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64화 (64/97)

64화.

“불손하구나. 감히…….”

황제의 옆에 있던 시녀가 벌게진 얼굴로 뇌까렸다. 지고하신 황제 폐하를 이리 문전박대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황제 폐하가 납시셨다는 사실은 이미 휴리트 공작에게 전해졌을 터였다. 황제의 마차를 보고 부리나케 본채로 달려가던 하녀를 본 바가 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이렇게 질펀한 정사만 이어 가고 있다는 건…….

불충이다.

시녀가 다시금 언성을 높여 문 너머까지 닿게 하려 입을 벌렸다. 그때 황제가 한 손을 들어 아랫것을 제지했다.

“그만. 되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내 조카님께서 저승문을 열고 돌아온 연인을 귀여워하는 중이라고 하잖니. 방해하면 쓰나.”

명백한 비아냥이었으나 모두 떫은 표정을 감출 뿐이었다. 페이네리아가 한 수 접어 주는 모양새를 보이는 건 드문 일이다. 호전적인 성향이 강한 그녀를 모두가 알았기에 현재의 상황에 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황제는 문 쪽을 흘금 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오랜만입니다, 폐하.”

그때, 누군가 굳게 닫혀 있던 나무문을 열었다. 누런빛과 달콤한, 동시에 쌉싸름한 향이 흘러나왔다. 여러 환초가 섞여 타면서 만들어 내는 향이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태연자약하게 내뱉는 인간은 리안이었다. 여러 줄로 늘어진 귀걸이가 황제의 고갯짓에 따라 찰랑였다. 샹들리에의 빛이 금실 같은 귀걸이 줄기에 반사되었다. 황제의 얼굴 또한 화려하게 펴졌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그녀는 충신이 아닌 가족에게 인사를 건네듯 편안하고 밝아 보였다. 페이네리아는 격의 없이 리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신전에서 이후로는 한 번도 낯을 비추지 않았어. 서운하구나.”

“죄송합니다.”

“말은 잘해.”

밉지 않게 타박하는 붉은 입술이 은은히 올라갔다. 단번에 기분이 좋아진 게 틀림없었다. 호전적인 만큼 단순한 여인이다. 주변의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그러니까 동생을 되찾겠답시고 황제가 되지 않았겠는가. 걸출한 만큼 단순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리안은 그런 황제를 꽤 잘 다루었다.

“모시겠습니다.”

집사가 길을 터 주며 고개를 조아렸다. 복도에 서서 이야기를 계속 나누는 건 귀족의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니 아랫것이 눈치껏 적당한 장소로 안내해야 했다.

“아니.”

그런데 황제는 집사가 응접실로 안내하려는 것을 막아섰다.

“나는 조카님 방에서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침실은 가장 내밀한 공간이었다. 보통은 응접실에서 사람을 맞이하는 게 예의였지만 지극히 가까운 이들과는 침실의 티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일반적이었다. 귀족들의 방이 넓고 티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러나 안에는 리안의 여인이 있다. 황제는 그를 시험하듯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안 되겠나? 하고 물었다.

“타론의 그 누가 폐하의 발걸음을 돌리게 하겠습니까? 신하 된 도리로 그럴 수는 없지요.”

리안이 공손하게 손짓했다. 다름 아닌 자신이 나온 문 쪽으로.

“제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한없이 순종적인 듯하나 그 호전성을 꿰뚫어 보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저 안은 방금까지 그가 헤일라라는 여자와 뒹굴던 공간이다. 모두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황제는…….

“역시 내 마음을 아는 건 조카님뿐이야.”

리안이 눈짓하자 옆에서 힐금대던 하녀가 재빨리 문을 밀어 열었다. 황제와 리안은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너른 침대와 굴곡진 티 테이블, 누군가를 위해 꽉꽉 채워 둔 책장, 거대하고 정교하지만 가냘픈 여자는 어찌 다룰 수 없을 뭉툭한 장식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은실이 수놓아져 있는 태피스트리의 대조차 단단하게 엮은 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얼핏 들여다보면 연인을 위해 잘 조형된 방 같지만, 실상, 리안 휴리트만을 위한 인형의 집이다.

황제는 인형이 죽은 듯 널브러져 있을 침상의 중앙에 눈길을 던졌다. 작은 발 하나가 이불 밖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사용인들이 문을 열어 두어 진득한 정사의 향은 옅어져 있었지만, 꾸물대며 잠들어 있는 저 여자 그 자체가 힘겨운 잠자리의 증거물이었다.

리안이 다른 이들에게 제 여자임을 그토록 증명해 내고 싶어 하는 여인이다. 고약하게도, 그는 황제에게까지 여인을 내보이고 있었다. 약간 부푼 배가 이불의 실루엣으로 비쳤다.

기시감이 황제를 눌렀다. 과거로 그녀를 끌고 간다.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일까.

“폐하.”

리안이 부드럽게 황제의 시야를 막았다.

“앉으시지요.”

“내 눈이 이 계집 발에 닿는 것도 싫은가 보구나.”

약간 빈정거리는 말투에도 리안은 침착하게 황제를 에스코트했다.

“그랬다면 이 방으로 모시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래, 그래.”

황제는 무익한 타박을 멈추고 티 테이블 앞에 앉았다. 곧이어 하녀들이 아름다운 잔에 붉은빛의 홍차와 다과를 준비해 늘어놓았다.

