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리안은 약간 필사적이었다. 진심을 전하려 애쓰고 있었다. 헤일라는 그를 보며 이전의 자신과 언니를 떠올렸다. 내 진심을 언니가 믿어 주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자신과 그걸 지켜보던 언니.
어쩌면 언니도 이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일라는 비참함을 느끼며 몸을 말았다.
“난 너만으로는 안 돼.”
언니도, 아기도, 가족도 필요했다. 소중한 걸 아주 많이 만들고 평온함에 둘러싸여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많이 잃어서 꿈꾸는 것도 뻔뻔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너랑 있으면, 너만 남아.”
맹목적인 사랑과 갈구가 버겁다. 종래에 그것이 날 망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살아가며 자연스레 만들어질 소중한 것들이 리안 때문에 망가질 일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리안, 나…….”
그가 불안을 직감하고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헤일라는 눈을 꽉 감고 말을 이었다.
“나, 원하는 게 있어.”
“헤일라.”
“아무도 안 만날게. 넌 그걸 못 견디니까. 아무도 없는 데서 살게. 혼자 조용히 있을게. 그러니까…….”
“그만.”
“이제 나 놔줘.”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리안 없이, 아무도 없이.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고 괴롭지 않은 삶을 살고 싶어졌다.
헤일라는 너무 지쳤다. 천천히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려 했다. 그런데 그때 언니의 환영이 고개를 돌렸다.
“도망쳐.”
턱. 리안이 헤일라의 몸을 잡아채 돌렸다.
“또 시작이네.”
광기가 들러붙어 번들대는 검은 눈이 그녀를 느리게 훑었다.
“헤일라, 그거 알아?”
그가 음산하게 중얼댔다.
“애가 떨어진 지는 벌써 두 달이 지났어.”
두 달? 헤일라가 속으로 기겁했다.
두 달이나. 그럼 두 달 동안 자신은 내내 잊고, 깨닫고, 슬퍼하다가, 잊었다는 게 된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완벽히 미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길게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잊어 본 적은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기억하기에는.
“흣, 윽…….”
충격에 빠져 넋이 빠진 헤일라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리안이 움직였다. 그의 두꺼운 손가락이 헤일라의 샅을 벌렸다. 도독한 살점이 거친 손에 뭉개졌다.
“의원은 네가 애를 밸 수 있는 몸이 됐다고 말했고.”
“아……!”
“그런데 너는 또 나를 떠나려고 해.”
내가 뭘 해야 할까…… 리안이 말을 늘였다. 헤일라가 발작하듯 허리를 튕겼다. 음핵이 꼬집힌 탓이다. 리안은 헤일라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행위를 이었다.그러다 쑤욱, 중지가 여성의 안으로 진입했다. 손가락은 굴곡진 안쪽을 더듬다가 오른쪽 아래를 비벼 눌렀다. 히익, 하는 소리가 들리자 손을 떼고 입가로 들고 가 투명한 액을 혀로 맛보았다.
보란 듯이 그녀와 눈을 맞추고.
짝! 남자의 얼굴이 돌아갔다. 헤일라가 가쁜 숨을 쉬며 옷을 추슬렀다. 하지만 미약한 시도는 리안의 손길 한 번에 끝이 났다. 얇은 이불과 옷이 침대 아래로 떨어진다.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발길질도 해 보고 손으로 뿌리쳐 보기도 했지만 남자는 단단하고 강했다.
무력하다.
“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우는 여자에게 물었다.
“싫다고, 싫다고 했잖아! 그만하자고 했잖아. 놔 달라고! 이제 너랑 이런 짓 안 할 거야.”
아기도 너도 다 필요 없다고……. 헤일라가 스스로를 감싸 안았다.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였다. 그 모습이 얼핏 몸을 옹송그린 초식동물 같았다.
“……그래?”
순간 리안이 약간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동요한 헤일라는 입을 빠끔댔지만 그를 말리지는 못했다. 갑자기 변해 버린 리안의 눈빛이, 느릿한 손길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얼굴의 근육들이 그를 평소와 달리 보이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 같아. 헤일라는 잔뜩 겁먹었다.
리안이 갑자기 두 손을 그녀의 뺨에 올렸다. 오른 엄지가 왼 눈꺼풀을 꾹 누른다. 안구를 싼 뼈를 충분히 즐기듯 쓸고 그 아래, 볼록하고 연약한 알맹이를 눌렀다.
“분명히 힘을 조금만 줘도 부드럽게 뽑힐 텐데.”
황금색 구슬이.
구슬.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헤일라는 이전에 파이라에게 들었던 저주에 관해 들었다.
사람의 왼눈을 뽑아 간다는 리안의 저주. 헤일라는 단 한 번도 그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공포에 압도되었다. 죽음 이전에, 눈이 뽑히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녀를 달달 떨게 만들었다.
“아흣.”
신음과 함께 그의 망상이 멈추었다. 리안이 흠칫 떨며 손을 뗐다. 헤일라가 떨고 있는 걸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왼눈을 손으로 가리고 남자에게서 멀어지려 필사적으로 허우적댔다. 그가 헤일라를 진정시키려 손을 뻗었을 때는 끔찍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제물처럼 비참한 얼굴을 하기도 했다.
리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그는 천천히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갔다. 방을 가로질러 협탁의 서랍으로 향했다. 무언가를 꺼낸 남자는 서랍도 닫지 않은 채로 헤일라에게 다가왔다. 비척대는 모습이 바람에 뿌리 뽑히기 직전의 나무 같았다.
“헤일라.”
그가 쥐고 있는 건 칼이었다. 헤일라는 리안이 자신을 찔러 죽이려는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떨었다. 아니면 왼눈을 찔러 도려내거나.
