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물론 모두가 거리를 두라고, 보통 위험한 인사가 아니라고 만류하는 데에도 다가간 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테다. 공작의 마음에 들고, 그의 살기에 눌리지 않을 자신.
그러나 한순간의 겁박으로 타이런 후작은 자신의 만용을 깨달았다. 그의 표정이 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두려움과 후회가 반씩 섞인 얼굴은 퍽 볼 만했다.
미아르는 후작에게 눈인사를 한 뒤 살짝 빗겨 지나쳤다. 그리고 리안의 뒤통수에 대고 차분하게 말을 걸었다.
“공작 각하.”
그는 턱을 약간 틀어 미아르를 응시했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리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서는. 미아르는 그의 방종을 탐탁잖아 하면서도 상냥함을 유지했다.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번에 출타하신 일에 관해서요.”
미아르는 리안의 옆에 딱 붙어 서 있는 헤일라를 흘긋 눈짓한 뒤 리안과 눈을 마주쳤다. 무언의 신호였다.
헤일라 님이 들어서 좋을 건 없는 이야기겠죠?
“헤일라. 잠시만 다녀올게.”
그가 여자의 손을 들어 올려 안쪽 손목에 입을 맞추었다.
“응…….”
헤일라는 누가 보아도 불안에 떨고 있었지만 그를 보채지 않았다. 황제의 명이라 들은 탓이다.
“파이라가 함께 있을 거야.”
“그리고 저도요.”
미아르가 눈을 찡긋댔다. 그녀는 리안 보란 듯이 헤일라의 팔짱을 꼈다.
“우리 꽤 친하다고요. 게다가, 저 남자 정도로 되겠어요?”
리안은 약간 신경이 긁히는 기분이었지만 침묵했다. 오늘은 주제를 모르는 대귀족과 신관 나부랭이들이 신전 안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는 날이었다. 만약 권세를 앞세워 헤일라에게 치근덕대기라도 하면…….
리안은 불쾌함이 차고 오르는 걸 느꼈다. 아무리 많은 벌레를 눌려 죽여도, 주제를 모르는 벌레들은 계속 알을 깠다.
“대신에 다음번 거래에서는 제 편의를 조금 봐주시는 거예요.”
거래. 편의. 미아르는 다음번에 있을 광산 거래를 들먹이고 있었다. 역시, 아무런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 여자는 아니었다. 물론 신전의 권위자가 헤일라 옆을 지키고 있는 건 꽤 편리한 일일 테다. 하지만…….
“미아르 에르단도.”
미아르는 이제 레테의 아랫사람이었다.
“여기에 너 말고 헤일라에게 접근할 인간은 없어. 그래도 다들 머리 굴리는 솜씨 하나는 타고난 치들이라.”
그는 어쩌면 레테의 명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이를 헤일라의 곁에 둘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 내 사람이 하나밖에 없을 것 같나? 그렇게 순진하지 않잖아.”
미아르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세상에나! 저를 이토록이나 박대하시다니. 다시 생각해 보셔요. 우리, 좋았잖아요?”
그 말에 헤일라가 약간 의심스러운 눈으로 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리안은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헤일라의 어깨를 감싼 채 본당을 나섰다. 아무래도 헤일라를 준비된 장소에 데려다 놓은 뒤에야 황제에게로 향할 성싶었다.
미아르는 그 뒷모습을 뚫어져라 보다가 성큼성큼 제게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성난 황소의 발길질과 비슷했다.
“그년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고!”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거친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녀를 모시는 시종은 연신 눈치를 봤다.
“도움은 안 되어도 방해는 되지 말아야 할 것 아냐.”
해 달라는 건 다해 줄 수 있는데도 심드렁한 계집. 무예 잘났다고 그리 고고하게 구는지, 전혀 협조를 하지 않았다. 돈 되는 일을 알려 주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신관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예언도 던져 주지를 않았다.
‘대신관 임명식엔 모두가 참여하도록 하는 게 좋겠어.’
‘싫어? 예언이 필요 없나 보네.’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배고파서 쓰레기통 뒤지던 때로?’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를 올리던 모습이란…….
미아르의 이가 갈렸다.
귀족 아비의 끔찍한 사랑을 피해 도망쳤던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데리고 도망쳤던 자신. 그때의 기억을 아무렇지 않게 들추는 레테가 증오스러웠다.
게다가 레테의 존재 때문에 리안의 괜한 경계를 샀고 헤일라에게 접근하기는 더더욱 불가능해졌다. 미래의 공작 부인을 꼬여내 자신의 편으로 만들 계획이 완전히 날아간 것이다. 덩달아 공작가와 손을 잡아 새로운 사업을 도모할 기회도 사라졌다.
아, 차라리…….
차라리…….
미아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고개를 팩 돌려 걷는 뒷모습이 꽤나 싸늘했다.
* * *
헤일라는 리안이 데려다 놓은 자리에 앉아 미아르에 관해 생각했다. 좋은 관계였다는 의미는 뭘까? 그녀는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리안의 단호한 답을 듣고도 울적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미아르 님과 리안이 이전에 그런, 깊은 관계였던 건가. 아니 어쩌면 지금도…….
망상이 똬리를 틀었다. 그녀는 요즈음 종종 아주 작은 일에도 깊이 매몰되어 우울감을 느꼈다. 가끔은 리안이나 시종들의 표정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였다.
