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70화 (70/97)

70화.

여하튼 중요한 건, 헤일라가 리안에게서 벗어날 계획을 세웠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정말로 미쳐 버릴 것이라 생각했다.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헤일라는 제정신을 유지하되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살았다. 현저하게 떨어진 기억력을 끌어모았다. 흐려지는 이성을 붙들려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습관적으로 긁어 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백치처럼 행동해 모두를 안심시켰다.

다행히 흐려졌던 이지는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녀는 어떤 방법으로 탈출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험 삼아’ 도망치는 척을 해 봤다. 리안이 어떻게 나올지, 저택의 호위는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부른 배를 안고 발코니 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헤일라는 그날 우연히, 가장 완벽한 도주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발코니로 탈출하는 데에 실패한 직후, 헤일라는 질질 끌려와 침대에 내던져졌다. 왜 도망쳤냐고 묻는 리안에게 뭐라고 했더라.

‘네가 싫어. 넌 괴물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리안의 몸이 덜컥, 멈췄다. 갑자기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모든 행동이 멈추었고, 언뜻 본 눈은 초점이 흐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리안이 몸 위를 덮치고 목을 틀어쥐었다. 짐승처럼 커다란 남자가 그녀의 위에 올라타는데, 두려움보다는 압도된다는 감각에 지배되었다.

그러나 리안은 곧바로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냈다.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이었다. 그는 숨이 막히는지 가슴을 퍽퍽 치다가 갑자기 침대를 엉금엉금 기어 내려갔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물건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리안의 손에서 장인이 세공한 뭉툭한 조각들과 아름다운 가구들, 티 테이블과 의자, 모서리 장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계속 부수고, 망가트렸다. 자신의 손이 피로 흠뻑 물들 때까지 계속.

헤일라는 그때, 리안의 손가락뼈가 모두 으스러졌으리라 예상했다. 그의 자해는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며 파괴적이었다.

‘아, 리안, 리안, 그러지, 그러지 마…….’

무슨 용기였는지, 그녀는 바닥을 기어 리안의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이대로 두면 그가 죽을 것 같았고, 그가 누군가를 죽이고 말 것 같아서 눈물을 질질 흘렸더랬다. 그때의 헤일라는 차마 리안의 눈을 보지 못하고 신발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질 즈음, 헤일라는 천천히 목을 움직였다.

아, 드디어 리안의 눈을 본 것이다.

그의 두 눈은 헤일라의 왼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깊은 갈망이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리안의 광증이 도졌음을 깨달았다. 온몸이 얼어 눈도 깜빡할 수 없었다.

아래를 멍하니 응시하던 리안이 몸을 천천히 말아 굽히고 그녀의 턱을 쥐었다. 그리고 불쑥 혀를 내밀었다. 붉은 살덩이가 닿은 곳은…… 헤일라의 왼눈이었다. 축축한 혀가 눈꺼풀을 밀어 올리듯 핥고, 빨다가 그 안에 있는 망막을 갈망하듯 더듬댔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당장이라도 눈알이 파일지도 모른다는 타당한 두려움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리, 안, 흑…… 흣…….’

헤일라는 필사적으로 그의 손에 매달려 이름을 불렀다.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꽤 효과가 있었다. 곧이어 리안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고, 그의 손이 떨어졌다.

약간의 손자국이 남아 있는 목. 축축하게 젖어 있는 얼굴의 반절. 그리고 얼굴에 튄 남자의 피, 엉망이 된 방 안…….

그걸 천천히 훑던 리안의 표정이 어땠더라.

‘누가 이랬어?’

그는 배에 칼이 찔린 사람처럼 덜덜 떨면서 물었다. 헤일라가 더 다친 곳이 없는지 몸을 더듬으면서도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

‘누가, 누가…….’

그리고는 제 손바닥을 펴 멍하니 바라봤다.

‘아, 아…….’

펜촉처럼 날카로운 그의 눈매 끝이 둥글게 우그러졌다.

‘아…….’

리안은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 누가 보면 헤일라가 살인마라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삼 일간 여자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흘째가 되던 날 밤에야, 그는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그녀가 있는 침실로 숨어들었다. 왼손이 꿰뚫린 채였다. 붕대도 감지 않은 손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견딜 수가 없어서.’

그는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처럼 자는 척을 하고 있는 헤일라의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너르게 펼쳐진 헤일라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중얼댔다.

‘손을, 자르려고 했는데…… 그럼 너를 안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을 것 같아서 못했어. 그건 죽는 것보다 무서워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잘못했어. 나 미워하지 마…….’

두서없는 말들이 흩어졌다. 헤일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생각했다. 역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를 미치게 만든 건 광증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광증이 그를 덮칠 때 리안은 헤일라의 왼눈에 기형적으로 집착한다.

깨달은 순간의 짜릿함을 리안이 이해할 수 있을까?

