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뭐, 더 할 말이 남았나?”
“폐하. 얼굴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럼 좋다고 춤이라도 춰야 하나.”
“……폐하께서는 여전히 헤일라라는 여인이 마음에 차지 않으십니까?”
“당연한 소리를.”
다른 시종이 했다면 건방진 언사라며 벌을 내렸을 것이었다. 루나이드가 페이네리아를 어릴 적부터 돌봤던 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질문이었다. 페이네리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천한 신분의 계집이 마음에 들 구석이 어디가 있어.”
“그런 이유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루나이드.”
페이네리아가 경고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충직한 시종은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공작은, 아니 리안 도련님은 타델리아 님이 아닙니다.”
황제가 리안을 타델리아 공주의 대용품으로 본다는 건 죽은 타센도, 리안 본인도, 페이네리아도 알았다. 누구도 문제 삼은 적 없기에 수면 위로 올라온 적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
“그리고, 리안 도련님은 타센 휴리트와도 완전히 다른 인간입니다.”
움찔. 페이네리아의 손끝이 떨렸다. 그녀는 오랜 시종의 통찰력에 잠시 말을 잃었다.
“헤일라 님을 대하는 리안 님의 태도에서, 타센 휴리트를 떠올리는 게 힘드신 게지요. 압니다.”
정확했다.
사실 페이네리아가 싫어했던 건 헤일라라는 여인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이 끔찍하게 증오하는 타센과 겹쳐 보이는 리안이 싫었던 것이다.
결국 리안을 미워하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동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아이를 미워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과거에 머무르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망자는 이제 그만 놓아주시지요. 이미 하실 수 있는 모든 걸 하셨습니다. 게다가…….”
그가 잠시 망설이듯 입을 달싹였다. 백발의 노인이 주름진 얼굴 근육이 움직여 딱딱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미래를 읽는 자도 바꾸지 못한 미래를 무슨 수로 바꾼단 말입니까…….”
일순 페이네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분명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죽어 버린 예언자와의 약속을.
루나이드는 황제를 상대로 맹랑하기만 했던 예언자, 레테를 떠올렸다.
‘세느리움에 헤일라와 공작을 초대해요. 거기서 대신관 임명식 전에 리안 휴리트를 불러내는 거죠. 물론 헤일라 없이 독대하셔야 합니다.’
‘그렇게만 하면 되나? 그 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불러내기만 하신다면…… 리안 휴리트와 헤일라의 관계는 영영 돌려놓기 힘들 만큼 부서질 겁니다. 장담하죠.’
레테는 끝내 황제에게 무슨 일을 꾸미는지 전부 털어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제는 레테를 믿었다. 오랜 관찰 끝에 레테가 리안을 깊이 증오함을 알아냈고, 세상 그 누구보다 제 동생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가 황제에게 부탁한 것은 리안과 헤일라를 세느리움에 초대하는 것, 그리고 세느리움에서 리안을 불러들이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그녀는 그렇게만 하면 황제가 원하는 대로 리안과 헤일라의 관계가 요원해질 것이라 말했다.
리안이 전장에 나간 틈을 타 헤일라를 찾아간 것도, 세느리움에 오라 약속을 받아 낸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일어날 것이라 말했던 레테는 그날 죽어 버렸다. 헤일라가 리안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괴로움에 몸부림치고야 있지만, 이것이 어떻게 영원한 이별이란 말인가.
페이네리아는 낙담했고 그래서 헤일라에게 꽃을 보냈다. 거짓과 기만의 꽃말을 가진 노란 꽃을. 그럼에도 변하는 것은 없었고, 결국 둘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혼인을 인정받기 위해 황궁에까지 당도했다.
미래를 읽는 자도 실패했다. 그것에 발을 걸치고 있던 페이네리아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은 지고의 황제가 패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걸 인정하지 못해 괴로운 것이다. 아직도 둘을 떼어 놓는 게 가능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지난한 일에 매달리는 것이다.
“이제는 놓으셔야 합니다.”
누가 봐도 무용한 일이었다. 영리하지 못한 처사다. 그러니 벗어나라는 말이었다. 현재와 미래를 옭아매는 과거에서. 타델리아와 타센에게서.
페이네리아는 잠깐 동안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채로 제 시종을 보았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 볼까 해.”
저번에는 조금, 몸을 사렸던 것 같아서. 늙은 시종이 아연해져 말을 더듬었다. 설마, 하고 무언가를 짚어 보는 표정이었다.
황제는 제 부모와 다름없이 저를 돌봐 주었던 루나이드를 향해 약간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페이네리아의 눈동자가 헤일라에게 닿았다. 그녀는 리안에게 딱 붙어 이리저리 연회장 안을 흘겼다. 그런 헤일라의 귓불에 탐스러운 루비 귀걸이가 대롱대롱, 달려 있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폐하.”
