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65화 (65/97)

65화.

“정말 그래도 되겠나?”

적발의 황제는 도전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다른 이가 아닌 헤일라를 보고 있었다.

“……네, 네에.”

헤일라가 부스스한 머리칼이 흔들릴 정도로 고개를 까닥였다. 리안이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 제 여자가 다른 이에게 쩔쩔매는 걸 견디기 힘든 게 분명했다. 꼴이 어지간히 우스운지, 황제는 유쾌하게 웃으며 헤일라의 뺨 한쪽을 쓰다듬었다.

“자, 그럼 크게 말해 봐.”

“…….”

“뭐가 궁금하다고?”

방금 헤일라가 페이네리아에게 귓속말한 걸 다시 설명해 보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눈알만 빙글빙글 돌리다가 꿀꺽 침을 삼키고 리안 쪽을 봤다. 그는 빙긋 웃었다.

“그, 그날…….”

“조금 더 크게.”

“그날! 언니가 죽은 날, 폐하랑…… 폐하랑 리안이랑 같이, 같이 있던 게 맞는지…….”

모든 게 리안의 예측대로였다. 그녀는 황제에게 그날의 진실을 묻고 싶었던 거다. 너무 빤해서 놀랍지도 않았다.

헤일라는 가끔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걸 빼면 요즘도 금방 무엇이든 깜빡깜빡하고 리안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황제를 본 순간 레테가 떠올라 그날의 진실에 관해 묻는다. 보통 집념이 아니었다.

“아아.”

헤일라가 손을 모으고 제 손가락을 탁, 탁 뜯었다. 황제가 그 모습을 보여 쯧, 하고 혀를 찼다.“그렇게 급히 묻지 말라 했는데…….”

이전의 만남에서 헤일라에게 건넨 조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조급해도 여유로운 척. 헤일라는 반짝, 그녀의 조언이 떠올랐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말해 주지 않으면 어쩌지. 걱정하는 게 얼굴에 쓰여져 있었다.

“아니, 아니네. 조금씩 연습하면 될 일인데 내가 조급했어.”

“…….”

“못 말해 줄 것도 없는 일이야. 그런데 리안이 말을 안 해 준 겐가? 이렇게 바짝 얼어서는…….”

리안을 향한 눈동자가 흥미로 번들댔다. 남자는 침묵했고 헤일라는 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얼었다.

“함께 있었어.”

틱. 헤일라의 손톱이 부러졌다. 그녀는 멀건 얼굴로 황제를 바라봤다. 한 번 더 답을 해 주길 고대하는 얼굴. 그러나 황제는 더 이상의 설명을 붙이는 일 없이 그저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해야 할 말은 다 한 것 같군. 그만 가 보지.”

다음에 봐. 그녀는 헤일라의 귓가에 속살댄 뒤 구부렸던 몸을 바르게 폈다. 곧은 자세가 고귀한 귀족다웠다.

리안은 페이네리아가 나가자마자 헤일라에게 다가가 끌어안고 다독였다. 화를 내거나 다그치지 않고 꼭 안아 등허리를 쓸고 배를 뭉근히 만졌다.여체는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헤일라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입술도 달싹이지 않은 채 눈만 끔벅였다. 그녀는 황제의 말을 소화해 내기 버거워 보였다. 묵직한 정적이 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주룩. 헤일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동시에 약간 쉬어 갈라진 목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정말, 아냐?”

공허한 질문이다.

“진짜 네가 죽인 게 아냐?”

“아니야.”

“그럼 누구야?”

“나도 몰라. 하지만 곧 밝혀지겠지.”

리안은 애매하게 말하고는 헤일라를 유심히 훑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시선. 뱀처럼 집요한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피하지 않고 눈빛을 받아 내다가 그의 가슴팍에 머리통을 툭 기댔다.

“거짓말이지?”

“…….”

“넌 항상 거짓말을 했으니까. 또 거짓말이지?”

헤일라는 어느 순간부터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매달렸다. 하지만 리안은 알고 있었다.

“거짓말 아니야.”

이건 희망을 품은 얼굴이었다.

“못 믿어도 돼.”

“정말?”

“난 진짜 아니니까. 곧 다 괜찮아질 거야. 믿을 수 있게 될 거야.”

그녀는 더 할 말이 남은 듯 입을 뻐끔댔으나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정말로 약간, 믿고 싶어졌기 때문에.

기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도 했다.

미쳐 버리기 전에 그냥 믿어 버리자. 편해지자…… 잠깐 그렇게 생각도 했다.

긴장으로 피로감이 높게 쌓여 있었던 헤일라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리안은 만족에 젖어 그녀를 더 꽉 안았다. 부른 배가 뱃가죽에 닿아 오는 느낌이 좋았다.

그는 모든 게 다 잘될 것이라 속삭였다.

다음날, 페이네리아가 헤일라를 위한 것이라며 귀한 꽃을 보내왔다. 그 꽃다발은 헤일라의 품에 안겨졌다. 그것을 안은 여인은 꽃에 얼굴을 묻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황송해하는 것이리라. 좋아라하는 것이리라. 사용인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리안은 아마도 꽃의 이름을 잊었을 연인에게 친절히 그 이름을 되짚어 주었다.

라가스타였다.

* * *

“왜 보여 주신 겁니까.”

