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60화 (60/97)

60화.

침묵은 두 사람이 저택에 도착해서도 계속 이어졌다. 리안은 헤일라를 침상 위에 올려 두고 옆에 앉았다.

“한숨 자. 너 쉬어야 돼.”

리안은 놀라울 정도로 헤일라의 상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정신적인 충격과 피로감이 온통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다. 사실 레테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기억을 더듬어 보려 노력하는 게 헤일라의 최선이었다. 정신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싫어.”

“말 들어.”

“싫어!”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한 그의 모습에 헤일라가 약간 주춤했다. 그러나 고집을 꺾지는 않았다.

“안 자. 언니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나도 알아야 할 거 아냐! 자고 있는 사이에,”

“네가 잠든 사이에 전부 덮어 버리려는 속셈이지.”

흠칫, 헤일라가 떨었다. 리안이 천천히 팔짱을 꼈다.

“맞아.”

그가 한쪽 눈썹을 올리고 나긋이 웃었다.

“자고 일어나면 다 해결돼 있을 거야. 무도한 이는 내가 꼭 잡아 줄 거고.”

헤일라. 그가 침상에 기대앉아 있는 여자에게 바싹 붙어 속삭였다.

“착하지, 헤일라.”

철컥.

목에 쇠사슬이 감기는 기분이 들었다.

“얼른 자자.”

그의 뒤로 누군가가 보였다. 언제나 헤일라를 보필하던 하녀였다. 그녀가 향로에 무언가를 넣는 모습이 보였다.

“아…….”

코끝에 알싸하면서도 냉한 향이 스쳤다. 눈앞이 핑 돌았다. 리안이 몸을 끌어안고 도닥여 주는 게 느껴졌다.

수면 향이구나.

언니가 죽은 날. 언니를 죽인 사람이 리안이라 의심하는 나와, 그런 나에게 수면 향을 피워 주는 리안.

끔찍하다.

눈앞이 아른아른했다. 헤일라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잠들지 마!”

“헉!”

귀를 찢을 듯 맹렬한 소리였다. 발작하듯 온몸을 떠는 헤일라에 놀란 듯 리안이 어깨를 잡았다. 왜 이러냐 묻는 그의 목소리가 레테의 고함에 묻혔다.

“또 멍청하게 다 잊어버리려고!”

“내가 죽은 것도 맘 편히 잊으려는 작정이지?”

“나쁜 년.”

“아니, 아니, 난…….”

헤일라가 더듬대며 대답을 해 보았지만 레테의 환청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녀는 째지는 비명 소리를 내기도 했고 애처롭게 우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 종래에는 끊임없이 헤일라에게 주지시켰다.

“난 너 때문에 죽은 거야.”

끔찍한 저주였다. 리안은 흥분해 벌벌 떠는 헤일라를 가라앉히기 위해 그녀를 끌어안고 내내 부드럽게 얼렀다. 내가 잘못했다느니, 화낸 거 아니라느니 하는 다정한 목소리가 헤일라에게 퍼부어졌으나 그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원인은 다른 데 있었으니까.

결국, 그날 헤일라는 잠들지 못했다. 독한 수면 향이 무색할 정도로 눈이 시뻘게질 때까지 깨어 있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리안이 준비한 수면 향도, 다른 모든 방도도 그녀를 잠의 안식으로 인도하는 데 실패했다.

바야흐로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다.

* * *

잠들지 못하는 날이 길어지자 헤일라의 뺨은 점점 수척해지기 시작했다. 길어야 삼 일에 두어 시간을 자는 일상이 계속되자, 본래도 말라 있던 팔과 다리는 이제 뼈밖에 남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배는 불뚝 튀어나와 아기의 태동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헤일라는 의자에 멍하니 앉아 창문만 봤다. 눈 아래 거뭇한 그림자가 길게 내려앉은 채였다.

“헤일라.”

그녀는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게 리안에게 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식사해야지.”

묽게 끓인 수프와 부드러운 빵, 잘게 다진 고기 요리가 그녀의 앞에 놓였다. 하지만 고소한 냄새에도 헤일라는 반응하지 않았다. 구역질을 토해 내지도 않았지만 눈길을 주지도 않은 채였다.

리안이 작게 한숨을 쉬고 의자를 그녀의 옆으로 끌어 앉았다. 작은 스푼을 들어 수프를 떠 주니 그제서야 헤일라가 눈길을 보냈다.

“아, 해 봐.”

그는 말만 그렇게 하고 헤일라의 턱을 열어 직접 입안으로 넣어 주었다. 최근 들어서는 계속 이런 식으로 식사를 해야 했다.

음식이 그대로 주룩 새었다. 그럼에도 리안은 참을성 있게 그녀의 입 주변을 닦아 주고 다시 음식을 넣어 주었다.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식사는 끝이 났다.

“네가 죽였대.”

리안은 익숙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헤일라는 믿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언니가 자꾸 그래. 네가 죽였다고…….”

“아니야.”

“거짓말이래. 다 거짓말이래. 자꾸 나한테 화내. 언니가 화내…….”

“이제 우리뿐이잖아. 나 믿어야 돼.”

“안 죽이겠다고 했잖아. 나 말 잘 들었잖아. 왜 그랬어?”

둘은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처럼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리안은 이제 익숙해진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헤일라는 멀쩡히 듣다가도 돌연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히끅 댔다.