그리고 때마침, 황제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웃고 있는 남자는 황제의 동업자인 베르디안이었다.
“……리안에게는,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해. 축배는 함께 들어야지.”
페이네리아가 루나이드에게 명령했다. 시간을 끌라는 의미였다. 그는 베르디안 쪽을 흘금 보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주름진 손안에 땀이 차오를 만큼 불안감이 일었다.
축배를 들기 전후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다. 반드시. 그리고 결코 페이네리아에게 좋은 일은 아니리라.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루나이드는 페이네리아를 본 세월이 길었다. 그러나 페이네리아는 그녀이기 이전에 황제였다. 루나이드가 걱정이 된다 하여 훈수를 둘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황제를 어릴 적부터 보필해 왔던 시종이라 한들, 황궁의 종이 인형 신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루나이드는 천천히 허리를 펴고 베르디안에게도 예를 차린 뒤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리안에게 황제의 명을 전달해야 했다. 그것이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중앙 홀의 구석 자리에 있던 리안은 헤일라를 애지중지 돌보고 있었다. 그는 동그란 마카롱을 헤일라의 입에 넣어 준 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주었다. 순간 루나이드의 눈에 헤일라와 타델리아가 겹쳐 보였다. 외피의 무엇 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 여인들인데도.
‘난 떠날 거야.’
그는 약간 아득해져서 잠시 발을 멈추었다. 타델리아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삶은 내 거야.’
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루나이드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루나이드와 리안의 시선이 마주쳤다.
‘둘 다 지긋지긋해. 공작이나 언니나.’
모두를 끔찍하게 여겼던 도도한 공주. 그럼에도 모두의 사랑을 받은 공주. 리안의 어머니는 그런 여자였다.
아들은 그리 자라지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멀쩡한 여인을 제 어미처럼 만들어 끔찍하다 해야 하나. 루나이드는 씁쓸함을 느끼며 리안에게 다가갔다.
“……폐하께서 축배 이후에 이동하시라 명하셨습니다.”
가볍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리안 또한 숨 쉬듯 가볍게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축배를 드는 건 연회의 가장 주요한 행사였다. 그는 대충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헤일라에게 속삭였다. 얼핏 들으니 조금만 더 참아 달라는 이야기였다.
사근사근. 속닥속닥.
마음에 드는 이에게 과한 애정을 쏟아붓는 점은 제 어미를 닮았어.
루나이드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가 리안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는 순간, 황제의 시종이 중앙 홀에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했다.
페이네리아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퍼졌다가 모였다. 황제는 느릿하게 입술을 벌렸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모두, 탄신 연회에 걸음해 주어 고맙네.”
늙은 시종은 침음을 삼켰다.
“자, 모두 잔을 준비하고.”
단상 위에 서 있던 페이네리아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이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입술만큼 붉은 와인이 잔 안에서 출렁댔다. 귀족들도 하나둘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시종들이 그들의 잔에 붉은 와인을 채워 줬다.
모두의 얼굴에 충만한 안정감이 들어차 있고, 무르익은 분위기는 화려한 크리스털 장식들과 어우러졌다. 황제는 그것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씩, 웃었다.
“제국의 광영을 위하여.”
위하여.
모두가 황제의 마지막 말을 따라 하며 입에 술을 머금었다. 리안도, 헤일라도 작게 한 모금씩 술을 마셨다. 꼴깍. 헤일라의 목울대가 가볍게 울렸다. 리안은 그것까지도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꺄아아악!”
하객들이 잔을 올려 든 손을 내렸을 때 즈음, 누군가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사람들의 시선은 황제가 서 있던 위쪽으로 쏠렸다.
페이네리아가 즐겨 입던 붉은 드레스 위로, 새빨간 선혈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약간 그을린 손등 위, 옅게 화장을 한 황제의 얼굴에도 예외 없이 피가 튀었다. 자신의 피를 확인한 황제의 동공이 일순 확장되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커헉…….”
어깨에 칼이 박혀도 눈썹 한 올 휘어지지 않는다는 황제의 표정이 고통에 헝클어져 갔다. 그녀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 모습을 본 시종들이 다급히 의원을 부르는 소리가 연회장에 퍼졌다. 루나이드가 황급히 황제에게로 달려갔다.
그사이 페이네리아는 몇 번이나 피를 토했다. 황제의 몸이 뒤쪽으로 천천히 무너졌다.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셨…….”
차마 말을 마치지 못한 귀족이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귀족들이 웅성대며 제 잔을 한 번씩 확인하고 불안한 얼굴로 황제가 쓰러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쓰러진 황제의 몸이 철저히 가려진 채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시종들의 틈 사이로 살짝 보인 황제의 손에 선연한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뒤를 따르는 기사들과 황태자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