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58화 (58/97)

58화.

“무슨 일이 생긴 거요? 설마 부정한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저 시신은 누구지? 대신관이 되기로 했다던 그 신관 아니요?”

“신전에 살인마가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모두가 불안에 떨었다. 신전 안에서는 호위도, 날붙이도 최소한으로만 지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적이 많은 대귀족들이 마음 놓고 있을 수 있었던 건 신전이 살생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전은 무장해제의 신성한 공간이니까.

그런데 아니게 되었다는 걸, 모두가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 버렸다.

“게다가 저 시신은 누가 봐도……!”

살인의 흔적들. 손이 찔리고 몸 여기저기 자상이 가득했다. 정확히 심장을 꿰뚫은 검을 제외하고도 온몸에 투쟁의 흔적이 가득했다. 멀쩡한 건 빼빼 마른 두 다리뿐.

마치 다리를 쓰지 못하는 여인인 걸 알고 공격한 양 상처는 상체에만 그득했다. 잔인할 정도였다.

그리고…….

“왼쪽 눈이…….”

찔린 왼쪽 눈에 모두의 시선이 꽂혔다. 그 눈동자가 리안을, 그러니까 헤일라의 남자에게로 향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안은 무서울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헤일라가 입을 벌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낯선 그가 보인다. 아아, 리안 또한 보고 있는 것이다. 시신이 된 누군가를. 그것의 비어 있는 눈을.

저 검은 눈에 비치는 건 무엇이지?

“헤일라, 우선 돌아가자.”

자신에게 향한 의심 따위는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그는 의연했다.

“아니면 의심이 사실이거나?”

누군가가 헤일라의 귓가에 속살거렸다.

“너 지금 놀라면 안 돼, 응?”

“아기는 핑계야. 알잖아.”

“헤일라?”

“저게 어떤 얼굴인지 너는 알아.”

황금빛 동공이 확장됐다. 아, 헤일라는 그제야 리안을 감싸고 있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희열.

“헤일라, 살려 줘.”

레테가 속살댔다. 헤일라는 리안을 한 번 보고, 언니가 분명한 시신 쪽을 다시 한번 봤다. 신관들이 급히 씌워 둔 흰 천이 붉게 물들어 갔다.

“언니…….”

헤일라의 몸이 허물어졌다. 어디선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점점 멀어진다. 그게 언니의 음성이었는지, 리안의 음성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헤일라는 그대로 쓰려져 잠들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커다란 손이었다. 제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굳은살이 박인 손. 헤일라는 그것이 리안의 것임을 눈치챘다.

“다 괜찮아질 거야.”

이 상황에 이렇게 말할 이는 한 명뿐이니까.

“괜찮아. 괜찮아, 헤일라.”

뭐가? 헤일라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언니가 죽었다.

아니, 언니가 죽었나?

정말로?

혼몽함에 허우적대던 헤일라는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리안을 쳐다보지 않고 시선을 천장으로 향한 채였다.

“……언니는.”

항상 성실히 답하던 남자는 조가비처럼 입을 딱 다물고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리안.”

헤일라는 다시 묻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잠시 난감한 기색을 보이고 한숨을 쉬었다.

“범인을 찾고 있어.”

“죽은 거야?”

“…….”

“정말 죽었어?”

작은 손가락 사이사이에 리안의 손가락이 얽혀 들었다. 리안은 깍지를 낀 채로 헤일라의 손을 제 입가로 가져다 댔다. 뭉근하게 입술이 부벼지는 감각이 전해졌다.

“내가 더 잘할게.”

아. 헤일라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눈물이 한 방울 주룩, 흘러내렸다. 리안이 엄지로 눈물을 훔쳐 주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왜, 왜…….”

“그건 알 수 없어. 하지만 곧 밝혀지겠지.”

리안은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했다. 헤일라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의 낯을 마주했다. 리안은 온화함과 근심이 반반 섞인 얼굴로 애써 웃었다.

“걱정하지 마. 네 가족이야. 네 가족을 죽인 치는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아.

헤일라의 몸이 바짝 굳었다. 그의 웃옷에 달린 은색 단추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레테가 죽었고, 리안은 자리를 비웠으며, 리안의 옷은 바뀌어 있었다. 온몸이 난자되어 있던 레테의 시신이 떠올랐다.

범인의 옷은 분명 피투성이가 되었겠지? 어떤 가능성이 그녀의 머릿속을 꿰뚫었다. 끔찍한 의심이 빼곡히 들어차기 시작한다.

그는 조금 더 쉬라고 했다. 아기가 많이 놀랐을 것이라고. 문제는 자신이 모두 해결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만 계속했다. 아기에게 어머니라는 말을 각인시키듯, 또는 누군가에게 세뇌하듯 반복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헤일라를 진정시키는 데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자극하는 행위였다. 헤일라가 손을 발발 떨며 허우적댔다. 그를 떨쳐 내려 바둥대는 모양새였다. 그의 살점을 긁어내고 주먹으로 얼굴을 쳐도 리안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들어왔다. 파이라였다.

“신관 미아르가 독대를 청합니다.”

심문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리안은 헤일라를 흘금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리안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는 그 속의 불신을 기민하게 읽어 냈다.

