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50화 (50/97)

50화.

“네가 나를 버리고 가면 나는 죽을지도 몰라…….”

귓가에 생생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리안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환청이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야. 다 거짓말이야!

그녀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 농락했는지, 어떤 거짓말을 했고 어떻게 배신했는지를 떠올리려 부단히 노력했다. 최선을 다했다.

“헤일라…….”

그럼에도 발걸음은 천천히 느려졌다.

“헤일라…….”

“제발 그만……!”

결국 발걸음을 멈춰 우뚝 섰을 때, 그녀는 홀로 중얼댔다. 눈물과 엉킨 목소리는 형편없었다. 뺨에 덕지덕지 붙은 머리칼이 헤일라를 더욱 야위게 보이도록 했다. 황금색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듯 이리저리 굴렀다.

“못 가, 못 가…… 가면, 가면 언니가…….”

‘네 언니는 죽어.’

“언니가…….”

언니는 죽는다. 리안을 버린 언니가 치료받을 수 있는 방법은 공작에게 기대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리안을 택하면 공작은 언니를 죽인다 했지. 그리고 공작은 리안을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했어! 그게 거짓말이라도…….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난 언니를 버릴 수가…….

“헤일라, 살려 줘.”

나는…….

그녀는 홀로 중얼대다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자신이 미친 듯이 달려온 길이 보였다.

“나는…….”

리안.

헤일라는 그대로 뛰었다.

그만이, 리안만이 헤일라를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서라도 살려 내야 할 사람. 만약의 만약이라 하더라도 그가 죽는다는 상상 따위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돌아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그의 곁에서 죽고 싶었다. 함께 죽는다 해도.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그를 버릴 수는 없다.

헤일라 스스로도 몰랐던 진심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그렇게까지 속았는데도 천치처럼 그를 사랑한 것이다. 유일한 안식이었고 일탈이던 그 남자가.

선택의 순간 헤일라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리안뿐이었다. 언니가 아니라 리안 휴리트 하나만 존재했다.

그렇게, 레테는 밀려났다. 너무나 가뿐하게. 그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녀는 숨 가쁘게 뛰었다. 리안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믿음만 안고 그곳으로 향했다. 리듀카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신이 벗겨진 발에서 피가 질질 흘렀다. 헤일라는 개의치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비명을 지르듯 그의 이름을 부른다.

“리안!”

하지만 헤일라의 선택을 비웃듯 리듀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헤일라는 신의 검에 눈이 꿰뚫린 타센 공작을 보고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엉금엉금 기어 타센을 툭 건드리자 피 냄새가 훅 끼쳤다. 죽은 자의 냄새였다.

“……죽었, 죽었어…….”

누가? 헤일라는 고민할 가치도 없는 사실을 고민해 보았다. 그렇게라도 부정의 여지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알만하지 않은가? 모든 상황이 살인자가 누구인지 가리키고 있었다.

리안. 리안 휴리트가 타센 휴리트를 죽였다.

아비를 죽인 아들.

신전의 저주를 받은 리안.

“안 돼.”

중얼대는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났다. 저주를 받게 된 리안이 패륜아라는 세간의 눈총까지 받아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제국에서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은 중죄였다. 일이 잘못되기라도 해서 극형에 처해지면…….

헤일라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타센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핏자국은 세니르 신전의 기적으로 이미 지워지고 있었다. 남은 건.

짧은 시간이 흐른 뒤 작은 손이 꽂혀 있는 칼을 잡았다. 그리고 고기에 박힌 칼을 꺼내듯 단번에 뽑아냈다. 투둑, 뽀얀 얼굴에 핏물이 두 점 튀었다.

신의 검은 살아 있는 것의 손에 쥐어지자 우웅, 하는 울림을 주었다. 소름이 끼쳤다. 헤일라는 검을 들고 중앙으로 향했다. 여전히 웅장한 빛줄기가 그녀를 반겼다. 빛줄기 안으로 검을 집어넣자 자연스레 빛의 중심부로 검이 올라갔다.

헤일라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죽은 타센이 있는 쪽이었다.

이제 처리해야 할 건 시신뿐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공간에는 시신까지 먹어 치워 주는 편리한 구멍이 존재했다. 헤일라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시체를 끌었다. 몇 번이고 뒤로 넘어지면서 구멍까지 죽어 버린 살덩이를 인도했다.

철퍽.

마침내 고단한 시간이 끝나고 검은 구멍 속으로 공작을 밀어 넣었을 때 그녀는 제 안의 무언가도 함께 잘려 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인의 흔적은 깨끗하게 지워졌다. 리안이 떠난 그 자리를 청소한 것은 다름 아닌 헤일라였고, 그러므로 둘은 공범이었다.

그러나 헤일라 이외에는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공범을 자처한 여자는 이 일을 영영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잠깐 누렸던 선택과 일탈일 뿐이라 자신을 다잡았다.

리안은 죽지 않았고, 공작이 남긴 돈으로 레테를 건사할 수 있었다. 나쁘지 않은 미래였다.

헤일라가 가장 사랑한 게 레테였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리듀카를 나온 헤일라의 얼굴에 붉은 태양 빛이 쏟아져 아름답게 부서졌다.