언니의 말이 맞았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날 언니가 알려 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넌 그 저주가 기껏해야 인간 눈알 파는 정도라고 생각할 거야. 근데 사실 그게 다가 아냐. 그 새끼의 저주는 네 왼눈을 파내야 끝나. 사실 저주는, 자신이 죽인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이 같은 상처를 가지게 되면 끝이 나거든.’

놀랍게도 신전에서 사람을 죽이면 얻게 된다는 저주는 영원성을 띠는 게 아니었다. 신전의 기득권자들이 신성성을 지키기 위해 비밀로 묻어 두었을 뿐, 저주는 충분히 유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주가 풀리는 순간부터 나흘간, 저주가 풀린 몸은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지게 돼.’

시간이 지나고 언니의 말을 더듬어 보았을 때에도, 레테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저주에 관해 이야기를 해 주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눈알을 내어 주어야 리안의 광증을 풀 수 있다니. 비극처럼 느껴져 괴로움에 허우적댔으니까. 하지만 그 뒤는? 저주가 풀린 이에게 하루 간의 공백이 생긴다는 사실은 왜 이야기해 준 것일까.

헤일라는 리안이 제 왼눈을 짓누르던 순간에야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기회였다. 깨달은 순간부터 두려움 따위는 큰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기회를 얻으려면 두려움은 감수해야 해.”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언니의 환영과 눈을 맞추며 섧게 웃었다. 헤일라는 언젠가 언니가 핀잔주듯 해 주었던 충고를 언니의 환영에게 되돌려 주었다.

“세상에 그냥 얻을 수 있는 건 없으니까.”

리안을 자극해 왼눈이 뽑히는 날, 헤일라는 그가 없는 하루를 얻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두려움 때문에 놓칠 수는 없다.

“그래.”

레테가 간만에 유쾌하게 웃으며 헤일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시각, 헤일라가 아랫것들에게 심으라 명한, 초록 꽃잎의 꽃이 바람에 나붓댔다. 꽃의 이름은 루아두, 꽃잎을 으깨 문지르면 문지른 부위를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는 약초였다.

헤일라의 무기가 하나둘씩 저택에 산적해 가고 있었다.

사실을 아는 건 미쳐 버린 공작부인, 헤일라뿐이었다.

* * *

황제의 탄신 연회는 화려했다. 페이네리아는 섬세하게 세공된 유리 조각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샹들리에 아래를 흘긋 보았다. 썩 빼입은 인사들이 짝을 지어 손을 맞잡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 발코니로 통하는 창문에 시선이 멈추었다.

그곳에는 헤일라와 리안이 서 있었다. 헤일라는 리안의 손을 잡은 채 발코니에서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번잡함을 견디지 못해 바깥바람을 쐬고 온 듯싶었다.

어지간히 싸고도는군.

페이네리아는 속으로 이죽댔다. 그녀는 오늘 심기가 썩 좋지 않았다. 사실은 연회장에 손을 잡고 들어오는 헤일라와 리안을 보는 순간부터 기분이 나빴다.

금발의 계집은 제 머리 색과 썩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높은 네크라인으로 목과 가슴을 완벽하게 가린 슈미즈와 몸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벨벳 드레스는 고상하면서도 차분한 아름다움을 강조한 모양새였다.

황금색으로 수놓아져 있는 소매의 복잡한 문양과 넉넉히 부풀려져 있는 치맛단이 맵시 있게 어우러져 여자를 더더욱 귀족처럼 보이게 했다. 자신이 선물한 과하다 싶은 화려한 귀걸이까지도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외모는 얄미울 정도였다.

페이네리아가 그들에게 시선을 주는 동안, 오랫동안 보좌해 왔던 시종 루나이드가 고개를 조아리며 다가왔다. 주름진 이마와 굴곡 있는 매부리코, 잘 쓸어 넘긴 백발의 노인은 절제된 동작으로 황제에게 귓속말했다.

“폐하, 공작이 서약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먼저 가 있기를 청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페이네리아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판드로니아에?”

판드로니아는 황궁에 있는 가장 아담한 성이었다. 페이네리아와 타델리아가 유배되다시피 어릴 적을 보낸 궁이기도 했다. 리안은 그곳에서 혼인 서약식을 진행하게 해 달라 청했었다. 분명 가장 규모가 작은 성을 골라 사람을 적게 들일 속셈이었겠지만, 페이네리아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타델리아와의 추억이 담긴 장소였기 때문이다.

“예. 부인될 여인의 몸 상태가 염려된다 합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흔흔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싹 날아갔다. 그녀는 이죽대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황제가 주최한 연회 중간에 자리를 비우는 것은 무례였다.

그녀는 화를 삭이면서 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황제 쪽으로는 시선도 내비치지 않은 채로 헤일라를 쓰다듬고 있었다. 입술을 쉬지 않고 움직이며 그녀에게 무어라 재잘대고 있었다. 다른 이와 있으면 그렇게 과묵한 놈이.

“그렇게 하라 해.”

페이네리아는 어딘가 지친 얼굴로 명령했다. 그러나 루나이드는 움직이지 않은 채로 고개만 살짝 숙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