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여자는 비척비척 걸어 미아르의 앞에 섰다. 혈색이 빠져 시체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게다가 그새 입술을 얼마나 물어 댔는지 잔뜩 부르터 있었다. 안쓰러울 만큼 엉망인 입이 천천히 열렸다.
“시신은, 제 언니가 맞나요.”
미아르는 잠시 대답을 고르다가 한숨을 쉬었다.
“맞아요.”
“확인할게요.”
“괜찮겠어요?”
미아르가 헤일라의 배를 흘긋 봤다. 그녀는 답하지 않고 시신 쪽으로 다가갔다. 아무도 헤일라를 말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러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누가 무어라 해도 헤일라는 레테가 인정한 유일한 가족이었다.
하얗고 마른 손이 천을 걷었다. 헤일라는 떨지도 않았다. 공허함만이 그녀를 메우고 있었다.
“아.”
작은 탄성이 터졌다. 헤일라는 그대로 몇 번 아아, 하고 신음하다가 죽은 자의, 그러니까 레테의 창백한 뺨에 손을 올렸다.
“언니.”
맞았다. 레테가 맞았다. 잘려진 두 손가락이 뭉툭한 것까지 꼭 맞았다.
“언니.”
결국, 이런 방식으로 언니의 죽음을 보게 된 것이다.
“언니…….”
뺨은 차가웠다. 왼눈은 칼에 찔린 자상으로 엉망이었다. 코끝은 약간 파랗게 변해 있었고 입술 또한 그랬다. 손가락에 닿은 아랫입술이 너무 딱딱해서, 헤일라는 섬찟한 마음에 손을 내렸다.
“살려 줘, 헤일라.”
이미 죽어 버렸으면서.
“살려 줘, 살려 줘…….”
환청이 심해지는데도 그녀는 레테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언니의 입은 굳게 닫혀 있으니까. 그것을 확인한 여자는 환청에 휘둘릴 이유가 없었다.
“헤일라…….”
그러나 언니의 목소리에 눈물이 흐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아,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헤일라는 언제나 언니의 마지막을 그리곤 했으나 결코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허무가 슬픔을 파고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내심 헤일라가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던 미아르는 그녀가 언니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보이자 가까이 다가섰다. 당연히 헤일라를 위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괜히 신전에서의 일 때문에 유산이라도 하면 그 책임을 신전이 져야 할지도 몰랐다. 책임은 곧 배상액이고 배상액은 돈이었다. 절대 안 될 일이다.
그녀는 뒤에 있는 시종들에게 눈짓했다. 몇몇 이들이 헤일라에게 주춤주춤 다가서 그녀를 부축해 밖으로 내돌리려 했다.
“안 가요.”
“…….”
“누가 그랬는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알기 전에는 못 가요.”
헤일라는 꽤나 똑바르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떼를 쓴다고 되실 일이 아니에요. 이건…….”
“언니 일이에요! 내 언니예요, 내 언니라고요!”
마침내 폭발한 듯, 헤일라는 격렬히 소리쳤다. 떼를 쓴다니. 자신은 떼를 쓰는 게 아니었다. 유일한 가족인 자신이 언니의 죽음에 관해 파헤치지 않으면 누가 억울함을 풀어 줄 수 있을까?
언니는 이렇게 죽었으니 내가 해야 한다. 내가.
언니는, 언니는…….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었다.
“그럼, 이것만 말해 줘요.”
그리고, 앞으로 헤일라가 함께 살아갈 사람이…….
“리안이 언니를 죽였나요?”
그녀의 언니를 죽인 사람이어서도 안 되었다. 묻는 헤일라의 얼굴이 불안에 일그러져 있었다.
* * *
미아르는 조금 복잡한 심경으로 헤일라를 내려다봤다. 헤일라는 서 있는 것도 버거운지 기우뚱대면서도 꽤 매서운 눈초리로 미아르를 노려봤다. 거짓을 고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미아르는 속으로 세어 봤다.
문 옆에 서 있는 인간 하나, 헤일라의 우측에 서 있는 인간 둘.
우선 방에 있는 신전의 시종 중 리안에게 매수된 자들은 이 정도였다. 물론 더 있을 수도 있었고. 미아르는 그들이 곧 리안의 눈과 귀일 것을 알았으므로, 헤일라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대신에, 최대한 중립적인 어떤 것들을 알려 줄 수는 있었다.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리안 님은 그 시간에 폐하를 알현하고 계셨어요. 기억하시죠?”
헤일라의 기억력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걸 모르는 미아르는 줄줄 말을 늘어놓았다.
“폐하께서도, 폐하를 모시던 시종들도 모두 리안 님과 함께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리안 님이 현장에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신전을 둘러본답시고 여기저기 들쑤셨던 귀족들이 살해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더 크겠죠.”
“폐하께서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어요.”
미아르가 눈을 크게 떴다. 오늘 하루 종일 멍해 보이던 여자는 무언가 달라진 낯빛을 하고 공격적으로 물었다.
