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무릎을 꿇고 있는 헤일라의 볼에는 피가 튀어 있었다. 사과의 표면처럼 새붉은 피였다. 그게 자신의 피였다는 걸, 리안은 아주 나중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살려 줘…….’
리안은 아직도 그때의 헤일라를 기억하고 있었다. 살려 달라고 두 손을 싹싹 비비고 있었다.
‘왼눈을 핥으셨다 합니다.’
이후 유일한 목격자인 하녀가 파이라에게 증언했다.
처음에는 헤일라의 목을 살짝 틀어쥐었다. 그러나 금방 놓고는, 스스로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 대다가, 뭐라 중얼대며 방 안에 있는 온갖 집기들을 부쉈다. 자학하듯 제 손을 벽에 찧기도 했다.
가장 마지막에는,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기 직전에는 그녀를 끌어안아 왼 눈꺼풀을 핥고, 빨고, 눌렀다고.
마지막에 헤일라의 눈에 집착했다는 사실을 들고 나서야, 리안은 자신이 벌인 기행의 원흉을 알게 되었다. 이제껏 그가 다른 이들에게 보였던 광증과 유사했다. 차이가 있다면, 사람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무의식중에 헤일라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 자해를 선택한 것이리라.
‘……전장에서 돌아오신 지 서른 날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이상한 점은, 광증이 도질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리안이 최초로 헤일라 앞에서 광증을 드러낸 때는 전쟁에 나가 기형적인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킨 뒤였다.
그러나 리안은 애써 그것을 실수라 치부했다.
자신이 누구던가. 헤일라의 하나뿐인 연인이었고, 세상에서 그녀를 가장 사랑하는 남자였다. 실수였을 것이다. 사람이 가끔 돌아 버리면 보이는 폭력성일 뿐이리라. 그렇게 여기고 온갖 약초를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러나 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스러졌다.
몇 번의 끔찍한 경험 뒤에야, 리안은 인정했다. 헤일라를 향한 광증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왼눈을 점점 더 갈구하게 되어 간다. 이러다가는 언젠가 헤일라를 죽여 그녀의 왼눈을 앗아 갈지도 몰랐다.
그냥 다치게 하는 것과는 결이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만에 하나 헤일라가 죽게 된다면.
리안 휴리트의 세계도 그날로 끝이었다.
“절대 그런 일 없도록 할 거야. 너는 안전해. 절대 아프게 하지 않아.”
그는 스스로에게 주지시키듯 말했다. 말끝이 약간 떨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를 안아 주느라 리안이 보지 못한 헤일라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었다.
때마침, 문밖에서 하녀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아르 님과 베르디안 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익숙한 객들의 방문이었다.
* * *
귀족의 저택에서 가장 정갈하면서 호화로운 공간을 두고 응접실이라 이른다. 온갖 사치를 쏟아붓고도 한껏 단조로운 체를 하는 게 미덕이라 여겨지는 귀족 사회의 단면이었다.
휴리트 저택은 이런 관습이 아주 철저히 반영되어 있었다. 특히 리안의 조모가 일찍이 바다 너머 먼 땅의 가구에 눈독을 들여 응접실을 이국적으로 꾸며 둔 부분이 상당히 유명세를 탔었다.
칠기 판이 붙어 있는 서랍장과 자개가 박힌 모퉁이 장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것들이 화려한 샹들리에와 테이블, 그리고 타론의 유리 공예품과도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게 썩 놀라웠다.
미아르는 베르디안과 함께 리안의 맞은편에 앉아 응접실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감탄했다. 그러나 리안은 성의 없는 태도로 미아르의 감탄을 쳐 냈다. 묘하게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으나 미아르는 눈치채지 못했다. 헤일라에 관해 물은 건 그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부인께서는 주무시나 보죠?”
나붓하게 웃은 여인이 휴리트가의 오랜 전통이 흐르는 찻잔을 들어 힐긋 관찰했다. 오밀조밀 세공된 찻잔에 값을 매기느라 머릿속이 혼란해 보였다.
“그래.”
“아아, 그럼 잠에서 깨어나시는 건 언제쯤?”
미아르가 여전히 찻잔에 눈을 맞춘 채 물었다. 그러나 리안은 팔걸이에 팔을 괴고 말을 하지 않았다. 베르디안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방종한 신관에게 눈짓했다.
“그쯤 해. 찻잔 깨지겠어.”
“어머, 그냥 예뻐서…….”
“금액이 예뻐 보이는 거겠지.”
베르디안이 조롱하듯 낄낄대다가 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무기질적인 눈동자였다. 베르디안은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테이블 위에 올렸다.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느른하게 한숨을 쉬니 미아르가 입을 삐죽대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남자에게서 묘한 기류를 읽어 낸 탓이다.
“레테에 관한 수사가 종결되었다고.”
먼저 말문을 튼 건 리안이었다.
“네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걸로 마무리 지었죠.”
베르디안은 말없이 시가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연기를 빨아들인 남자는 검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천천히 눈알을 굴렸다. 감정을 알아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 치들이 믿던가?”
리안은 레테의 시신을 본 귀족들에 관해 물었다. 레테는 몸 곳곳에 상처를 달고 있었는데, 그걸 본 귀족들이 자살이라 납득하기는 어려웠을 테다. 미아르는 차를 홀짝댄 뒤 다리를 꼬았다.
