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63화 (63/97)

63화.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야.”

차분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헤일라의 귓가에 윙윙댔다. 숨소리가 발작적으로 가빠졌다.

“아파?”

리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상한 태도였다. 사랑하는 연인의 손톱 아래에 잔가시가 박힌 것을 걱정하는 다정한 남자의 낯이었다.

그게 소름 끼치도록 이질적이라 눈 아래가 바르르 떨렸다. 무구했던 눈동자에 고통과 경멸이 날뛰기 시작했다. 현실을 자각하자마자 모든 기억이 징그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그려진 탓이다.당장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바즈락거리다가 오른손이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보드라운 가죽 수갑은 침대 헤드와 연결되어 있었다. 끈은 진한 노란색이었다.

‘난 샛노란 색이 가장 좋아.’

언젠가 그에게 했던 말이다. 볼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충격 탓에 저도 모르게 움찔댄 왼쪽 손목에서 다시 고통이 올라왔다. 울컥 찌푸린 얼굴에 큰 손이 닿았다. 리안은 미간에 잡힌 주름을 살살 펴면서 어르는 투로 말했다.

“약 잘 먹고, 밥 잘 먹고, 내 말 잘 들으면 금세 나아.”

“저건 거짓말이야.”

언니의 환영이 속살거렸다. 그건 헤일라도 알았다. 자상으로 절여진 손목이 저도 모르게 달달 떨렸다. 영영 왼쪽 손목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환초…… 환초라도…….”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주룩 흘러 턱 끝에 매달릴 즈음에는 리안에게 부탁한다는 수치심도 잊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살점이 조금씩 떼이는 감각들이 끔찍했다. 차라리 수면으로 다시 안식을 찾았으면.헤일라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리안의 옷깃을 꼭 쥐어 봤다. 절박함이 담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자약한 얼굴이었다. 절절매는 여자를 의아한 눈으로 보던 남자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파?”

“아…… 리안……. 손, 이, 너무…… 흐, 아프…….”

“아픈 걸 원하는 게 아니었어?”

매끄럽게 웃는 낯은 아름다웠다. 아, 저건 누군가를 아래로 처박을 때 짓는 표정이다. 헤일라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렸다. 자신을 기만하는 남자의 뺨을 치고 싶으면서도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사정하고 싶다. 징그러운 이중성에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 쪽으로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리안은 고통을 경감시킬 그 무엇도 그녀에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벌. 벌이다. 헤일라는 어렴풋이 깨닫고는 아랫입술을 빼물었다. 분노와 원망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미안. 환초는 안 돼.”

“흐, 으으…….”

“그렇게 보지 마.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야.”

내가 어떻게 그래? 남자는 울음에 섞인 감정을 읽어 내고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천천히 눕힌 뒤 오목한 아랫배에 큰 손을 얹어 천천히 쓸어내렸다. 언제나처럼 애정이 담뿍 담긴 손길로.

“애가 또 들어섰대.”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얼굴의 근육이 단단하게 굳어 어떤 모양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헤일라는 멀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안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의 너머로 흐릿한 잔상이 비쳤다. 레테였다.

“임신이 잘 되는 몸이라 다행이지.”

이제 네가 죽으면 이 아기도 죽는 거야…….

안도가 젖어 든 목소리. 뿌듯함이 배어 있는 단단한 눈매. 저건 연기가 아니다. 그는 정말로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헤일라가 죽으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혼곤한 정신을 다듬기도 전에 리안이 츠읍, 하고 헤일라의 목덜미를 빨아 들였다. 명백히 성적인 의도를 담은 접촉이다. 진저리가 쳐졌다.

“싫어…… 싫…….”

끔찍하다. 누운 채로 고개를 젓자 베개 바스락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의 뒤에 있던 망령이 이제는 침대 옆으로 바싹 다가와 소곤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워. 이러지 마. 둘 다 떨어져.

와중에도 남자는 부지런히 헤일라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두 사람의 말이 섞여 귀 안쪽부터 머릿속이 온통 혼탁했다.

“언니, 레테…….”

저도 모르게 입에서 언니의 이름을 뱉어 내자 리안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래. 레테.”

리안은 그녀의 판판한 배를 다시 뭉근히 눌렀다. 무언가를 곰곰이 그리는 얼굴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그걸로 할까?”

헤일라의 도톰한 입술이 갈라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들은 말이 그저 질 나쁜 농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보통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반절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는 이것이 헤일라의 환심을 사는 방법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죽였으면서. 제 손으로 내 언니를 죽였으면서!

헤일라가 거세게 반발했다. 사지를 뒤틀며 악을 썼다. 리안의 뺨을 치고, 팔을 꼬집고 가슴을 할퀴었다. 그러나 돌 같은 몸을 가진 남자에게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번에는 애가 떨어지지 않게 내가 더 신경 쓸게.”

“하지 마! 놔!”

“쉬이, 헤일라, 상처가 벌어질지도 몰라.”

