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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62화 (62/97)

62화.

* * *

언니의 환영은 그 뒤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이틀이, 사흘이, 나흘이 지났는데도 가끔 웃으며 헤일라와 눈을 맞출 뿐이었다. 그 사이 리안에게 안기는 것은 헤일라에게 일상이 되었다.

지금도 헤일라는 리안의 다리 위에 앉아 엉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아!”

“헤일라, 읏…….”

절정에 달해 달달 떠는 게 목덜미를 물어뜯겨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소동물 같았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리안은 감탄하며 뒤통수를 끌어안았다.

얕게 쳐올리는 허릿짓에 따라 섬세하게 짜인 등 근육이 움직였다. 헤일라는 견디기 힘든 고양감에 리안의 등에 손을 감았다. 긁어내리는 손톱에 얇은 살점이 끼었다. 그것마저 기분 좋은 자극인지 리안이 탄성을 터트렸다.

헤일라가 제 행동에 지레 놀란 듯 손을 떼어 꼭 쥐었다. 리안이 주먹 쥔 손을 등으로 감각하고 한숨 쉬듯 웃는다.

“더 해.”

“흣, 아앙, 잘못했…….”

“아냐, 응? 더 해도 돼.”

그녀가 남긴 자국이라면 뭐든 좋아서 하는 말인데, 헤일라는 빨라지는 삽입 속도에 겁을 먹었는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묻어 버린다.철벅대는 소리가 더욱 크게 둘을 자극했다. 리안은 헤일라의 양쪽 둔부를 꽉 쥐고 벌렸다. 힉힉대는 신음이 아름다운 음률처럼 그의 귓가에 닿을 때마다 검붉은 성기가 발간 내벽을 짓뭉갰다.리안은 한참이 지나서야 헤일라의 안쪽에 사정하고 헤일라를 눕혔다. 성기는 여전히 안쪽에 넣어 둔 채였다.

“빼, 빼.”

“이렇게 막아 둬야 아기가 잘 들어서지.”

그녀는 싫단 말을 하지 않았다. 무기력한 상태가 된 지는 날이 꽤 지났다. 시선이 리안의 가슴에 닿았다. 더 이상은 피가 비치지 않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며칠 전, 헤일라가 거부의 의사를 표시했을 때 그가 자신의 손으로 칼을 찔러 넣은 자리였다. 헤일라는 그것을 떠올리고는 눈을 감았다. 아래에 꼽힌 남자의 성기가 약간씩 팽창하는 게 느껴졌다.

“싫으면 마개를 구할까?”

리안은 옴찔거리는 아래의 감각을 즐기며 물었다. 필시 기겁할 헤일라를 알고 농을 치는 것이리라. 알면서도 헤일라는 그의 뜻대로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젓는 게 그의 눈에는 한없이 어여뻤다.

“안 해.”

“…….”

“네가 싫으면 안 하지.”

“아닐 텐데.”

순간 헤일라가 눈을 팍 떴다. 리안은 그녀의 몸에서 내려와 아래를 닦아 주느라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언니? 언니야?

헤일라는 속으로 멍청하게 불렀다.

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리 애원해도 들리지 않던 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약간 흥분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언니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 같은데 나타나지 않아서 얼마나 초조했는지.헤일라는 눈을 꼭 감고 레테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나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헤일라는 백치처럼 같은 물음만 계속 띄웠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조급 조급해져 언니의 이름만 계속 불렀다. 돌아오라고. 나 좀 구해 달라고 빌었다.

“바보 같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멍청이.”

응. 맞아. 나는 언니가 없으면 안 되는데 내가 바보 같았어. 언니, 언니…….

죽어 없어진 언니를 그리는 헤일라가 비참함에 잠겼다.

“찔러.”

그러나 언니가 한 말에 무조건 수긍할 수는 없었다. 리안을 죽일 수는 없었다.

안 돼, 못해. 누가 죽는 건 싫어. 나 때문에, 자꾸, 나 때문에…….

갑자기 헤일라의 귀에 미친 듯이 웃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광음에 헤일라가 귀를 틀어막았다. 리안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헤일라에게 바짝 달라붙었지만 이미 이상행동이 시작된 뒤였다.

“멍청한 년!”

“언, 언니…….”

“헤일라, 왜 그래, 응?”

“아…….”

리안의 목소리를 뚫고 레테가 끝없이 속살댔다. 끔찍한 잔상이 곁에 계속 머물러 괴롭다.

“누가 리안을 죽이래?”

“그럼? 그럼…….”

“너.”

“헤일라!”

“너만 죽으면 돼.”

네 손으로. 레테의 환청이 쨍, 하는 마찰음과 함께 멈췄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차에 하녀 하나가 자기 그릇을 깬 소리였다.

“리안.”

그녀가 식은땀에 절은 얼굴로 리안을 돌아보았다. 리안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헤일라를 감싸 안았다.

나중이 되어서야 헤일라는 자신이 세 시간 동안 발작 증상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주 찰나의 시간 언니와 대화를 나누었다 생각했는데 모두 착각이었던 것이다. 헤일라는 손톱을 이로 물어뜯었다.

그러나 자신이 미친 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날 이후 헤일라는 레테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발작하며 언니의 이름만 내내 불러 대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리안은 안심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뒤, 헤일라가 제 손목을 그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아주 깊숙하게.

* * *

뚝, 뚝.