“내가 그렇게 싫어?”
“리, 리안.”
“놔 달라고?”
“흑, 왜 이래!”
리안이 헤일라의 손아귀에 억지로 칼을 쥐여 주었다. 의외의 행동에 놀란 것도 잠시, 헤일라는 그의 의중을 깨닫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던 헤일라는 뼈가 으스러질 듯 제 손을 쥐어 오는 악력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엉엉 울기만 했다.
“난 못해. 놓는 일 같은 건 없어.”
헤일라가 숨을 삼켰다. 물기에 젖은 헐떡임이 반복됐다.
“그런데 너한테 죽어 주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그건 괜찮아.
리안이 칼을 쥔 헤일라의 손을 잡은 채로 칼날을 제게 들이밀었다. 점점 남자의 가슴 쪽으로 향하는 칼끝에 헤일라가 억억대며 경기를 일으킨다.
하지만 칼이 멈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안 돼!”
“네가 나를 버리면 난 죽어. 예전부터 알려 줬잖아.”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 그러나 리안의 가슴팍에서는 이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칼끝이 살을 파고드는 게 손잡이를 통해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러지 마, 이러지 마…….”
“왜?”
리안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버리는 것도 가지는 것도 너야.”
선택. 헤일라는 작게 읊조렸다. 리안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이 베여 아릴 텐데도 여상했다.
“어떻게 할 거야?”
다정한 겁박이었다. 리안이 칼을 놓으려 안간힘을 쓰는 여자를 내려다보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손에 강제로 쥐여 주었던 칼을 빼내 침대 밖으로 던졌다.
챙!
날붙이가 바닥과 마찰해 요란한 소리를 냈다. 헤일라가 헉헉대며 두 손을 들어 확인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확인하는 모양새였다.
“앞으로는.”
“…….”
“날 못 죽이겠으면 버린다는 말도 하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못을 박는 말은 한없이 가벼웠다. 그러나 리안 또한 화를 꽉 누르고 있는 게 여실해 보였다. 그가 쥔 주먹 위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리안이 화를 삭이려 일어나 방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고리를 잡고 돌리지 못한 채 몇 초를 망설였다. 결국, 그는 빠르게 뒤돌아 뛰듯이 헤일라에게 달려들었다. 몸을 옹송그리고 있는 여자의 팔뚝을 잡고 돌려 눕혀 입을 맞추었다.
얼굴이 쥐어진 채 강제로 입이 열린 헤일라는 그의 화를 오롯이 받아 냈다. 그녀의 가슴팍에 리안의 가슴에서 흐른 피가 흩뿌려졌다.
* * *
벗은 몸으로 그에게 안겨 있던 헤일라는 리안의 호흡이 고르게 변한 것을 느끼고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의 등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는 남자는 어미가 없으면 한 시도 잠들지 못하는 아기처럼 굴었다.
화가 나서 몸을 섞을 때는 죽일 듯 맹렬하게 몰아붙여 놓고서는 이렇게 투정 부리듯 바투 붙어오는 꼴이란. 헤일라는 음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목덜미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가슴이 아렸다. 동시에 갑갑했다.
품에서 벗어나려 약간 힘을 주었다. 그러자 아래에서 점성 있는 액체가 쏟아져 샌다. 남자가 사출한 정액이었다. 헤일라는 리안에게 떠나겠다고 한 직후부터 하루 반나절 내내 그에게 아래를 내주었다. 그는 어딘가 초조해 보였고 자제력을 잃은 듯도 보였다. 어찌 되었든 정상은 아니었다.리안은 ‘애가 들어섰다고 생각될 만큼 배가 부르면 좆질을 멈추겠다’고 했고, 정말로 정액이 배를 꽉 채웠다 싶을 만큼 아릴 때가 되어서야 배를 쓰다듬으며 배꼽에 입을 맞췄다.
밤의 일을 생각하자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함이 차올랐다. 다시 생길지도 모를 아기에게 미안했다. 그 아기가 소중해져서 평생 잃을까 봐 전전긍긍할 자신이 그려졌다.
어쩌면 리안은 아기를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 아니, 필시 아기는 나 때문에 다치게 될 것이다. 불행해질 것이다. 언니처럼, 나와 닿았던 모든 사람들처럼, 이전에 배 속에 있었던 아기처럼…….
바보처럼 또 눈물이 새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힐난이 들려왔다.
“울지 마.”
언니였다. 헤일라는 모로 누운 채로 앞을 응시하다가, 환영이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을 굴려 바라보니 언니가 맞다. 틀림없는 레테의 환영이었다.
“운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환영은 퍽 언니처럼 굴었다. 살아생전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인데도 꽤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구부러지지 않는 강인함이 언니와 똑 닮았다. 언니의 환영이니 당연한가. 헤일라는 저도 모르게 언니에게 하듯 물어 버렸다.
그럼 어떻게 해?
죽어 버린대.
죽일 자신이 없으면 벗어날 생각도 하지 말래.
리안을 죽일 수는, 더 이상 누가 죽는 건…….
그녀는 리안이 깰까 봐 속으로 웅얼댔다. 환영은 그런 조심스런 태도까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쉬어 흉곽을 부풀렸다.
“멍청하긴.”
조롱조였지만 헤일라는 동그란 눈으로 언니의 말을 경청했다. 그녀는 말을 아주 잘 듣는 동생이었다.
여전히.
“꼭 저 새끼를 죽일 필요가 뭐 있어?”
레테의 왼손이 천천히 헤일라에게 다가왔다. 두 손가락이 잘려 나간 손이었다.
“생각을 좀 바꿔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