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55화 (55/97)

55화.

* * *

절제된 호화로움을 두르고 있는 응접실은 적막함이 아주 잘 어울렸다. 다만 헤일라가 그것을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안, 안녕하세요.”

그녀는 스스로가 조금 멍청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방금 했던 인사를 반복했다. 황제, 페이네리아는 앉은 채로 오만하게 헤일라를 훑어보았다. 헤일라는 비쩍 마른 다리로 부른 배를 감당하기 힘들어 고개를 숙인 채로 부축을 받고 있었다.

황제가 허하지 않으면 앉을 수 없었기에 인사를 받아 주기 전까지 계속 서 있어야 한다고 했다. 헤일라는 자신이 서 있는 이유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바짝 긴장했다.

실수하면 안 돼. 리안의 이모님이셔. 황제 폐하라고 했어…… 그녀는 울렁대는 속을 애써 억누르며 침을 삼켰다.

“앉지.”

그런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혹적인 여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황제는 상석의 우측을 턱짓했다. 평소 헤일라를 모시던 노련한 하녀가 의자를 빼 주었다. 아, 폐하를 모셔야 해서 다른 아이를 보냈구나. 노련한 사용인의 침착한 모습에 감탄하며 걸음을 옮겼다. 헤일라는 정해 준 자리에 착하게 앉아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매가 많이 다르군.”

자매? 헤일라가 속에 말로 황제의 말을 따라 했다. 머리가 느리게 돌아가다가 하나의 지점에 꽂혔다. 레테. 언니.

“언니를 아세요?”

“조금.”

페이네리아는 어딘가 언짢아졌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헤일라는 조금 겁먹은 채로, 그러나 멈추지 않고 물었다.

“어, 언니는 잘 지내나요?”

흐리멍덩하던 눈에 약간의 생기가 스몄다. 듣지 못했던 언니의 소식을 들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이 헤일라를 깨웠다. 흥분감이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게 궁금한가?”

“네?”

“생각보다 더 멍청한데.”

움찔. 헤일라의 어깨가 오므라들었다. 헤일라는 페이네리아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녀를 흘금흘금 바라보았다. 귀족가에서 흔히들 말하는 ‘못 배워 먹은’ 행동이었다. 이를 헤일라가 알 리가 없었다. 턱없이 높은 지위를 받은 여인은 왕자의 옷을 입은 거지처럼 어색해 보였다.

“아아, 자네 탓을 하는 건 아니야.”

그건 아니지. 페이네리아는 약간 빈정대는 투로 중얼댔다. 그러나 명백히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헤일라는 그 간극을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앞으로는 그렇게 말하면 못 써.”

헤일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조급할수록 누구보다 여유로운 척할 줄 알아야지. 그게 귀족이란다.”

“아…….”

“그렇게 궁금한 걸 바로 묻는 귀족은 없어. 보통 선물을 내밀거나 비슷한 화제를 꺼내서 상대가 입을 열도록 유도해. 적당히 맞춰 주는 게 상대방의 미덕이기도 하고.”

“네, 네에…….”

황제는 웃으며 잘 기억해 두라고 이야기했다. 헤일라의 머리통을 부드러이 톡톡, 두드려 주는 행위가 다정해 보였다.

“전할 말이 있어서 온 것뿐이니 걱정 말게.”

언니에 관해서는 이야기해 주지 않으시는구나. 헤일라는 약간 의기소침해졌지만 이를 티 내지 않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에, 하는 목소리가 꽤 명료했다. 페이네리아는 그나마 말을 잘 듣는 모습에 기분이 풀렸는지 살짝 웃었다.

“그럼 자네들은 나가 봐.”

“……폐하.”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군.”

휴리트 가의 하녀들은 모두 바짝 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황제의 시녀가 도끼눈을 뜨고 그런 그들을 쳐다봤다.

“여기서 당장 목을 따이고 싶은가?”

황제의 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하녀들은 어쩔 수 없이 방에서 나갔다. 방에 남은 건 페이네리아와 헤일라, 그리고 황제의 시녀 둘뿐이었다. 헤일라는 저도 모르게 눈치를 보며 고개를 슬슬 숙였다.

“곧 신전에서 세느리움이 있는 건 알고 있겠지.”

“아.”

세느리움의 날. 십 년에 단 하루 있는 날이었다. 신에게 경배를 올리는 날. 신전의 신관들과 고위 귀족들이 세니르 신전에서 제를 올리는 행사였다.

타론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로, 이날만은 모두가 풍족하게 놀고먹었다. 황궁에서는 술과 식량을 양껏 풀었고 신전에서는 거액을 기부한다. 사람들은 신전 앞에 잔뜩 모여 자신의 염원을 중얼댄다. 그런 날이었다.

“거기에 와 주어야겠어.”

“어…… 저는.”

“곧 출산일이 아닌가? 거기서 둘의 혼인을 발표하며 성대하게 기도를 드리면 좋겠는데.”

“…….”

“너무 어려워하지 않아도 돼. 난 리안의 어미와 다름없는 이거든. 그 아이의 혼인이니 내가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게 당연하잖나.”

“네…… 그런데 리안은…….”

“그 전날까지는 올 테니 걱정 마. 일은 거의 다 끝나 가는 단계라고 보고받았거든.”

