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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54화 (54/97)

54화.

이상하다. 헤일라는 그 말을 두어 번 반복했다. 그리고 수마 속으로 자신을 잠갔다. 리안은 잠든 헤일라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커튼 사이의 빛이 길게 늘어져 헤일라의 고운 얼굴을 반으로 갈랐다. 아름다움에 어쩐지 가슴이 아렸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리안은 헤일라가 했던 것처럼 단어를 입안에서 여러 번 굴렸다.

나를 생각했다고. 미친 모습까지도 궁금했다고…….

리안의 검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헤일라…….”

심장이 크게 뛰었다. 리안이 고개를 천천히 내려 그녀의 닫힌 눈꺼풀에 입 맞췄다.

“이전이랑 같아 보였구나.”

천진하게 잠든 연인의 모습을 훑던 남자가 혀로 제 아랫입술을 빨았다.

“다행이다.”

그가 입 맞춘 눈은 왼쪽 눈이었다.

* * *

“헤일라에게는 네가 말했나?”

“……예.”

파이라는 바짝 긴장했으나 리안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 말았다. 여자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라도 언질을 준 것은 제 잘못이 맞았다. 그런데도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찝찝했다. 어느 정도의 구타까지는 예상하고 있었는데.

파이라가 은근히 리안을 살폈다. 눈치를 보는 것이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리안은 나긋한 어조로 뜬금없는 말을 했다.

“상관없대.”

충실한 심복은 답하지 않고 앉아 있는 주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서워하지도 않았어. 다 알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감동에 젖은 듯도 하였다. 파이라의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일순 리안이 사람을 죽일 때의 표정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삼 년간 리안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리안이 미쳐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다.

리안 휴리트는 사람의 왼눈에 집착하다가 결국은 이성을 잃고 파내는 광증에 시달렸다. 처음에는 광증이 상당히 산발적인 양상을 보여 일상생활도 불가했다.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다가도 광증이 도졌으니까.

결국에는 광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죄인들을 저택의 지하로 몰래 이송해 도륙하곤 했는데, 그러지 못하는 날이면 반 미쳐 날뛰었다. 아무도 모르게 시신이 되어 저택을 나간 사용인도 꽤 되었다. 밤이 되면 시종들을 모두 내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미 리안이 저주받았다는 사실이 소문으로 돌기는 했지만 소문이 소문인 것과 사실로 입증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최대한 빨리 헤일라를 데려오려 했던 리안은 계획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제 손으로 사랑해 마지않는 여인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헤일라를 살펴. 그리고 닿은 것들은 전부 여기로 데려와.’

물론 그 시간들 속에서도 정상적인 방식으로 여자를 돌보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감히 만지지 못하는 연인과 닿은 이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아니, 어쩌면 신체 조각을 모으며 헤일라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갈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잠시나마 그녀와 닿았던 것들을 애틋하게 쓰다듬곤 했으니까.

아무튼 그는 최대한 빨리 연인을 데려오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뭐더라. 파이라의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 끔찍한 과거를 회상하면 언제나 얼굴을 펴기가 힘들었다.

리안이 처음으로 선택한 장소는 전장이었다. 피비린내가 가득 찬 곳에서 수백의 목을 베어 내고 그보다 더 많은 안구를 적출 해낸 뒤에야 안정을 찾았다. 그는 그곳에서 광기를 짓누르는 훈련을 감행했다. 물론 사람의 머리통을 산산이 으깨 놓기도 했고, 눈알만 깔끔하게 도려내는 방법을 배운답시고 죄인들로 실험을 하기도 했지만 효과는 있었다.

그래 놓고 광증을 참아 낼 때마다 곧 헤일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아주 기뻐했다. 손에 피를 가득 묻히고 웃는 모습은 기괴했다.

그러나 언제나 복병은 존재하는 법.

헤일라.

헤일라가 가장 큰 문제였다.

어느 날 베르디안이 리안에게 선물이랍시고 금발에 금안을 가진 여인을 보내왔다. 반쯤 친우의 반응을 살피려는 수작이었을 테다. 여자는 리안의 침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맞이하고, 자연스럽게 옷을 벗었다.

다행히 전장을 다녀온 직후의 그는 광증이 가라앉아 안정적인 상태였다. 그래서 파이라는 리안이 여자를 적당히 밖으로 내보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야 했다.

헤일라와 같은 머리 색에 같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시신이 된 채로 저택을 나갔다. 그제서야 리안과 파이라는 무언가 잘못되었다 직감했다. 제국에서 쉬이 찾아볼 수 없는 금발의 금안. 그것이 리안을 자극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비슷한 인간을 구해 와.’

참을성이 동난 리안은 인간을 구하기 시작했다. 금발에 금안. 또는 헤일라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죄인들을 모았다. 그리고 실험을 시작했다.

서른두 번째 인간이 죽어 나갔을 때 즈음에서야 리안은 원하는 답을 얻었다.

헤일라는 광증을 자극한다.

왜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신전의 저주에 관한 자료는 표본이 극히 적은 관계로 거의 없다시피 했다.