“뭘.”

파이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마음먹은 듯 이야기했다.

“황제가 보낸 꽃 말입니다.”

“아.”

리안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였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태도. 파이라는 그런 반응에 진절머리가 났다.

“다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황제의 옆에 붙어 다니는 시녀 둘 중 하나, 호위 기사 다섯 중 둘. 모두 리안의 사람들이었다. 몇 년간 은밀하게 매수하고 심어 둔 자들. 이전에 황제와 헤일라가 나누었던 대화를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전해 들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알고 있었다. 황제가 헤일라에게 보낸 꽃의 꽃말도, 그게 헤일라에게 미칠 영향도. 그러나 리안은 부러 막지 않았다. 연인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렸다.

부정하는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각이는 펜촉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숨길 이유가 있나.”

“하지만 헤일라 님께서 충격을…….”

“헤일라에게 중요한 건 현실을 아는 거야.”

어떤 현실을 말하는 거지? 당신이 제 언니를 죽인 현실? 파이라는 차마 내뱉지 못한 욕지거리를 속으로 읊조렸다.

“그래서 황제를 이용해 알려 주신 겁니까? 공작께서 레테 님을 죽인 사실을요.”

탁. 리안이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나?”

“……설마 아닙니까.”

“글쎄.”

누군가를 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재치라고는 생쥐의 눈곱만큼도 가지지 못한 남자니까. 그렇다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파이라의 머리가 지끈댔다.

“그럼 헤일라 님이 알아야 하는 현실은…….”

“질문이 많아.”

파이라가 사죄의 말을 올렸지만 리안은 괘념치 않는 듯했다.

“레테를 죽인 게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

“누가 죽였든 헤일라가 서 있을 자리는 리안 휴리트의 옆이라는 것. 그게 현실이지.”

리안이 자신을 속였다. 리안이 나쁜 짓을 했다. 리안이 언니를 죽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 없다.

그는 이 사실을 헤일라에게 확실히 심어 주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영원히 체념하기를 기다렸다. 몰아붙이고 몰아붙여, 마침내 다시는 리안을 버릴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릴 작정이었다.

“잔인하십니다.”

“그런가?”

가벼운 대답이었다. 리안은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가볍게 웃고 말았다.

“지금 헤일라는 뭘 하고 있지?”

“식사 후 산책을 하고 계실 시간입니다.”

매끄럽게 굴곡진 나무 의자의 다리가 바닥에 마찰음을 내며 밀려났다. 리안은 창문 쪽으로 다가가 작은 헤일라가 돌아다니고 있을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지독할 정도로 가득 심어진 장미 사이로 하얀 여자가 보였다. 황금빛 눈동자가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마도, 분명히 텅 비어 있으리라.

그는 약간 슬퍼졌다. 이전처럼 생기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 지 꽤 되었다. 영영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약간 저리기까지 했다.

“결국은 나를 이해해 줄 거야.”

헤일라는 나를 사랑하니까. 리안은 그렇게 중얼댔다. 파이라가 잠시 입을 달싹였다가 꾹 닫았다.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리안이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버리겠다’라고 한 이후로 헤일라는 단 한 번도 자해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아기를 가진 이후부터 식사를 거르지도 않았다. 힘들어하면서도 결국에는 자신보다 그들을 끔찍이 아끼는 게 눈에 보였다.

불쌍하고 미련한 여자. 차라리 사랑이라는 걸 영영 몰랐다면 편하게 도망이라도 칠 수 있었을 텐데 아이 때문에 그조차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제 잔인한 주인은 그걸 너무나 잘 알았고 교묘하게 이용한다.아마 앞으로의 모든 일들 또한 리안 휴리트의 뜻대로 이루어지리라. 리안 휴리트는 현실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 쪽으로 쓰러지는 여자를 기쁘게 받아 평생 품을 것이다.

파이라는 자신의 숨이 턱턱 막히는 착각에 잠시 목 근처를 매만졌다. 주인과 이야기하면 가끔 이렇게 속이 뒤집혔다. 너무 끈적하고, 텁텁하고, 지네가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기어 올라오는 압박감이 몸을 지배한다.

“헤일라에게 가지.”

그러나 오늘도 파이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리안을 보필하고, 불쌍한 여자 하나를 제물 삼에 제 여자의 약을 구하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리될 것이다. 그가 냉정하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리안의 뒤를 따랐다. 헤일라 이외에는 무엇도 관심 없는 남자는 뛰듯이 걸어 정원까지 도착했다.

아, 꽃에 파묻혀 있는 여자가 주인을 발견했다. 그의 부름에 여자는 인형처럼 가만히 기다리고 섰다. 오늘따라 그것이 이다지도 슬퍼 뵈는 까닭이 무엇일까?

파이라는 가늠할 수 없는 음울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동정하지 말자. 차마 바꿀 수 없는 것에 손을 뻗지 말자. 연인만을, 우리만을 생각하자…… 스스로를 다독였다.

코끝이 아릴 정도로 아찔한 장미 향이 그들 모두를 감쌌다. 리안 이외에 아무도 반기지 않는 시간이 부드러이 흘렀다. 아마도 끝없이 반복될 순간 중 한 조각에 불과하리라. 파이라는 가볍게 체념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실 거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의 모든 이들이 그러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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