기실 늘어놓은 다과에 황제가 좋아하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견과를 잔뜩 넣은 파이와 초콜릿 덩어리를 녹여 섞지 않고 박아 넣은 쿠키 따위는 다른 이의 취향이었다. 타델리아. 리안의 어머니. 황제는 다과들을 보고 눈에 띄게 기뻐했다.

“어미와 입맛이 똑 닮았어.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게지.”

“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아랫것을 둔 덕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아름다운 여자의 낯빛에 아쉬움이 섞여 들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곤 뒤에 있던 시녀에게 눈짓했다. 시녀는 두 손으로 트레이를 전달받아 공손하게 내밀었다. 황제가 든 것은 황실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었다.페이네리아는 친히 리안에게 내어 주었으나 그는 받아 들지 않고 흘금 내려다보기만 하였다.

“이걸 전해 주러 오셨습니까.”

“내 친히 움직이지 않고서야 조카님의 무거운 발을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

“그럴 리가요.”

사실이었으나 그는 가당찮다는 듯 짐짓 놀라는 척을 했다. 그러나 조카 사랑이 남다른 페이네리아는 그저 흐뭇하게 여기고 넘겼다.

“황태자의 약혼식이야. 조카님이 참석해 주셔야지. 그리고…….”

황제가 나른한 눈으로 침상 쪽을 훑었다.

“이번에는 저 아이와 함께 와.”

리안의 손가락이 책상을 톡, 톡 쳤다. 황제의 의중을 가늠하는 것이리라.

“정식으로 혼인을 하려는 게 아니거든 오지 않아도 좋고.”

귀족들의 혼인 서약은 황궁에서만 가능했다. 황제의 직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 귀족 간의 결합. 그러니 헤일라를 정식 부인으로 맞기 위해서는 황제가 필요하다. 언젠가 말을 꺼낼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이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아직 아이도 낳지 않았는데.

리안은 평민인 헤일라를 격렬히 반대했던 과거의 페이네리아를 떠올리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

“다만 아무 조건도 내걸지 않으시기에.”

황제가 한껏 과장하듯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이런, 조카님이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나는 네게 목숨을 내어줘도 아까워할 이가 아니야.”

“예, 그렇지요.”

그렇지 않다. 리안은 황제가 목숨을 아끼지 않는 상대가 제 어미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타델리아의 대용품일 뿐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이용하기에 좋으면 그만이다.

“감사합니다. 다만 혼인 서약은 해산한 뒤에나 맺으려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진행하고 싶지만…… 보시다시피 몸이 약해서.”

배가 부른 임산부를 매일 밤 괴롭히는 남자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꽤 그럴듯한 변명이라, 황제는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정말로 타델리아의 아들을 아꼈으므로.

“그렇게 하지. 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역시나 맨입으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리안은 머릿속으로 미리 준비해 둔 뇌물들을 나열했다. 비옥한 영지 몇 개와 광산들. 그러나 황제가 내건 조건은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조카님 신부가 될 여인이랑 다과를 나눠 보고 싶어.”

“그건 어렵습니다. 다른 조건을 거시지요.”

문장을 끝맺고 호흡 한 번 하기도 전에 리안이 거절했다. 조카의 칼 같은 태도에, 페이네리아는 몹시 공교롭다는 듯 말했다.

“다른 조건은 없어.”

“폐하.”

“내가 아들처럼 아끼는 조카님의 아내가 될 여자지. 둘이서 이야기 한 번 못 나누는 게 말이 안 되잖나.”

둘 사이의 기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주변의 시종들이 바짝 긴장해 고개 숙인 채 눈알만 굴렸다.

“좋아요.”

네 개의 눈동자가 휙 돌아가 침상에 꽂혔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 할래요.”

부스스 일어나 이불로 몸을 가린 여자가 꽤나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폐하랑…… 이야기하고 싶어요.”

현실과 꿈속을 아직도 구분하지 못하는지, 헤일라는 계속 눈을 끔벅댔다. 그러면서도 똑똑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

“폐하랑 이야기할래요. 둘이서,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리안의 얼굴에서 표정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걸 본 헤일라가 약간 어깨를 움츠렸으나 중얼대기는 멈추지 않았다.

“헤일…….”

“그래, 그리하지.”

“안 됩니다.”

“당사자도 괜찮다 하는데 무얼 걱정하나? 과보호도 적당히 해.”

황제가 리안의 반발을 일축하며 일어났다. 그녀는 느릿하게 걸어 헤일라에게 다가갔다. 침상에 걸터앉자, 헤일라가 천천히 기어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리곤 귓속말로 어떤 이야기를 한다.

“푸흡.”

말을 들은 황제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리안은 티 테이블에 앉아 그걸 지켜봤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이 되레 남자의 분노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렇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지금, 제가 있는 자리에서 나누시지요.”

페이네리아가 혀를 찼다. 리안이 고집을 꺾지 않을 심산임을 눈치챈 것이다. 그녀는 근육이 잘 붙은 다리를 꼬아 앉고 두 팔을 침상에 내려놓았다. 헤일라는 황제가 가 버릴까 봐 그녀의 팔을 꼭 쥐었다. 불손한 행위였으나 페이네리아는 그냥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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