리안은 헤일라를 불러들이기 전까지 매일 밤 지하에서 금발에 금안을 가진 인간을 하나씩 죽여 왔다. 가끔은 안구만 적출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며 상해를 입히지 않게끔 조절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파이라가 헤일라를 데려온 날 그녀에게 경고를 아끼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헤일라라는 여자는 특별했다. 공작의 광증을 증폭시키는 자극제와 다름이 없었다.

고로 이 남자가 가장 파내고 싶어 하는 눈알은 아마도 연인의 왼쪽 눈알일 테다. 과연 그것을 알고도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파이라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이제 슬슬 출발하셔야 합니다.”

파이라의 재촉에 리안이 작게 혀를 찼다. 그러나 못 들은 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레시티움의 군대가 타론 제국의 국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시간을 끌 만큼 끌었으니 이제는 가야 한다.

게다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그래.”

리안은 부러 헤일라가 자는 채로 두고 나왔다. 분명히 깨어 있는 모습을 보면 그냥은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리안은 그대로 방을 나서서, 아이를 품은 제 여자가 자고 있을 방문을 힐긋 바라보고 걸음을 떼었다.

스무날. 스무날 안으로 필요한 만큼의 피를 뽑아내고 헤일라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 * *

주인이 떠난 저택은 조용했다. 특유의 음산함이 죽죽 늘어지기는 했지만 모두가 평화롭다 여겼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도, 여자가 비명을 지르는 일도 없었으니.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불안에 떠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리안이 안 와요…….”

“시일이 조금 더 걸린다고 합니다.”

“언니도…… 답장이 없어요.”

“내일은 올 겁니다.”

“오늘은요?”

헤일라는 정원에 앉아 우울하게 물었다. 하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지만 헤일라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 앞에 놓여진 찻잔이 유독 외로워 보였다. 꽃보다 푸르른 녹음을 더 선호하는 그녀의 취향대로 정원은 생기가 가득했지만 헤일라는 기가 팍 죽어 있었다.

“식사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식사를…….”

“절 버린 건 아니겠죠?”

“헤일라 님.”

“언니는, 언니는 어쩌고 있어요? 정말 절 안 찾아요?”

늘어져 있는 하녀들 모두가, 속으로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겨워하고 있었다. 열흘 가까이 같은 질문과 답변의 반복이었으니.

그러나 누구도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비굴하리만치 다정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사용인들이 헤일라의 주위에 줄지어 서 있다. 어딘가 기괴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헤일라는 이를 눈치챌 여유가 없었다.

“흐윽…….”

조용한 울음이 터졌다. 전담 하녀의 얼굴에 옅은 금이 갔다. 그녀는 떨리는 입매를 애써 끌어올려 헤일라의 옆에 바짝 붙었다. 어딘가 초조함이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울면 아기님이 놀라십니다. 진정하세요. 주인님과 레테 님 모두 곧 돌아오실 거예요.”

“아기?”

아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헤일라의 눈물이 뚝 멈췄다. 그녀는 아기의 존재를 처음 들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이 짓도 열흘째 반복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용인들이 이 연극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아니, 조금은 필사적으로.

“예, 아기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진정하세요.”

입술이 우물우물 움직인다. 하녀는 능숙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아기님이 계신데 리안 님이 헤일라 님을 버리실 리가 없죠. 레테 님도 헤일라 님이 아기를 무사히 낳으면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고요. 후계만 낳으시면 명실상부 공작 부인이 되시니 모든 게 안정을 찾겠지요.”

“정말요?”

“물론입니다. 제가 누구 앞이라고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헤일라의 고개가 아래로 투욱 떨어졌다. 애원에 가까운 하녀의 권유가 계속되었다. 찬 바람을 오래 쐬면 아기에게 좋지 않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식사를 해야 아기가 잘 자란다, 리안이 일러둔 말을 잘 들어야 그가 금방 돌아온다…….

헤일라는 하녀의 말을 듣고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삭이 된 몸은 쉽게 휘청였다. 허우적대기 전에 잡아 준 하녀들 덕에 그녀는 어기적어기적 걸어 방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식사 전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피곤하고 피곤했다. 방금까지 하녀와 무슨 이야기를 한 것 같았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뭉그러트리고 침상에 아무렇게나 누웠다.

누군가 몸 위에 포근한 이불을 덮어 주는 게 느껴졌다. 자세가 불편해 몸을 뒤척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나고, 지나고…… 꿈인지 망상인지 모를 형상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쉭, 쉭 하고 지나가는 장면들 속에는 그녀의 부모, 레테, 마을 사람들, 그리고 리안까지 있었다. 그들은 웃고 있다가도 찡그렸고 찡그리다가도 울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마지막은…….

새빨간 피를 뒤집어쓰고…….

“헤일라 님! 일어나셔요!”

끔찍한 잔상의 허상이 절정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즈음, 누군가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아, 현실이구나. 헤일라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안도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가 낯설다.

평소 자주 듣던 하녀의 음성이 아니었다. 좀 더 젊고, 어리숙하고,

“황제 폐하께서 오셨어요!”

다급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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