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69화 (69/97)

69화.

그때 미아르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러나 목소리는 푹 죽인 채 소곤댔다.

“쉿, 헤일라 님께는 저와 둘만의 비밀이라고 해 뒀거든요. 리안 님이 아시는 건 비밀이에요. 후작님도 비밀로 해 주셔요.”

“아, 그러니까 또 그 여자 하나 바보 만들고 있다는 말이네.”

베르디안은 이제 알았다는 듯 피식댔다. 결국은 또 레테의 동생이 멍청하게 속는 중이었던 거다. 그 여자는 발전이라는 게 없나.

“뭘 부탁했는데?”

“그게 말이죠, 수면…….”

“그만.”

리안이 냉정하게 일갈했다. 비밀을 숨기고자 하기보다는 귀찮은 대화를 중단하는 듯한 태도였다. 미아르는 조가비처럼 입을 딱 다물고 백치처럼 고개만 까닥댔다. 돈줄에게는 절대복종. 그녀의 가치관이 아주 투명하게 비쳤다.

그러나 베르디안은 이미 대충 상황을 눈치챘다. 아마 헤일라라는 반 미쳐 있는 여자가 미아르에게 수면제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네 여자는 너 몰래 받아먹는 거라 생각하는 거지? 그렇게 속이면 좋아?”

“헤일라가 마음 편한 게 중요하니까.”

헤일라는 미아르를 철석같이 믿고 리안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고 했지만 리안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황. 뻔하고 뻔했다. 베르디안은 레테의 동생에게 미약한 실망감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로, 재미가 없다.

레테와는 다르게.

보람이 없지 않나. 지지부진한 쇼를 몇 년간 이어 가는 이 행위가, 의미가 없다. 자신이 어떻게 욕구를 내리누르면서 일을 진행하는지 누구도 모를 것이다. 레테의 죽음을 덮고, 그녀가 죽은 뒤에 난잡한 생활을 하며 감정을 감추고. 모두를 속이면서…….

이렇게 노력하는데. 나는 이토록 괴로움을 누르고 레테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참고 참는데 동생이라는 년은…….

감정이 범람하려고 했다. 아주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누군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흔들림이었다.

그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럼 나는 이만 가지.”

베르디안이 능숙하게 감정을 갈무리하고 일어났다. 다행히 그는 맹수처럼 포악하지만 몸을 숨길 줄 아는 기민함을 가졌다.

“저도, 저도 헤일라 님께 가 볼게요. 그래도 되죠, 리안 님?”

리안이 가볍게 눈짓했다. 허하는 동작이었다. 미아르는 몸을 살랑살랑 흔들며 헤일라의 방으로 향했다.

요리하기 좋은 가련한 여주인공을 보러 가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 * *

“헤일라 님!”

시종이 문을 열어 주자마자, 미아르가 방 안으로 뛰어들며 헤일라를 불렀다. 동굴처럼 부풀어 있던 이불이 잠시 위로 튀어 올랐다. 미아르는 방을 지키고 있던 하녀 둘에게 눈짓했다. 나가라는 의미였다. 하녀들은 군말 없이 자리를 떴다. 미아르는 헤일라를 만날 때 이렇게 주위를 물렸다.

모두 리안의 허락 덕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아마 헤일라는 그조차 모르고 있겠지만.

“헤일라 님, 저예요. 미아르 에르단도. 수면제! 수면제요!”

미아르는 발랄한 목소리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천천히 헤일라에게 다가갔다. 품 안에 있던 약병을 천천히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침상 위의 이불이 서서히 내려갔다.

“……약?”

“네에, 약이 왔답니다.”

헤일라가 천천히 일어나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볼이 발그레 한 게 꼭 복숭아 같았다.

“자는 약…….”

“자는 약 맞아요. 이 약을 물이랑 꼴깍 마시면!”

“잠이 와…….”

미아르는 그새 헤일라의 코앞에 와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둘은 마주 보고 배시시 웃었다. 헤일라는 여느 때와 달리 편안한 듯 얼굴 근육을 부드러이 풀었다.

“자고, 자고 싶어요.”

“네, 그래서 제가 왔어요.”

헤일라는 서서히 미쳐 가면서 동시에 지독한 불면증을 앓았다. 한동안 괜찮아지던 것이 근래 들어 부쩍 심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또, 리안이 주는 약은 발작적으로 피했다.

그는 해결책을 강구해야 했고, 그래서 미아르를 이용했다. 대가는 새로운 사업이었다. 돈에 미친 대신관은 이를 아주 반겼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헤일라에게 약을 건네고, 그녀와 비밀을 약속하면 되었다.

제정신이 아닌 여자는 미아르를 철석같이 믿고 의지했다. 불쌍해라.

대신관이 된 여자는 속으로 헤일라를 조금 동정했다. 그러나 티 내지 않는 매끄러움은 숨길 것 많은 신관들의 미덕이었다. 그녀는 최대한 다정함을 흉내 내어 헤일라에게 약병을 내밀었다.

“자아. 여기 있어요.”

비쩍 마른 열 개의 손가락이 약병을 그러쥐었다. 헤일라는 그걸 꼭 쥐고 제 가슴 안쪽에 병을 품었다. 그리고는 미아르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말, 하면 안 돼.”

“…….”

“말하지 마세요. 말하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여자치고 말이 꽤 반듯했다. 자애롭게 웃은 미아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누가 본다면 신실한 마음을 품고 봉사하는 신자라 생각했을 정도의 껍데기였다.

