다. 리안은 황제가 헤일라를 몹시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적이 많은 인간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믿을 수 있는 귀족을 헤일라 옆에 붙여 두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인성이 밑바닥인 리안은 친우라 할 만한 게 베르디안밖에 없었다. 물론 루데인 후작을 잘 모르는 사람은 되레 그가 헤일라를 못 살게 굴지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괴팍하기로 유명한 베르디안은 아이러니하게도 보는 눈이 많은 장소에선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 이 방에는 황제의 시종과 기사들이 있었고, 베르디안은 쓸데없는 짓을 해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아무리 쾌락을 좇는 데 몰두하는 인간이라도 귀족은 귀족. 그는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킬 줄 알았다. 언제나 과하게 즐기는 것 같지만 절대 자신의 지위를 놓아 버리지는 않는 아슬아슬함이 그의 본질이었다.

레테의 죽음을 냉정하게 덮어 버린 모습만 봐도 그랬다. 후작은 관심을 갖고 아끼는 대상이 나타나도 자신의 기반을 조금이라도 흔들면 냉정하게 쳐 냈다. 그것이 리안이 베르디안을 곁에 두는 이유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리안 님. 가시지요.”

황태자의 심복이었다. 리안은 헤일라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다가가 그녀의 이마를 한 번 뒤로 쓸어 준 뒤 입을 맞추고 방을 나갔다. 하루종일 피로에 시달렸던 연인은 아마 몇 시간은 죽은 듯 수면에 취하리라.

그렇게 리안은 삼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잠시 헤일라의 곁을 떠났다.

* * *

방에는 헤일라와 황실의 기사들 셋, 그리고 베르디안만 남았다. 베르디안은 속으로 다섯을 세고 검지로 의자 팔걸이를 세 번 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푹.

침상의 매트리스가 꺼지면서 가벼운 소리를 내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숙면을 취하는 듯 얼굴에 미동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디안이 히죽 웃었다.

“재밌네, 이거.”

그리고는 헤일라의 턱을 휙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움찔. 그제야 여자의 몸이 반응했다.

“그만 일어나.”

헤일라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데도 시침을 떼는 게 여간 괘씸한 게 아니었다. 베르디안이 이죽댔다.

“끝까지 자는 척하게? 나는 너한테 기회를 주려는 건데.”

“…….”

“그럼 리안에게 말해야겠네. 네가 미아르 에르단도한테 받은 수면제를 욕실에…….”

결국 헤일라의 눈꺼풀이 열림과 동시에 베르디안이 입을 닫았다. 그녀는 고요한 눈으로 베르디안을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 방 안의 기사들에게로 시선을 옮겨 흘금댔다. 아무래도 그들의 의식해 섣불리 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안심해. 저들은 귀가 귀가 먹었거든. 그런 이들로 배정하라 일렀으니.”

베르디안은 침상에서 일어나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투구를 벗으라는 신호였는지, 기사들은 곧바로 투구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두툼한 철 덩어리가 벗겨진 관자놀이 옆쪽을 본 헤일라의 어깨가 바짝 굳었다. 방을 지키고 있는 두 기사의 귀는 모두 뜯겨 나가 있었다.

그녀는 기사들을 살피던 눈길을 거두고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베르디안을 경계하는 눈초리는 거두지 않은 채였다. 그 모습을 본 베르디안이 갑자기 낄낄대기 시작했다.

“언니랑 비슷하네.”

언니? 갑작스레 나온 레테의 이야기에 헤일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든 의심부터 하는 거. 비슷해.”

“…….”

“그런데 이상하지. 딱히 너한테 쑤시고 싶다는 마음은 안 들어.”

역시 레테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그는 잔잔한 말투로 헤일라가 기겁할 만한 말을 내뱉었다. 뭘…… 쑤셔? 헤일라는 베르디안의 말을 더듬어 보다가 인상을 깊게 찌푸렸다.

“당신 뭐예요?”

헤일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곤댔다.

“베르디안. 베르디안 루데인. 레테가 내 얘기 안 했어?”

그는 약간 실망한 투로 물었으나, 헤일라는 침묵했다.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다. 베르디안은 금세 아쉬운 기색을 지워 내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뭐,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이야기할게. 난 레테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려고 널 만나러 왔어.”

“언니의 부탁?”

헤일라는 종잡을 수 없는 남자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내기 위해 날을 바짝 세워 물었다. 저도 모르게 눈 끝이 바짝 올라갔다.

“응. 레테가 마지막으로 부탁한 게 있거든.”

그가 주머니 속을 뒤적대다가 붉은 귀걸이 한쪽을 들어 올렸다.

“아.”

놀랍게도 그것은 헤일라의 귀에 달려 있는 것과 같은 귀걸이였다. 황제가 선물한 보석과 완벽하게 똑같은 모양이다.

“잘 봐.”

기다란 보석의 윗부분을 천천히 힘을 주어 돌리니, 실처럼 가는 균열이 생기며 뽁, 하고 보석의 위와 아래가 분리되었다. 그가 천천히 분리된 귀걸이의 아랫부분을 기울여 헤일라에게 보여 주었다. 놀랍게도 안에는 액체가 일렁이고 있었다.

“마시면 사흘하고도 반나절은 죽은 사람처럼 잠들게 하는 네이오라라는 약이야. 맥박도 숨도 옅어져서 진짜 죽은 사람처럼 위장할 수도 있는.”

구하려고 바다 건너까지 다녀왔지. 그가 생색을 내듯 덧붙였다. 그러나 헤일라는 그가 다른 이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째서?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헤일라는 묘한 위화감을 떨쳐 내고 중요한 사실을 물었다. 어느새 그녀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언니가 그걸 나한테 주라고 했어요?”

“응.”

베르디안은 잠시, 레테가 보냈다는 신전의 시종이 한 말을 떠올렸다.

‘레, 테 님, 께서, 흑, 베르디, 안 님께 전해야 할 말이 있다, 고 하셔서. 가 보라고, 서둘러 가라고, 하, 하셨…… 습니다, 아, 그, 부탁한 건,’

“너를 위한 거라고.”

‘헤일라를 위한, 거라고…….’

“너를 위해 쓸 물건이라고 했어. 그러니 네게 줘야지.”

“나한테 그걸 왜.”

“쓸 데가 있지 않겠어?”

그는 친절하게 헤일라의 귀에 걸려 있던 귀걸이 한쪽을 뺐다. 그리고 액체가 들어 있던 귀걸이를 다시 조립해 헤일라의 귀에 걸어 주었다. 언뜻 만져 보니 손끝에 느껴지는 굴곡과 정교함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처음부터 한 쌍이었던 것처럼.

……이렇게까지 똑같은 귀걸이라면, 이를 선물한 황제 또한 이 남자의 계획에 동참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폐하와 공모하셨군요.”

“아주 멍청하지는 않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베르디안의 거래였다. 황태자는 다음 황위를 확실히 보장받고 싶어 했고, 황제는 리안과 헤일라가 떨어지기를 바랐으며 베르디안은 레테의 염원을 이뤄 주어야 했다. 셋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까지 모두 늘어놓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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