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56화 (56/97)

56화.

옷을 선물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증표였다. 상대가 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 정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어떤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신호인 것이다.

황제에게 의복을 선물 받고 약속한 자리에 나가지 않는 건 그를 모욕하는 행위가 된다. 하지만 헤일라는 그걸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헤일라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약간 떨었다.

“아냐, 아냐 헤일라. 잘했어.”

리안은 안타까움과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착해라. 그는 메마른 여자의 등허리를 쓸었다.

실제로도 헤일라는 리안의 말을 거스른 게 없었다. 식사도 잘했고 말도 잘 들었다고 했다. 게다가 꼬박꼬박 그를 찾았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 여자가 일국의 황제를 상대로 유연한 대처를 할 수 있었을 리가. 그는 헤일라를 십분 이해했다. 아니, 그는 헤일라가 황제의 뺨을 쳤다고 해도 이해했을 사내였다.

뱀같이 교활한 황제의 술수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헤일라와 나들이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가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며 딱 붙어 있는 헤일라의 모습을 보는 것도 분명 즐거울 테다. 게다가 헤일라의 같잖은 혈육에게 그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있을 테니 더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었다.

“나랑 같이 가면 돼. 그럼 아무 일도 없어.”

“계속 같이 있는 거야? 계속?”

헤일라는 재차 불안해하며 물었다. 리안은 그런 모습에서 저열한 만족감을 느꼈다. 아랫배가 묵직해진다.

“물론이지.”

리안이 헤일라의 옷을 한 꺼풀 벗기며 웃었다.

* * *

그는 충실하게 약속을 지켰다. 아니, 헤일라가 바랐던 것 이상으로 들러붙었다. 황금 단추가 달린 고급 망토와 헤일라가 골라 준 붉은색 커프스는 그가 귀족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리안의 행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경건해야 할 의식 도중인데도 헤일라의 손을 꼭 붙들고 있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헤일라가 더욱 이상하다고 여긴 지점은 그런 추태를 누구도 지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배가 뭉치지는 않아? 조금이라도 안 좋아지는 것 같으면 바로 이야기해야 해.”

“괜찮아.”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주변을 잔뜩 살피는 헤일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안은 끝없이 말을 걸었다.

“어디 아픈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과한 걱정이다. 과보호였다. 분명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헤일라는 얼굴이 조금씩 달아오름을 느꼈다. 자꾸 이렇게 그에게 정신이 팔리면 안 되는데. 여기가 어디인지, 왜 여기 서 있는지 잊어버리면 큰일이었다. 조바심이 피어올랐다.

헤일라는 황제가 공작가에 다녀간 이후로 계속 신전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주입했다. 최근 들어 자신이 했던 말도 곧잘 잊는 그녀로서는 굉장한 노력이었다. 중지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글씨를 써 두고 방 안에 붙여 두기도 했다.

황제님이라고 하니까. 리안의 이모님이라고 하니까. 밉보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이곳은 레테가 사는 곳이다. 헤일라는 언니를 만나서도 바보같이 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언니는 그런 모습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불온한 육신과 영혼을 바쳐 신의 대리인의 이름으로…….”

드문드문 신관의 기도문 읊는 목소리가 들렸다. 헤일라는 그것에 집중하려 안간힘을 썼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황제와 신관들을 제외한 모든 귀족들이 단상의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어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워낙 넓고 높이가 높은 공간이라 리안의 말이 다른 이들의 기도까지 방해하지는 않았으리라. 헤일라는 그리 믿었다.

그녀는 귀찮게 구는 리안에게서 눈을 떼고 신전 중앙 본당을 쭉 훑어보았다. 구경의 목적은 아니었다. 이전에 미아르가 소개해 준 적이 있는 곳이었다. 헤일라는 레테를, 그러니까 신관이 된 언니를 찾기 위해 흘금거렸다.

“누구 찾아?”

리안이 기민하게 눈치챘다.

“레테?”

부정하기도 전에 물어 온다. 헤일라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까닥였다.

“아, 내가 말 안 했구나.”

뭘? 입 모양으로 물었다. 리안은 짐짓 반응을 기대하면서도 여상한 태도를 유지했다.

“레테는 마지막 기도회에서나 볼 수 있을 거야.”

헤일라가 입을 열기도 전에 리안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대신관 임명은 리듀카에서 하는 게 관례라.”

“대신관…….”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단어를 따라 했다. 리안은 흡족하게 웃으며 황금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래. 이제 알겠지? 레테 걱정 같은 건 할 게 못 된다는 거.”

헤일라의 얼굴이 약간 음울해졌다. 그래서 날 찾지 않은 거로구나. 이제는 필요가 없고, 또 대신관이 되는데 나 같은 동생은 걸림돌만 될 테니까. 코끝이 찡했다.

그때 리안이 부른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이제 우리만 생각하면 돼.”