그러나 웃었다. 전혀 초조해 보이지는 않았다.

“귀가는 독대 이후에만 허한다는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래.”

무려 대신관의 죽음이었다. 쉽게 신전을 빠져나갈 수 있을 리 없다. 리안은 한시라도 빨리 헤일라를 저택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금방 다녀올게.”

리안은 파이라와 헤일라를 두고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헤일라가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리안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눈물이 떨어져 그의 등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 * *

“진짜 죽었네.”

리안은 옮겨진 레테의 시신을 무감하게 내려다봤다. 그 옆에 있던 미아르가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리안 님, 아니, 휴리트 공작. 정말 당신이 죽인 게 아니라고요?”

“아닌데.”

그는 짤막하게 대답한 후 나른하게 한숨을 쉬었다. 어딘지 모르게 사냥을 끝낸 포식자 같기도 하였다.

“그 시간에 뭘 하고 있었죠?”

“폐하를 알현하고 있었지. 머리가 나쁜가?”

미아르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확실히 그랬다. 황제도 리안과 함께 있었다고 이야기했고 황제의 시종들도 그렇다고 답했다. 그녀는 늘어트린 적발을 마구 헤집으며 입술을 물어뜯었다.

“이런 망할…….”

그녀는 지금 신전 안에 있던 모두를 하나씩 불러들여 심문하고 있었다. 말이 심문이지 그냥 무얼 하고 있었는지를 묻는 정도에서 끝이었지만,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했다.

무려 살인이었다. 살인! 신전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잘된 일 같은데.”

“무슨.”

“너한테도, 나한테도.”

짧은 침묵이 둘 사이에 머물렀다. 리안이 레테의 시신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게 죽었으니 이제 새로운 신관이 나타나겠지. 너도 골칫덩이가 사라졌으니 차라리 편하다 생각하고 있지 않나?”

“그건……!”

“네가 죽인 건 아니고?”

“아니에요! 물론, 물론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리안이 미아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알잖아요. 신관끼리는 살인할 수 없다는 거.”

“그런 규율에 얽매이는 인사던가, 네가.”

“그래요. 아니죠.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살인 쇼를 벌일 만큼 위험한 발상은 안 해요. 이건 신전의 입지가 뒤흔들릴 수도 있는 일이라고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사람을 죽이거나 죽이는 일에 가담하면 끔찍한 광증에 시달려 그 흔한 살수들도 행동하지 않는 공간.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신성한 공간이라 여겨졌다. 그런데 대신관의 임명식 날 대신관이 될 여자가 죽어 널브러졌다. 이는 신전의 명예에 큰 타격이었다.

“여하튼 시신의 왼눈이 칼에 찔려 있어요. 리안 님도 의심을 피해 갈 수는 없을걸요. 무엇보다 그 아가씨, 헤일라 님…….”

“의심하겠지.”

그럼 어떻게? 미아르는 리안에게 묻듯 그를 응시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겨 시신과 조금 떨어져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걸치고 있는 로브가 출렁이며 걷히고 웃옷의 은색 단추가 조명을 받아 반짝, 빛이 났다.

“상관없어. 이제 헤일라한테는 나뿐이거든.”

“당신 정말 미쳤군요.”

미아르가 진저리 쳤지만 리안은 달리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믿어 줄 거야.”

믿지 않으면 스스로 미쳐 버릴 테니까. 헤일라에게 끊임없이 결백을 속삭이면 그녀는 결국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정하게 어르면서 오랜 시간 길들이고 아이를 여럿 안겨 주면 안정될 게 분명하다. 리안은 그리 믿었다.

무엇보다 헤일라는 리안을 사랑하지 않나. 사랑은 그런 것이다.

리안은 불현듯 기분이 좋아져 미소 지었다. 그때 둘이 있는 방의 문 건너에서 소리가 들렸다.

“헤일라 님께서 오셨습니다.”

다음 심문 순서는 다른 귀족이었다. 헤일라는 리안의 심문 뒤에 바로 저택으로 귀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왜 여기에.

리안과 레테 모두 의문을 품었다. 리안이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배를 감싸 안고 서 있는 여인은 헤일라가 맞았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얬다. 그녀의 옆에는 파이라가 곤란한 낯으로 서 있었다.

“나도 심문받으러 왔어.”

“무슨 소리야?”

“누가 죽였는지 조사하고 있다며.”

“넌 안 받아도 돼. 이제 나랑 집에 갈 거야.”

“네, 헤일라 님은 그때 방에 계셨던 게 완벽히 입증되어서요. 딱히…….”

“아니.”

헤일라의 단호함에 둘의 입이 닫혔다.

“그럼 확인이라도 할래.”

“헤일라.”

“리안, 나가 줘.”

그녀는 리안 쪽을 보지 않았다. 오로지 흰 천이 덮여 있는 시신에만 집중했다. 리안은 약간 충격을 받은 듯 얼었다.

“그건 안 돼. 넌 지금…….”

“리안.”

“…….”

“널 믿고 싶어.”

다시 한번 나가라는 명령이 그에게 떨어졌다. 리안은 잠시 숨죽이고 있다가 헤일라를 지나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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