“폐하는 리안을 아낀댔어요. 그래서 보호해 주려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언니를 지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말이 안 돼요. 언니는 대신관이 될 사람이랬잖아요!”
그녀는 이제 미아르까지 불신의 눈으로 쏘아봤다. 어쩌면, 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헤일라가 중얼대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정신이 온전치 않아 생각을 입 밖으로 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허.”
미아르는 조금 어이가 없어져서 웃었다.
“연인은 닮는다더니. 리안 님도 그리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전 아니랍니다.”
미아르는 억울하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전은 최소한의 사용인만을 두고 있다. 사용인들은 가업을 이어 가며 신전의 종이 되는데, 이들 또한 신관은 아니므로 일반인의 신분이었다. 그래서 이전부터 ‘원칙적으로는’ 한 신관당 두 명의 시종만을 부릴 수 있었다. 물론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레테가 이를 걸고넘어지면서 제 주변에 있던 시종들을 모두 정리하라고 일렀다. 그녀의 까탈에 지치다 못해 죽어 나갈 것 같다던 시종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렇게 레테의 옆에는 덩치가 큰 신입 시종 하나와 시녀 하나만이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오늘, 하나는 레테 님이 심부름을 시켜 나갔어요. 베르디안 님께 뭔갈 부탁드렸는데 빠트린 말이 있다면서 보냈다더군요. 이건 그분이 곧 돌아오시면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죠.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한 명의 시종. 레테의 의자를 끌어 그녀를 옮겨 주던 덩치 큰 시종은 리듀카까지 레테를 데려다주었다고 증언했다. 그러고 나서, 레테가 혼자 있겠다며 시종을 내쫓았다고 한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네요.”
이건 아직 비밀이랍니다. 미아르는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시종은, 그러니까 꽤 어리숙한 시종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아아, 몸이 닳을 대로 닳은 우리 주인 신관이 또 남자를 불러들였구나. 괜히 토 달았다가 내 목만 뽑혀 나가지, 하고요. 그대로 리듀카를 나간 시종은 마구간에서 내내 짚을 날라 주는 걸 도왔답니다.”
헤일라는 약간 흐릿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어깨가 점점 처졌다.
“언니가, 남자랑…….”
믿기 힘든 사람처럼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매일 베르디안 후작님과 붙어먹으셨거든요. 다른 남자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기는 하죠.”
정말로 다른 남자가 있었다면 베르디안 님도…… 미아르는 말하다 말고 가뭇하게 감기는 헤일라의 눈을 보았다. 그녀는 피식 웃고 연약한 여자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자아, 이쯤 하죠.”
그녀는 헤일라의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헤일라가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쯤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헤일라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집착 어린 눈동자가 사방으로 왔다 갔다 했다.
“그럼, 그럼 폐하는요? 폐하랑 리안의 말은…… 믿을 수 있는 거예요?”
옷이 바뀌어 있었어요. 옷이…….헤일라는 미아르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댔다. 대체 누구를 의심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여자는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믿어야죠.”
“…….”
“그게 황제 폐하의 말인데.”
헤일라의 다리가 휘청였다.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 * *
사실은 그랬다. 리안 휴리트도, 미아르와 신관들도, 최근 레테에게 반쯤 미쳐 있었던 베르디안도 레테를 죽일 이유가 충분했다.그러나 헤일라는 리안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그녀가 리안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몰랐다면, 그에게 농락당한 역사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를 믿었을 것이다. 리안은 상냥한 연인이자 제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비였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헤일라는 잘 알았다. 뼛속까지 리안 휴리트를 잘 알았다.
그로 인해 망가진 사람이 자신이었으니까. 헤일라는 이를 악물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그녀를 짓눌렀다. 목에 덩어리가 맺힌 듯 이물감이 느껴졌다.
“혼자 걸을게.”
“안 돼.”
리안은 헤일라가 방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를 안은 채로 걸었다. 반 강제로 안긴 헤일라는 다리를 바동댔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옷은 왜 갈아입었어?”
기습적인 질문이었다. 리안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제 복장을 내려다봤다.
“시녀가 와인을 엎질렀어.”
침착한 대답이었지만 헤일라는 그의 얼굴에 떠오른 공교로운 기색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우연일까?”
레테의 목소리가 헤일라에게 물었다.
“헤일라, 날 믿어야 해.”
“믿을 사람이 없어서 저 새끼를? 농담이겠지.”
“난 폐하와 함께 있었어.”
“거짓말.”
“믿기 힘들면 폐하를 알현하러 가도 좋아.”
“전부 한통속이야.”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내가 왜 네 언니를 죽이겠어. 이제 곧 우리 아이도 태어나잖아.”
“그래, 그 애. 날 죽인 남자의 애새끼.”
리안과 레테가 내뱉는 문장이 자꾸 엇갈려 들렸다. 헤일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랫입술을 물고 귀를 꽉 막았다. 리안은 무감한 눈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걸었다. 단순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밀어내는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