사용인들은 헤일라가 완전히 미쳐 버렸다고 했고, 신전에서 나온 신관은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환청을 듣는 것이라 했다. 리안은 그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의 헤일라는 미쳐도 아름다웠다.

“쉬이, 진정해.”

하지만 이대로는 조금 곤란했다. 사람은 아름다움만으로 생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식사도 해야 했고 잠도 자야 한다.

이전에는 무언가를 잊기도 잘 잊었는데 레테가 죽었다는 사실은 쉬이 지워 버리지도 못하는 듯했다. 아쉬운 일이다. 차라리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면 편할 것 같은데.

그는 위험한 생각을 하며 헤일라를 도닥였다. 백치가 된 여자를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며 보듬어 주는 것도 굉장히 뿌듯하고 즐거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리안은 아쉬움과 헤일라에 대한 걱정을 담아 한숨을 쉬었다.

“언니…….”

헤일라가 코를 훌쩍댔다. 리안이 부드러운 천으로 코를 닦아 주었다.

“이제 자자.”

그리고는 헤일라를 안아 들고 침상에 뉘어 주었다. 빛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예민해져 아예 눈도 감지 못하는 요즘의 그녀를 위해, 리안은 침상의 캐노피 천을 모두 닫아 빛을 차단했다. 시종들이 천과 천을 만나게 하는 걸 지켜보던 헤일라가 모두 쳐진 커튼을 보고 갑자기 중얼댔다.

“저기…… 누구 있어?”

“뭐가?”

“저어기, 저기 뒤에, 날 지켜보고 있어.”

리안이 일어나 꽁꽁 닫아 둔 천을 들쳤다. 그러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히익!”

이번에는 헤일라가 다른 반대편을 보고 기겁했다.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달달 떨었다. 남자가 침대 밖으로 나가 시종들에게 캐노피 천을 다 걷어 내라고 명령했다.

“이거 봐, 헤일라. 아무도 없잖아.”

그가 안심하라는 어투로 그녀를 얼렀다. 헤일라는 이불 속에 있던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러나 리안의 말은 틀렸다. 더욱 선명해진 형체가 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아, 아아…….”

형체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푸석한 금발, 허연 피부, 그리고 비어 있는 한쪽 눈과 두 손가락…….

욱신.

“헤일라, 왜 그래.”

리안이 의사를 불렀다. 다급함이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헤일라는 욱신대는 배를 붙잡고 신음하면서도 형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흐, 아아…….”

언니.

레테의 환영이 그녀에게 들러붙었다.

다리 사이로 무언가 흘러내렸다.

* * *

아이가 사라졌다. 홀쭉해진 배를 끌어안고 묻자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리안은 그 말을 하고 난 뒤 단 한 순간도 헤일라의 손을 놓지 않았다. 아마 유산된 사실을 말하는 게 지금이 처음은 아니리라. 충격을 받고 잠에 빠져든 뒤 자신이 잊어 다시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러 번 들었다 해서 충격이 반감되는 건 아니었다.

아홉 달 품은 아이가 죽었다. 언젠가는 발로 어미의 배를 밀어내는 게 느껴질 정도로 커 버린 아이였는데. 사라졌다. 죽어 버렸다.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안아 주지도 못하고 보내 버렸다.

“아이는 또 생길 거야.”

그는 정말로 그렇게 여기는 듯했다. 새로 생기는 아이와 사라진 아이는 같지 않다는 걸 모르는 멍청이처럼 말했다. 그게 끔찍하게 싫었지만, 헤일라는 가만히 있었다. 따질 기력도 없거니와 무어라 말해야 할지도 막막했다.머릿속이 점점 비어 간다. 졸음이 쏟아졌다.

“잘래…….”

몇 시간 전에 잠들었다 깨어났지만, 헤일라는 다시 꿈속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이제 잠을 자는 건 힘들지 않았다.

아이가 없어진 뒤로 언니의 목소리가 멈췄기 때문이다. 언니의 환영은 그냥 헤일라가 자주 앉는 창문 앞 의자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거나 책을 읽었다. 본래 레테가 침대에 앉아 자주 하던 일이었다. 그런 일상적인 모습이 더 지독하게 느껴졌다.

리안이 헤일라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목덜미를 주무르자, 헤일라가 움칠 떨며 뒤척였다.

“뭐, 하고 싶은 일은 없어? 먹고 싶은 거나.”

뭐든 원하는 게 없느냐고 물었다. 무용한 질문이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차올랐다.

“보고 싶어.”

리안에게서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언니 보고 싶어…….”

저런 가짜 말고. 불러도 대답해 주지 않는 환상 말고.

“아기도…… 보고 싶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얼굴로 웃는지 알고 싶었다. 언니 이외의 유일한 혈육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아이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헤일라도 이뤄질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리안이라도, 휴리트 공작이라도 이루어 줄 수 없는 게 있는 거다.

“그런데 볼 수가 없어서…….”

평생을 함께해 그리운 사람과 단 한 순간도 온전히 감각해 본 적 없어 그리워할 수도 없는 아기가 사무쳤다. 눈물이 옆얼굴로 흘렀다. 리안은 조용히 눈물을 닦아 주기만 했다.

“나로는.”

“…….”

“나로는 안 돼?”

약간은 화가 난 듯도, 섭섭한 듯도 한 질문이다. 헤일라는 약간 웃었다. 답이 없는 헤일라에게 리안이 조급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난 너만 있으면 돼. 그냥 하는 말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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