그는 차분하게 팔뚝을 누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땀 때문에 눌어붙은 잔머리와 분노로 달아오른 붉은 얼굴이 조화되어 아름답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따위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리안은 헤일라에게 바투 붙어 하의를 벗기 시작했다. 철컥대는 벨트 소리에 헤일라가 기겁했다.

“죽어, 죽어 버릴 거야. 죽어 버릴 거야!”

순간 리안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하.”

그리고는 가볍게 웃는 게 아닌가. 헤일라는 발갛게 달아오른 코를 훌쩍댔다.

“그럼 끝일 줄 알고 이러는 거야? 귀엽긴.”

“…….”

“네가 죽으면 내가 어쩌지 못할 것 같아? 그래, 확실히 그렇지. 그런데 뒤를 생각해 봤어? 난 우리 애를 데리고 죽어 버릴 거야.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하니까.”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이다. 레테와 자신을 두고, 가족이니 영영 함께해야 한다고 했던 것을 감히, 이 남자가 따라서 하고 있는 것이다.

헤일라가 발작하듯 고개를 저었다. 아아악, 소리 지르는 목소리마저 황홀하다는 듯 리안이 눈을 휘었다.

“넌 우릴 사랑하니까 절대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없는 거야…….”

그녀는 엉엉 울었다. 리안은 그저 바라만 보다가, 급작스럽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말라붙은 입술을 가르고 축축한 살덩이가 침범했다. 익숙하게 입안을 빨고 쓰다듬다가 아랫입술을 물고 자근거렸다. 피가 배어 나오자 제 버릇을 개 주지 못한 리안이 게걸스럽게 그걸 빨아 먹었다. 비린 향이 미미하게 끼쳤다.

그것으로 행위가 시작되었다. 남자의 성기가 질구를 넘는 게 느껴질 때 즈음, 헤일라는 완전히 널브러져 헉헉대고만 있었다. 삶의 의지를 놓지도, 잡아채지도 못하는 여자는 부유하는 죽은 생선 덩어리처럼 섬찟했다.

“헤일라.”

그때, 망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자 언니가 침대에 손을 올린 채 재미있다는 얼굴로 생긋거리고 있었다.

레테, 내 언니. 입을 달싹여 속엣말로 혈육의 이름을 불렀더니 레테는 더 천진한 얼굴이 되었다. 헤일라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제 위에서 헉헉대는 남자를 봤다. 흐릿한 잔상 속 그는 여전히 정사에 심취해 있었다.

“죽는 거에도 실패해 버렸네. 이제 안 되겠다.”

“찔러. 그 방법뿐이야.”

언니의 음성은 여전했다. 레테는 쿡쿡대며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와 리안과 헤일라 사이에 벌어져 있는 틈으로 손을 뻗었다. 희끄무레한 손은 존재감 없이, 그러나 정확히 움직였다.

헤일라의 가슴, 심장을 감싼 표피 위를 가리킨 손이 새하얗다.

“신전으로 가서, 검으로, 여기를 찔러.”

사랑을 버리라 속삭이는 여인은 마치 신처럼 고고해 보였다.

* * *

“아, 리안, 하읏, 그만……!”

문밖까지 여자의 고양된 신음이 흘러나왔다. 복도를 지키던 시종은 안절부절못하면서 서로 눈치를 살폈다.

“손목을 그었다더니.”

몸을 온통 태양 빛 황금으로 휘감은 황제, 페이네리아가 팔짱을 꼈다. 머리를 높게 올려 묶어 약간 까무잡잡한 목덜미를 드러낸 그녀는 오만하게 고개를 들고 문 앞을 지킨 시종에게 물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응?”

계집이 손목을 그었다고 들었다. 간신히 목숨 줄만 근근이 붙여 두었다고. 내심 콱 죽어 버렸으면 했는데 아쉽게 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리안이 계집에게 정이 좀 떨어졌기를 기대했건만. 기대와는 정반대로 일이 진행되는 듯하여 입안이 썼다.

“그렇기는 한…….”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노련한 늙은 집사가 젊은 시종의 말을 가로채며 등장했다. 황제의 눈썹 한쪽이 무섭도록 치켜 올라갔다.

“오랜만이군.”

아직 살아 있었나? 황제는 약간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집사와는 구면이었다. 동생 타델리아를 되찾겠다고 난동을 부렸던 공주 시절, 그때 자신을 막아섰던 것도 이 능구렁이 같은 집사였다. 서로에게 좋은 기억이 아닐 터.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그럴 리가. 그대가 짐을 상대로 농을 치는군.”

“…….”

“타델리아가 없는데 내가 잘 지냈을 턱이 있는가?”

“송구합니다.”

노인은 인사할 때보다 더 깊이 허리를 숙였다. 페이네리아는 불쾌한 기시감을 느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문이나 열어.”

“죄송합니다만 공작님의 허가 없이는 방문을 열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내가 왔다고 알리시게.”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이 남다른 노인이었다. 권력이 분산되어 있다손 쳐도 황제는 황제. 그럼에도 집사는 리안의 명에 절대복종했다. 그것이 이 노인이 삼 대째 휴리트 가문을 보필할 수 있었던 이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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