“제 능력을 얕보시면 곤란한데요.”
“대신관 자리가 편하긴 편하군.”
“별말씀을.”
입가를 가리고 눈을 휘는 미아르는 겸손을 떠는 척하며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았다.
“쉽지는 않았답니다. 하지만 노력하면 해내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밤낮으로 열심히, 아주 열심히 뛰었죠.”
리안과 베르디안은 침묵했다. 미아르는 개의치 않고 혼자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말이에요.”
챙. 리안이 찻잔을 소리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에게서 묘한 불쾌감을 읽어 낸 미아르가 새삼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를 죽였다 의심받은 이들은 모두 제 덕을 본 셈이잖아요?”
미아르는 찻잔의 둥근 끝단을 중지로 은근히 쓸면서 리안과 베르디안을 훑어보았다.
“그래서 두 분이 저한테 부탁, 아니 거래를…… 제안하셨으면서. 아닌 척은.”
키득대는 웃음소리가 묘하게 경쾌했다. 그녀로서는 기분이 좋을 만도 했다.
레테가 죽고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열댓 살 먹은 소년 하나가 신관으로 임명되었다. 레테의 뒤를 잇는 신관이었다. 소년 또한 어마어마한 신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소년일 뿐이었고, 미아르를 맹목적으로 따랐기 때문에 대신관 자리는 미아르가 꿰차게 되었다.
레테의 죽음에 관한 수사가 지지부진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대신관이 된 미아르는 이전 대신관 후보였던 레테를 미워했다. 공작은 제 여자를 갉아먹는 레테를 증오했고, 시신의 왼눈은 파여 있었다. 베르디안은 레테에게 집착을 보였고, 정황상 그녀는 죽은 날 다른 남정네를 만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세 권력자가 모두 용의 선상에 올랐었기 때문에, 일은 빠르게 묻혔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리안과 베르디안 모두 사건을 자살로 몰기 위해 물심양면 미아르를 도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레테의 죽음은 자살로 종결되었다. 오늘 셋은 그 축배를 들기 위해 모인 것이나 진배없었다.
“음.”
베르디안이 목을 울리며 일어났다. 그는 어딘가 갑갑한 듯 발코니 쪽으로 걸어가 전면 창을 열었다. 여전히 파이프를 물고 있던 베르디안은 창밖을 향해 연기를 뿜었다. 권태로움이 덧씌워진 낯가죽의 근육이 약간 틀어졌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완벽하게 무표정으로 돌아온 남자가 일행이 있는 쪽으로 다시 몸을 돌려 다가왔다.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 입술만 은은히 올라가 있는 채였다.
“그럼 이제 슬슬 때가 된 건가?”
“흐응.”
미아르가 콧소리를 내며 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기압이었던 방금과는 다르게 기분이 약간 고양되어 보였다. 그 변화를 본 베르디안이 품 안을 뒤적거렸다.
“때마침 폐하의 탄신 연회라지.”
황제의 탄신 연회는 거의 모든 고위 귀족들이 참석하는 행사였다. 그리고 황제는, 순산한 뒤 헤일라와 리안의 혼인 서약을 황실의 연회에서 진행하라 명한 바 있었다. 이전에 세느리움에서 레테가 죽은 바람에 진행하지 못한 의식을 진행하라는 의미였다.
그것이 황제가 혼인을 승인하는 조건이었다. 누구보다 빛나게, 누구보다 떳떳하게 혼인하는 것. 황제는 리안이 아주 어릴 때부터 그것에 집착해 왔으므로, 리안도 이것만큼은 어쩔 도리 없이 따라야 했다.
현재 헤일라는 리안과 사실혼 관계에 있었으나 황제의 승인 없이 공식 석상에서 ‘공작 부인’으로 불릴 수는 없었다. 그는 헤일라를 정식 혼인으로 묶어두는 데 목을 매는 쪽이었으므로, 황제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폐하께서도 대충 눈치를 채셨는지 선물을 보내셨어.”
베르디안이 고급스러운 가죽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똑, 하는 소리를 내며 열린 케이스 안에는 붉은 보석 귀걸이가 길게 세공된 채로 달랑대고 있었다.
“헤일라는 귀 안 뚫었는데.”
“그래도 하게 해. 폐하의 선물이니 하지 않으면 또 골을 내실 거다.”
베르디안이 털썩 앉으며 제 목덜미를 주물렀다. 무언가 곤한 눈치였다. 황제의 닦달에 선물을 직접 전해 주러 걸음 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나는 이제 가 볼게. 전해 줄 것도 다 전해 줬으니.”
“저는 헤일라 님을 뵈러 가야겠어요!”
베르디안이 일어나자마자 미아르가 소리쳤다. 베르디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아르를 바라보았다. 꼭 끼긱대는 고철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 같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왜?”
일순 셋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베르디안은 한 번 더 왜, 하고 물었다.
“으응? 제가 헤일라 님을 뵙는 게 이상해요?”
그녀는 흥미가 인 듯 코를 찡긋댔다.
“네가 볼 이유가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
리안이 베르디안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미아르의 행동을 막으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헤일라 님이 제게만 특별히! 부탁하신 게 있거든요.”
그러나 미아르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리안의 입매가 굳었다. 그는 얄쌍한 눈썹을 살짝 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미아르.”
“네, 네에.”
베르디안은 미아르와 리안을 번갈아 본 뒤 무언가를 감지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