“예, 리안 님께는 비밀로 할 거예요. 정말로.”

순진하고 가엾은 여자는 고개를 까닥이고 침대 안으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미아르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럼 사흘 뒤에 또 뵈어요.”

그리고는 이불 위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은 이불은 보드라웠다.

“저 치들은 제가 나가고 정확히 오 분 뒤에 들어와요. 알죠?”

“응, 그 전에 먹어야 돼.”

“맞아요.”

헤일라는 미아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른 나가라는 눈총이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만 약을 먹었다. 약 먹는 행위를 굉장히 부끄럽고 비밀스러운 행위로 여기는 듯했다.

아무렴. 미친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까.

미아르는 속으로 혀를 차고 빙글 돌아 방을 나섰다. 어차피 발코니 문도 잠겨 있었고 방 안에는 흉기가 될 수 있을 만한 물건도 없었다. 가구의 모퉁이들마저 둥글게 깎여 있었으니 말 다 한 것이다. 오 분 정도는 리안 또한 헤일라 혼자만의 시간을 허했다. 그녀는 편안한 마음으로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 미아르가 나가자마자, 헤일라가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곧장 침실과 연결되어 있는, 아무도 없는 욕실로 향했다.

헤일라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모두가 나를 미친 여자라 여긴다.

나를 이 꼴로 만든 리안 휴리트까지도.

“멍청하긴.”

“멍청하긴.”

레테의 환영과 헤일라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물론 청자는 헤일라 하나였다.

헤일라는 욕실 가장자리의 타일을 들어 올렸다. 이전에 헤일라가 난동을 피웠을 때 발을 디뎌, 덜컹대는 걸 눈치챘던 타일이었다. 그때부터 헤일라는 이 구석을 눈여겨보았고 지금은…… 아주 은밀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들어 올린 타일 안쪽에 패인 홈에는 알약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모두 미아르가 헤일라에게 넘긴 수면제였다. 헤일라는 오늘 받은 수면제 한 알도 그 안에 욱여넣었다. 몰래 수면제를 주는 척하며 리안에게 낱낱이 오늘의 일을 고해바치고 있을 미아르가 그려졌다.

역겹다. 가증스러워.

헤일라는 침상으로 돌아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이제 푹 자면 된다. 사흘 내내 불면증에 시달리는 척을 하느라 잠을 자지 못해 아주 졸렸다. 그녀는 불면증 따윈 겪지 않는 건강한 몸이었으므로, 피로함에 지쳐 잠들기는 아주 쉬웠다.

그런데 그때, 레테의 환영이 헤일라의 곁에 다가왔다.

“너는 달라?”

속으로 미아르를 험담한 것에 관해 레테가 물어 왔다.

“가증스러운 건 너야.”

아니야.

“아니긴.”

“뭘 어쩌고 싶은 건데?”

신경 꺼.

어차피 언니도 아니잖아. 헤일라는 죽은 언니의 환영에게 일갈했다. 진심을 담아 대답하는 게 상당히 무용한 일임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저건 언니가 아니다. 내가 만든 환영일 뿐.

“지금이 좋은 거야? 아닌 척하면서 날 죽인 새끼랑 사는 걸 즐기는 거지? 널 닮은 그 아기랑 너랑 날 죽인 리안 휴리트랑 가족이 되어서 살려고.”

헤일라가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 누웠다.

“내가 모른 척하라고 했지.”

“애새끼가 굶어 죽든 말든 네 알 바 아니어야 하잖아.”

“그냥 목을 졸라 죽여 버렸어야지!”

헤일라는 언니의 환영이 세리아를 저주하는 소리를 익숙하게 흘려들었다. 아기를 본 날부터 매일같이 들리기 시작한 새로운 종류의 저주는 이제 자연스러웠다.

“멍청한 년.”

나도 알아.

“아기를 사랑해? 네가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르겠어.

헤일라는 자조적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아기를 사랑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으나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보면 심장이 내려앉았고 포근해지기도 했으며 염려되기도 했다.

확실한 건, 완벽하게 외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저가 손을 뻗지 않으면 아기는 주린 배도 채울 수가 없었다. 징그러울 정도로 자신에게 집착하는 리안 휴리트 때문에.

“그럼 뭐 어쩌겠다는 건데?”

레테가 빈정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헤일라는 이런 순간에는, 자신이 만든 환영이 퍽 어릴 적의 언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마는 것이다.

“벗어날 거야.”

“그 미친놈이 온갖 거 다 부수는 거 구경하려고? 아니면 자해하는 꼴을 또 보고 싶어진 거야?”

어리석은 치를 비난하는 투였다. 이전에 헤일라가 도망쳤다가 리안이 집안의 온갖 가구를 부수고, 종래에는 자해한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저주가 점점 진해지고 있어. 무섭지 않아?”

레테가 사뭇 다정히 물었다.

“그래.”

헤일라는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녀는 이제 두렵다 이야기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처음 리안의 광증을 마주했을 때는 괜찮아질 거라고, 두렵지 않다고 속으로 중얼대곤 했는데. 이제 그건 별로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일 년 전 황제에게 받은 꽃이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라가스타. 거짓과 기만을 상징하는 꽃은 언니가 리안의 손에 죽었음을 의미했다.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더라.

화가 났나? 아니면, 증오에 몸을 떨었던가.

그것도 아니면 자책하고 슬퍼했나?

헤일라는 가끔 기억을 더듬곤 했지만 명쾌하게 기억해 내지는 못했다. 그만큼 복잡하고 지저분한 감정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