내가 그 정도 알아볼 능력은 되어서. 그녀가 매력적으로 웃었다. 헤일라는 애써 웃음을 따라 해 보았지만 눈은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불편하다. 어렵다. 맹렬함을 담은 눈빛과 마주하자면 골이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아, 사흘 뒤야.”

“네?”

“저택에서만 싸고돌아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하는 것 같기에.”

헤일라가 달아오른 뺨을 머리칼로 가리려 고개를 약간 숙였다. 황제의 시녀가 만류하려고 귓속말을 하려 다가가는데, 황제가 손짓으로 그 움직임을 물렸다.

“내 조카님의 허물이지. 자네가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야.”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황제가 미소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처럼 황금색 드레스가 물결치며 내리깔렸다. 그에 맞춰 황금색의 귀걸이가 짤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아름다웠다.

곧바로 나갈 것 같았던 페이네리아의 눈이 어디에선가 멈췄다. 침대맡에 있던 꽃이었다.

“라가스타.”

“아, 저게, 어…….”

“해독에 좋은 꽃이라지. 리안이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른가 본데. 구하기 힘든 해독 꽃이거든.”

“네에…….”

“그런데 이거, 꽃말이 뭔지 알고 있나?”

“행복…….”

리안이 말해 주었다. 헤일라는 혹여 틀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페이네리아는 멍하니 꽃만 보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야.”

“아니에요?”

“그래. 그건 신전의 치들이 몇백 년 전에 날조한 거야.”

신전의 의술을 관리하는 집단. 그들은 약에 쓰이는 풀떼기들까지도 신이 내린 것이라는 명목을 내세웠다. 신의 베풂은 항상 고고하고 아름다운 것. 약초들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꽃말은 대대적으로 각색되었다.

헤일라는 그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가 동한다.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다.

“진짜는 신전과 황궁의 고서에만 쓰여져 있지. 나도…… 전해 들은 것뿐이지만.”

아마 리안도 모를걸. 그녀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슬프게 웃었다.

“그럼, 그럼…… 진짜 꽃말은 뭐예요?”

헤일라는 분위기를 약간 바꿔 보려고 애써 활달하게 물었다. 그러나 황제는 어딘가 뒤틀린 말투로 답했다.

“거짓과 배신.”

적발을 귀 뒤로 넘기는 팔목에서 짤랑, 하고 팔찌가 흔들린다. 아, 진짜…….

예쁘다. 헤일라는 금세 멍해져서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옷을 보내지. 입고 오도록.”

페이네리아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던 헤일라는 약간 당황하여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 따라 일어났다. 인사하는 몸이 부른 배 때문에 약간 기우뚱했다.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살의가 헤일라의 배에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그러나 헤일라는 고개를 숙이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에 뵈어요.”

부드러운 인사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황제는 그대로 묘한 침묵만 남기고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황제의 선물인 드레스와 장신구들이 저택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하루 뒤, 삼 일째.

리안이 전장에서 돌아왔다.

* * *

페이네리아가 다녀간 지 이틀 만이었다. 리안은 딱딱한 갑옷을 입고 있지도, 얼굴에 핏자국을 달고 있지도 않았다. 제 여자에게 보이는 모습은 완벽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사내였으니, 저택에 도착하기 전 다른 곳에 들렀으리라. 파이라는 헤일라의 뒤에 서서 생각했다.

“헤일라.”

저택으로 들어선 리안은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는 헤일라를 보고 걱정스러움을 담아 그녀를 불렀다. 헤일라는 약간 풀이 죽어 있는 채로 그에게 다가갔다.

“늦어서 미안해.”

헤일라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약속한 날보다 훨씬 일찍 돌아왔는걸.”

틀어 올려 묶은 금빛 머리칼이 찰랑댔다. 리안은 한숨 쉬듯 웃다가 발그레한 뺨을 쥐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무슨 일은 없었고?”

그는 다 안다는 낯이었으나 헤일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뒤에 있던 사용인을 슥 훑어본 리안은 헤일라에게 귓속말했다.

“들어가자.”

“응, 응.”

방에 들어와서도 그는 다른 말이 없었다. 몸이 괜찮은지, 아기는 잘 있는지 배를 쓰다듬고 입을 맞춰 줄 뿐이었다.

“리안…… 응, 흣,”

손길이 사타구니를 더듬자 헤일라가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리안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왜 그래?”

“세느리움에 가야 한대.”

그녀는 막막하다는 듯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귀족들이 어떤 방식으로 의식을 치르는지, 어떻게 축제를 즐기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넌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 아기가 태어나면 정식으로 절차를 밟을 예정이니까…….”

그는 짐짓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이미 지방 귀족의 아래로 양녀 입적까지 마쳐 놓았다는 희소식도 속삭여 주었다. 그러나 헤일라는 입안의 살을 잘근 물었다. 초조함의 표현이다.

“옷, 받았어…….”

“옷?”

의외의 상황에 리안의 입매가 굳었다. 헤일라가 눈을 흘깃대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품 안에 있는 여체가 돌처럼 딱딱해진 걸 느끼고 리안이 표정을 풀었다.

“나 잘못했어……?”

벌 받는 거 싫어…… 헤일라가 중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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