그녀는 자신의 표정을 아무도 보지 못해 다행이라 생각하며 울었다.

* * *

레테는 그날의 헤일라에 관해 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이 마치 절규처럼 터져 나왔다.

“내가 먼저라고?”

“…….”

“날 가장 사랑해?”

“언니, 난, 나는…….”

“입 닥쳐!”

뼈밖에 남지 않은 두 손이 꽉 쥐어졌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마치 가지밖에 남지 않은 고목의 흔들림처럼 보였다.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분위기. 레테는 아주 오랜 기간 안에 차곡차곡 쌓아 온 무언가를 터트려 내고 있었다.

“넌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지.”

비참함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진심 따위는 알 길이 없을 거라고. 허울뿐인 말로 안심시키면 그만이라고 여겼을 거야.”

헤일라는 아니라고 받아치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아니라고 말한들 의미가 있을까?

레테는 옛날부터 이야기했다. 모든 진심은 결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너는 내 옆에서 진심을 증명해 보이라고.

그러니까 뭐라 변명해도 자신은 레테를 버린 것이 맞았다. 그날 헤일라가 선택한 건 리안이었으니까. 찰나의 선택이 헤일라의 지난날을 통째로 거짓되게 만들었다.

헤일라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사실 나도 그랬어. 그러기를 바랐어. 알기를 바란 적 없어…….”

목소리가 물기에 절어 있었다. 레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동생을 흘긋 보고 시선을 깔았다.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

아, 헤일라는 저게 어떤 얼굴인지 알았다. 마음이 진창에 굴러 이제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게 된 사람의 낯이다. 모든 걸 포기해서 이제는 악도 쓸 수 없는, 그래서 비참한…….

리안에게 이별을 고할 때의 자신도 꼭 저랬으리라.

“언니.”

안 돼. 그녀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언니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면서 매달리고 싶었다. 언니의 가는 팔목을 부여잡고 엉엉 울면서…….

“가. 어디로든.”

버리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목이 콱 막혀 억억대는 소리만 났다.

“놔 줄게.”

언니가 나를 버린다.

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니가, 레테가 자신을 버린다. 언제나 동생이 떠나갈까 전전긍긍하며 분노에 떨던 언니가, 이제는 혈육을 놓아주겠다고.

포기하겠다고 한다. 혼자 남겨 두고 떠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몸도 마음도 넝마가 된 채로 떠나게 만든 것은 나다.

심장 속의 피가 모두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헤일라가 파랗게 질려 갔다.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무릎을 꿇었다. 생경한 종류의 두려움이 그녀를 덮쳤다.

설명하고 싶었다. 무슨 말이든 해서 언니를 설득해야……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을, 언니가 자신을 다시 믿을 수 있도록…….

그런데 어떻게.

자신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데 언니라고 이해해 주려나. 나 때문에 이렇게 된 언니인데 이해해 달라고 할 수 있나?

헤일라가 말은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댔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서 목소리를 내기는 하는데 형태가 없는 소리에서 그칠 뿐이다. 레테는 새하얀 바닥에 무릎 꿇은 동생을 멀거니 바라봤다. 동생은 침대에 걸쳐있는 이불보가 레테라도 되는 양 꼭 쥐고 있었다. 헤일라와 레테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레테의 주의를 끌려고 필사적으로 지껄였다. 대부분이, 언니를 버린 것이 아니라는 둥, 언니를 사랑한다는 둥 하는 말들이었다.

“하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헤일라의 변명을 갈랐다. 레테는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화나게 한 걸까? 또 내가 잘못한 거야? 헤일라가 초조하게 지껄였다.

“언니, 정말로…….”

“어이가 없네.”

레테는 오른손으로 제 뺨의 물기를 걷어 내며 말했다.

“내가 불쌍해?”

“아, 흐, 언니,”

“멍청한 년.”

그녀는 초연하게 뇌까렸다. 그리고 동생에게, 어리석은 헤일라에게 말했다.

“너, 애 뱄어.”

처지를 모르는 혈육에게 알리는 음성치고는 지나치게 무심했다. 헤일라의 몸이 바짝 굳었다. 일순 몸의 떨림이 뚝 멈추고, 입에서 아, 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헤일라가 제 배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진짜 불쌍한 건 너야. 리안 휴리트가 저주에 시달리는 건 알고 있지?”

“…….”

“넌 그 저주가 기껏해야 인간 눈알 파는 정도라고 생각할 거야. 근데 사실 그게 다가 아냐.”

레테가 헤일라의 머리칼을 콱 쥐고 귓가에 제 입술을 붙였다. 무언가를 속살댄다. 말이 이어질수록 몸에서 힘이 빠졌다. 놀라움, 두려움, 막막함, 마지막에는 슬픔이 그녀의 눈동자에 스쳤다.

헤일라는 쥐고 있던 이불보를 놓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선뜻 믿기 힘든 진실이 그녀를 난자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테는 동생의 충격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헤일라의 귓가에 종이 두어 번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테가 시종을 부르는 소리였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헤일라를 부축해 방 밖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무언가 끈이 풀린 사람처럼 계속 무슨 말만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작별 인사를 듣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레테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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