한 방울씩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습하고 꿉꿉한 지하의 냄새, 그리고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는 돌벽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빛줄기가 몇 가닥 들어오기는 했지만 어두침침한 분위기는 어디 가지 않았다.

“레테.”

베르디안이 무너진 기둥에 걸터앉아 레테의 이름을 불렀다. 공허한 혼잣말이 시작되었다.

“레테…….”

그가 손에 쥔 물병을 으스러트릴 듯 꽉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야, 자포자기한 듯 물이 고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남색 빛이 도는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히윽, 윽, 우욱.”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졌다. 베르디안의 우측에 손발이 묶인 채 널브러져 있는 신전의 시녀였다. ‘그날’ 레테의 심부름으로 베르디안에게 갔던 여자.

“다시.”

베르디안이 냉랭하게 명령했다.

“레, 테 님, 께서, 흑, 베르디, 안 님께 전해야 할 말이 있다, 고 하셔서.”

“…….”

“가 보라고, 서둘러 가라고, 하, 하셨…… 습니다, 아, 그, 부탁한 건,”

베르디안이 시녀의 말을 끊고 무어라 중얼댔다. 그 말을 들은 시녀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네, 네, 네!”

베르디안은 서른여덟 번째 같은 대답을 들으면서도 처음 들은 사실을 확인하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정말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네, 레테 님께서, 어, 그 말을 전하라고만, 흑,”

그렇게 돌아가실 거라고는 생각도…… 시녀가 바들바들 떨었다. 맞아 불어 터진 뺨이 끔찍하게 아팠다.

“그럴 리가 없는데.”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로, 정말로 그렇게 전하라고!”

“그럼 나한테 거짓말한 거라고?”

레테가? 베르디안이 벌떡 일어나 시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한 손으로 볼을 쥐어 올리니 하녀가 자지러졌다.

“그 애는 살기로 했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대는 베르디안의 얼굴은 광기에 절어 있었다.

“동생한테만 죽은 사람이 되고, 나랑, 영원히.”

“…….”

“살기로 했다고.”

분명히 그랬다. 약을 먹고 죽은 사람이 된 뒤 베르디안과 함께 바다 건너 다른 대륙으로 떠나겠다 했다. 여행을 하자고. 동생을 얽지 않고, 저도 얽매이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 보겠다고.

그런데 죽어 버렸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베르디안이 믿을 수 없다고 중얼대다가 시녀의 목을 잡아챘다. 목을 죄는 손의 악력이 점점 세졌다.

“큭, 제발, 살, 살려…….”

시녀는 살려 달라 애원하며 베르디안의 손을 꼭 쥐었다. 살려 달라, 는 말을 들은 베르디안이 천천히 손을 뗐다.

“살려 달라고.”

“흐윽, 컥, 허억.”

“그럼 레테를 지켰어야지.”

“허윽, 윽.”

“살렸어야지!”

“레, 흐윽, 레테 님께서 베르디안 님께…….”

가라고 했다. 가서 전하라고, 아주 중요한 이야기라고 했다.

“꼭 말을 전해야 한다고, 큭.”

시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레테 님께서, 명령으로, 라고 애원했다. 숨이 끊기기 직전, 베르디안의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헉, 허억…….”

시녀는 내내 괴로운 숨을 토해 냈다. 죽음의 문턱에 닿은 충격이 꽤나 컸음이다.

“그딴 게 마지막 부탁이라고…….”

베르디안이 허탈함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시녀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직후부터 애벌레처럼 기어 출구 쪽으로 향했다.

푹.

그때 그녀의 목덜미에 칼이 박혔다.

“레테.”

베르디안의 공허한 호명이 피비린내와 함께 흩어졌다.

“레테…….”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철퍽, 내디뎠다. 발걸음은 레테의 마지막 염원 쪽을 향하고 있었다.

* * *

헤일라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잠시 멍한 기분을 가다듬었다. 커다란 창에서 쏟아지는 햇빛, 더없이 평화로운 오후, 몸에 닿는 보드라운 침구의 촉감과 깨끗한 향기…….모든 것이 그녀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베개에 누운 채로 조금 고개를 돌리니 언제나처럼 나른하게 눈매를 접은 남자가 그녀를 향해 웃었다.

아, 눈이 마주쳤네.

헤일라, 하고 부르는 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로 퍼지듯 빙빙 돌았다.

그는 기쁜 듯 침상 옆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동시에 쓰러지기 전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잠시 업무 지시를 하러 나간 리안. 리안이 나간 새 목욕 시중을 들던 하녀들. 그런 하녀 하나를 밀쳐 항아리가 깨지게 하고, 그 조각으로, 손, 손목을…….

그때 언니가 웃었는데. 진짜 예쁘게.

……전부 꿈이었나?

괜스레 작게 중얼거려 봤다. 이렇게 평온한데, 그런 기억들이 현실일 리가 없을 것 같았다. 헤일라는 이제껏 겪은 모든 일이 꿈일지도 모른다고 저 좋을 대로 결론지었다.

“하읏…….”

하지만 손을 움직이려 힘을 주었을 때, 무수한 칼질이 만들어 낸 자상이 다시 한번 근육을 끊어 놓듯 고통을 흩뿌렸다.

헤일라는 왼손을 후벼 파는 고통에 할딱거리며 눈을 꽉 감았다가 떠 보았지만, 감각은 허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내려 고통의 진원지를 살폈다. 두텁게 얹어진 치료용 천 위로 스며들어 있는 핏물이 선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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