잔뜩 부푼 배를 안고 계속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헤일라는 잠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리안이 옆에 있었다.
“리……안.”
“잘 잤어?”
순간 헤일라의 사고가 정지했다.
여기 어디지. 다 하얗다. 이상해. 무서워.
왜 집이 아닐까?
헤일라는 멍한 정신으로 고개를 휘휘 저어 보았다. 리안이 그녀 모르게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지우고 물었다.
“혹시 신전에 온 게 기억 안 나?”
“신전……?”
그녀는 약간 겁먹은 얼굴로 눈을 끔벅댔다. 곧이어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엉덩이를 들썩댔다.
“아…… 옷, 선물 받아서…….”
“그래. 잘 기억하네. 잘했어.”
리안은 헤일라가 기특하다는 듯 꼭 안았다.
“그런데 왜 여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어.”
목소리에는 약간의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마저 귀여워서, 리안은 웃음 섞인 한숨을 쉬어 버렸다.
“괜찮아. 그냥 쉬고 있었어.”
휘유, 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헤일라는 리안의 품에 파고들어 볼을 부볐다. 요즘 들어 자주 보이는 행동이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안심하면서 나오는 습관 같았다.
“자, 이제 가야 해.”
“어디? 집?”
그녀는 그것을 조금 고대하는 듯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향해야 할 곳이 집은 아니었다.
“리듀카.”
레테를 만나러 가야지. 리안이 귓가에 속살댔다. 굉장히 고대한 사람처럼 조금은 떨리는 음성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헤일라의 흥분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리라.
“……언니.”
“응, 네 언니. 오늘 리듀카에서…….”
“대신관이 된다고 했어.”
“그래.”
헤일라는 언니에 대해 스스로 찾아낸 기억이 뿌듯하게 느껴져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헤일라는 방긋방긋 웃으며 그의 손을 쥐고 일어났다. 그런데 일어나는 순간, 헤일라의 몸이 멈칫했다.
“헤일라?”
“어…….”
뭐지? 묘한 위화감이 그녀를 감쌌다.
“어디 아파? 배가 아픈 거야? 아니면 속이 안 좋아?”
그가 재차 물었으나 헤일라는 도리도리 고개만 돌렸다.
“음, 아냐.”
별일 아니었다. 그냥 뭔가 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을 뿐. 헤일라는 리안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었다. 방을 나가 조금 더 걸으니 조경이 훌륭한 정원이 나왔고, 정원을 지나 우거진 나무 몇 그루를 지나니 사람들 무리가 보였다.
“리듀카야.”
아, 여기. 헤일라는 리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느꼈다. 왜 아니겠는가. 이곳은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끔찍한 기억만 남은 장소였다. 하지만 여기를, 여기를 들어가야…….
“괜찮아.”
그가 헤일라의 배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묘한 안정이 느껴졌다.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테니까. 걱정할 거 없어.”
그래. 괜찮아. 이제 리안은 나쁜 짓 같은 거 안 하니까. 예전 일 같은 건 다 잊어버려도 돼. 헤일라는 끔찍한 기억들을 모조리 구겨서 제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리듀카의 안에서는 정숙해 주십시오.”
한 젊은 신관이 앞에서 주의 사항을 읊었다. 헤일라는 제 머리칼을 꼬며 리안의 가슴팍에 살짝 기대었다. 서 있는 게 힘들었다.
얼른 언니를 보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그때, 리안의 가슴팍, 그러니까 헤일라가 기대고 있는 부분의 오른쪽 단추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아, 맞아.
일순 사소한 변화가 기억났다. 번개를 맞은 듯 찌릿한 느낌.
옷.
붉은색 커프스. 황금색 단추. 원단은 비슷하지만 디테일이 달랐다. 커프스와 단추의 색이 모두 은색이다.
옷이 바뀌었네. 리안의 옷이 바뀌었어.
황제를 만나기 전후, 리안의 옷이 달랐다. 헤일라의 깨달음과 동시에 리듀카의 문이 열렸다. 매끄럽게 열린 문은 순백색이었다.
이후에 펼쳐진 광경. 두꺼운 빛기둥과, 그걸 제외하고는 온통 검은 공간, 아, 그리고…….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비명을 시작으로 모두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오, 신이시여.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헤일라의 시선이 천천히 굴러 다른 사람들처럼 중앙에 닿았다.
리듀카의 정 중앙, 누군가가 검에 꿰뚫린 채로 누워 있었다.
심장과 왼눈에 자상이 남아 있는,
황금빛 머리칼의 여자가.
* * *
“어, 어어…….”
시신의 머리칼 끝자락을 확인한 헤일라가 어깨를 들썩였다.
“어, 저거…….”
“헤일라.”
리안이 그녀를 끌어당기며 시야를 막으려 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헤일라가 그를 억세게 밀어냈다.
“리안, 저거…… 저거, 누구야?”
“진정해. 내가 알아보고,”
“모두 내보내! 젠장, 이런 미친.”
“이게 무슨…….”
“대신관이…….”
“신전에서 어찌 이런…….”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중앙으로 다가가는 미아르가 보였다. 사람들을 인도하던 신관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모두를 바깥으로 내몰려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이는 없었다. 신의 검에 심장이 꿰뚫린 여자. 엉망으로 널브러진 시체를 보고 흥분하지 않을 인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