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 *
“갔어?”
“응.”
베르디안은 따분함이 묻어나는 나른한 목소리로 의자에 팔을 괴었다.
“화났어?”
레테는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남자의 질문과는 다르게 레테는 평온해 보였다.
“그냥 그런 것 같아서.”
“글쎄.”
그녀는 미묘하게 질문을 피해 갔다. 베르디안은 약간 떠보는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그 얘기도 했어? 널 화나게 한 년 말이야.”
“아니.”
“왜?”
레테는 베르디안이 개처럼 끈질기다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동생 생각해서?”
쓸데없이 냄새를 잘 맡는다는 점까지 개 같았다. 레테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신호로 눈을 감았다. 머리를 뉜 베개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까칠하긴.”
베르디안이 이야기하는 건 배달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녀가 타센에게 죽이라 언질을 남긴 여자.
마리라는 배달부는 언제나 자신을 멸시하고 조롱했다. 사창가를 구르던 더러운 창녀, 동생의 피를 빨아먹는 구더기 같은 여자라 혀를 찼다. 레테가 말을 하지 않아 헤일라는 알지 못했지만 매일 빠짐없이 신문을 던지고 나가며 한마디씩 더러운 말을 얹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레테에게 폭언을 퍼붓는 걸 고된 하루의 낙 정도로 생각하는 여자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랬다. 하지만 레테를 오물 보듯 보던 마리는 레테가 건넨 목걸이는 귀하디귀하게 품 안에 구겨 넣었었다.
꼴이 얼마나 우습던지. 마리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레테가 한 사람을 수렁으로 빠트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레테는 무력한 병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 여겼으니까.
그래서 죽은 것이다. 그래서.
하지만 그게 과연 마리라는 여자의 잘못일까. 사실 모두가 그렇지 않았나. 동생마저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머저리로 생각했는데.
헤일라를 떠올리느라 감은 눈이 찌푸려졌다. 레테를 본 베르디안이 침대 맡에 앉았다.
“네 주변에는 언제나 죽이고 싶은 인간들뿐이야.”
그가 레테의 옆머리를 다정히 쓸어 넘겼다. 다 안다는 듯한 말투가 묘하게 거슬렸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레테는 약간의 애틋함이 묻은 손짓을 즐기기로 했다. 다정함이 어울리지 않아 더 서투르게 느껴지는 남자들의 손길은 싫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싫어하지 않을 만한 것이 그것 말고는 없었다. 입안이 썼다.
묘한 변화를 알아챈 베르디안이 곰곰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죽여 줄까?”
“야.”
그녀의 부름에 약간 흥분한 남자가 레테를 내려다봤다. 어느샌가 레테의 눈이 뜨여져 있었다. 와락 짜증을 내는 듯도 하였다.
“응?”
“너나 먼저 뒈져 버려.”
짜증이 난다는 투였다. 베르디안은 가볍게 투정 부리듯 이불에 얼굴을 부볐다.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혼이 나 버렸다.
“너무해.”
“…….”
“그래서, 다음에는 언제 또 볼래?”
“뭘.”
“동생 말이야. 좋아하잖아.”
“방금은 죽여 준다더니.”
“네가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
“안 좋아해.”
“좋아해.”
“그 입 좀…….”
“나한테까지 거짓말할 거 없잖아.”
레테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베르디안이 입을 비죽거렸다.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베르디안은 여자의 심기를 살피며 조심조심 손을 쓸었다. 엄지로 팔목을 부드러이 누르는 손길이 뭉근했다. 몸을 섞기 전 남자가 은근히 건네는 신호이기도 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의 움직임은 레테의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에 멈췄다.
“걘 이제 안 봐.”
“진짜?”
주인을 독차지하게 된 강아지처럼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좋아하지 마.”
“아닌데.”
이죽대는 낯이 얄밉기 짝이 없다. 베르디안이 레테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진짜 오늘이 마지막인 거야? 왜?”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네 일을 내가 모르는 게 말이 돼?”
“미친놈.”
“응, 대체로 그런 편이지.”
그래서, 왜? 왜 그런 건데? 남자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는 이제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와 레테의 목에 제 얼굴을 부빗대기까지 했다.
레테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허공을 보는 여자의 머릿속을 따 보고 싶다. 베르디안은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눈 아래가 약간 발갛게 물들었다. 그때 레테가 약간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죽을 거야.”
베르디안의 몸이 일순 바짝 굳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웃고 있으나 명백히 이채가 서린 얼굴이었다.
“무슨 소리야?”
“…….”
“예언이라도 받은 거야?”
레테. 베르디안이 드물게 이름을 불러 왔다. 천천히 목을 빨고 쪽,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레테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가 자신이 빨았던 자국을 핥으며 재촉했다. 그녀가 귀찮은 듯 고개를 돌리자 긴 머리칼을 콱 쥐고 목을 고정했다. 숨이 가빠지는 게 느껴져 레테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야.”
“그럼 뭐야.”
“…….”
“몸도 좋아지고 있잖아. 이제 발작도 안 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모르는 게 있나?”
평소와 다르게 차가운 목소리였다. 상대를 가차 없이 으스러트려 끝을 보는 루데인 후작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레테는 의외의 모습에 조금 웃었다.
움찔.
그의 몸이 떨렸다.
“난 헤일라에게 죽은 사람이 될 거야. 진짜 죽는다는 게 아니라.”
이 바보야.