아기. 우리. 그는 그렇게 속삭였다. 헤일라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은 부른 배를 하고 그의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동생의 모습을 볼 레테가 그려져 피식댔다.

“휴식의 시간을 가진 뒤 리듀카의 앞에서 뵙겠습니다. 올해는 대신관 임명식이 있을 예정으로, 모든 방문객이 리듀카 출입이 허가되었음을 밝힙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아들인 귀한 금붙이들을 앞에 두고 의식을 주관하던 신관 하나가 선언하자마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리듀카에?”

“세상에…… 그런 영광을.”

“대신관 임명식과 세느리움이 겹쳐서인가? 허어.”

“아무려면 어떤가! 무려 리듀카인데!”

여기저기서 환희에 찬 감탄사들이 쏟아졌다.

리듀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장소였다. 신전에 입장하여 세느리움을 지내는 이들이 대귀족들이라 하더라도 신관이 아닌 이상에야 리듀카는 너무나 먼 장소였다. 그런 곳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흥분했다. 징그러울 만치 체통을 지키는 부류는 시간이 조금 지나고 헛기침을 하며 체면을 차리려 했지만 이미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른 뒤였다.

미리 언질을 들어 알고 있던 리안은 반응을 살피며 헤일라를 조용히 이끌었다. 쉴 수 있는 휴게 공간으로 가서 얼른 헤일라를 쉬게 하고 싶었다. 별 같잖은 것들의 시선이 그녀와 그녀의 둥근 배에 닿는 것도 끔찍하게 싫던 차였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그때 누군가 그의 앞에 끼어들었다. 타이런 후작이었다. 후작가는 베르디안의 가문을 포함하여 제국에 단 두 개. 하지만 명성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선대 타이런 후작이 상당히 많은 사업을 벌여 두고 수습하지 못해 빚더미에 앉은 건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들인 새로운 후작은 야심이 넘치고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사내라 했다. 최근 남서부의 소국과 독점적인 향신료 수입 계약을 맺어 쌓인 빚을 거의 다 탕감했으며 재정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는 다른 산업에 손을 뻗치고 싶은 눈치였다.

군수산업. 휴리트 가문이 독점적으로 관리하며 지휘권을 갖고 있는 분야였다. 타이런 후작은 리안과 친분을 쌓아 군수산업의 무기 제조 물자를 대고 싶어 했다. 그래서 모두가 두려워하는 리안에게 끊임없이 초대장을 보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날 수 없던 리안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말을 건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능한 이에게 행운만 찾아오지는 않는 법이다.

“예, 그럼.”

리안은 상대가 무안할 정도로 빠르게 대화를 차단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평소 공작께…….”

“아니. 내 아내가 몸이 많이 무거워서 그건 힘들겠습니다.”

그는 제 아내를 소개시켜 줄 마음도 없는지 품 안에 꽁꽁 싸매고 있었다. 귀족 간의 법도나 예의, 그런 것은 개념과 함께 집어 던진 모양새였다. 타이런은 열심히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다음에.”

물러서야 할 때였다. 그는 촉이 좋은 편이었다.

“차후 초대장을 보낼 테니 꼭 시간을 내어 주시지요. 그…….”

애매했다. 누군가는 노예일 것이라 하였고 누군가는 미천한 정부가 될 여인이라 하였다. 그러나 휴리트 공작은 만삭의 여인을 데려와서는 ‘아내’라고 못 박았다.

미쳐 버린 휴리트 공작이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공작 부인과 함께 방문해 주시면 더없는 영광일 겁니다.”

리안이 헤일라 쪽을 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기분이 좋을 때나 보이는 얼굴. 보란 듯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고 싶을 때나 짓는 표정이다. 헤일라는 품 안에서 그걸 확인하고 힐끔 바깥을 보았다. 리안에게 말을 건 멀끔한 남자 하나가 보였다.

아, 눈이 마주쳤네.

그녀는 건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쩐지 상대의 뺨이 약간 붉어졌다. 남자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헤일라는 후작을 관찰하느라 리안을 보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리안이 잠시만, 하고 그녀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후작에게 바짝 붙어 무어라 속삭였다. 돌아와서는 헤일라의 어깨를 감싸 문 쪽으로 이끌었다.

뒤돌아 힐금 본 남자의 얼굴은 상당히 창백했다.

* * *

“눈 한쪽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불편한 일이야.”

“…….”

“조심하지.”

경고를 들은 후작의 몸이 바짝 굳었다. 바로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아르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가까이 있는 심복들만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소리였지만 명백한 무례다.

그러게 조심하라 일렀는데.

미아르는 타이런 후작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둘 다 돈에 환장한 인간들이라 맞는 구석이 아주 많았다. 동업도 하고 담합도 하다 보니 퍽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리안에게 웬만하면 다가가지 말라 일러두었거늘. 자신감이 넘쳐 자만에 닿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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