그녀가 다시 웃었다.
“그걸 위해 네가 할 일이 있어.”
“뭔데.”
“약을 하나 구해 와.”
“하…….”
베르디안은 약간 어이가 없어져 한숨을 쉬었다.
“아주 아주 지독한 수면제야. 먹으면 숨이 옅어지고 맥박도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의술을 모르는 일반인은 죽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네이오라. 레테가 구해 오라고 한 약은 네이오라였다. 면역이 있는 인간이 없을 정도로 지독한 수면 약초. 그런 만큼 제국에서는 구하기도 힘들었다. 신전에서도 취급하지 않아 타국에서 밀매해야 했다.
“그래. 알겠어, 알겠다고.”
그럼에도 베르디안은 순순히 레테의 말에 복종하기로 했다.
“대신에 배신하지 마.”
“배신?”
“내가 없는 사이에 도망이라도 가면 찾아서 죽여 버릴 거야.”
“하하.”
“다른 새끼랑 붙어먹어도 마찬가지야. 그것만 아니면 어떤 병신 짓이든 따라 줄 테니까…….”
베르디안이 어리광을 부리듯 레테에게 안겨 들었다. 그녀는 그것을 무감히 내려 보다가 손을 올려 머리칼을 대충 쓰다듬어 주었다.
다음날, 레테의 충실한 시종을 자처한 남자가 먼 길을 떠났다. 짧지 않은 여정의 시작이었다.
07. 절벽
“헤일라.”
리안은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부축을 받고 나오는 여자를 보고 퍽 놀란 낯이었다. 다정함과 애틋함을 반반 녹여 넣어 누가 보아도 연인을 염려하는 모습이다. 미아르는 가증스러워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자신이 귀족으로서 오래도록 교육받지 않았다면 경멸을 그대로 드러내 버렸을지도 몰랐다.
“왜 이래, 응?”
미아르는 헤일라가 깜찍한 연기에 속아 넘어갈지 궁금해 숨을 죽였다. 헤일라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잡아채 품 안에 넣는 남자에게 몸을 맡겼다.
“레테가…… 무슨 말이라도 한 거야?”
“…….”
“헤일라.”
“언니가.”
그의 얼굴에 약간의 기대감이 스쳤다. 그러나 헤일라는 리안을 한 번 흘긋 올려다보고 다른 말을 고르는 듯 침을 삼켰다.
“언니가, 예언의 능력이 있대.”
헤일라가 바라본 건 리안의 너머에 있는 미아르였다. 신관인 미아르라면 거짓 없이 사실을 이야기해 줄 것이라 믿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우아한 몸짓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예를 갖춘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깜짝 놀랐답니다.”
“네가 직접 듣는 쪽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미아르와 리안이 번갈아 답했다. 헤일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미 모든 사실을 예감한 사람처럼 초연했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대신 잔뜩 겁을 먹은 아이처럼 중얼댈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내가…… 아이를 가졌대.”
말을 마치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 헤일라는 어딘가 매우 지쳐 보였다.
“헤일라.”
“왜 말 안 했어? 왜, 왜…….”
넌 알고 있었잖아…… 헤일라는 리안에게만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로 그를 책망했다. 강렬한 분노보다는 서글픔이 서려 있는 원망이었다.
“……레테가 말했어?”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야기하려고 했어. 레테가 알 거라고는 나도…… 예상 못했네. 많이 놀랐지.”
리안이 헤일라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숨넘어갈 듯 우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어, 어떡, 어떡해…… 흐으, 언니…….”
“쉬이, 괜찮아, 괜찮아 헤일라.”
“언니가, 언니가…… 나 안 본대…… 흐윽.”
“진정해. 진정하고…… 일단 좀 쉬자, 응?”
리안이 그녀를 이끌었다. 사랑스러운 헤일라. 그는 속으로 그렇게 읊조리고 헤일라를 안아 올렸다. 미아르는 그런 둘을 보며 멀리서 눈살을 찌푸렸다.
‘직접 보고 들어야 더 실망할 테니까.’
리안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레테와 헤일라가 만나면 서로에게 큰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리안이 폭로하기 전에 자신의 입으로 제 능력을 밝힐 여자였으니까.
그래서 헤일라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둘이 안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큰 말다툼이 있거나 일방적인 폭언이 퍼부어질 것이라는 건 알았다. 기실 헤일라 이외에 모든 이들이 예상한 일이었다.
‘이제 새로운 가족을 찾을 때라는 걸 헤일라도 깨달아야지.’
우는 건 가슴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번 기회에 둘의 사이가 단단히 틀어지길 바란 것이다. 미친놈.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그리고 미친놈의 술수인 걸 다 알면서 따라 주는 미친년도 상당히 골치가 아팠다.
레테. 차기 대신관이 되어 주어야 할 여자.
리안과 레테 사이에서 잘못 선을 넘었다가 죽어나는 건 자신이다. 그래서 미아르는 불쌍한 헤일라를 그냥 못 본 체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아르가 리안의 말을 거들기 시작했다.
“네에, 다음에 또 오시면 되니까요.”
“응, 레테는 다음에 보자. 오늘은 너무 놀랐어. 힘들지…….”
헤일라는 무어라 위로하는 말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결국 리안의 품에 안겨 신전을 나왔다. 그녀는 이명과 사람의 말소리 사이에서 부유하다가 제 배를 감싸 안았다. 박약한 몸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