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49화 (49/97)

49화.

“너 때문에 또 레테만 다쳤어.”

누군가가 말했다.

“언니가 널 미워하는 것도 당연하지.”

익숙하지만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 헤일라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귀를 콱 틀어막았다. 언니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도 볼 수 없었다.

“지난 삼 년 동안 언니를 벌세웠어. 그럴 자격도 없는 년이.”

아니다. 언니를 괴롭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니었다. 그냥 도저히 이전처럼은 웃을 수 없어서, 그러면 리안이 떠오르니까. 아니, 사실은 언니 앞에서 웃을 수가 없어서…….

레테에게 냉랭하게 대했던 지난날들이 헤일라를 들쑤셨다. 행동에 증오의 마음이 전혀 녹아 있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그녀는 점점 늪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나쁜 년. 또 귓가에 환청이 울렸다.

이어서 삐- 하는 이명이 헤일라를 지배했다. 그녀는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혼란했다. 오직 누워 있는 언니만 빼고. 그녀의 비어 있는 왼손만 빼고, 말이다.

“내가 다 해결할게.”

귀에서 두 손을 천천히 내린 헤일라가 말했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갑자기 이성을 되찾은 사람 같아 보였지만 기실 정반대였다.

“언니, 이제 다 괜찮을 거야.”

“…….”

“손, 손은, 응.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불편하지 않도록 내가 애쓸게. 리안한테 부탁하면 돼. 착하게 굴면, 응, 리안은 좋은 애니까 분명히,”

“하.”

한숨이 말을 가로막았다.

“이거 완전 애를 반병신으로 만들어 놨네.”

신랄한 욕설이 퍽 생기가 도는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정신 못 차리지.”

레테가 헤일라의 팔뚝을 잡아챘다.

“내 손가락을 자른 건 리안 휴리트지 네가 아니야.”

“…….”

“네가 말을 안 들어서가 아니라, 네가 말을 듣게 하려고 이 짓을 벌이는 거라고.”

“흐, 아아…….”

“고개 숙이지 마!”

다시금 제 귀를 막으려 하자 레테가 그 손을 쳐 내며 일갈했다.

“리안, 그 애를 미워해야지, 응?”

레테는 무언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처럼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까지…….”

그 뒤로 언니가 뭐라 더 중얼거렸지만 헤일라는 듣지 못했다. 이명이 너무 심해 언니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동생의 꼴을 허탈하게 지켜보던 레테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조금 웃었다.

“그래. 넌 이런 애였지.”

목소리에는 약간의 비탄과 슬픔이 서려 있었다.

“헤일라.”

그녀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음에도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해 줄까? 넌 이렇게 괴로워할 필요가 없어.”

“흣, 윽…….”

“네 주변 인간들은 하나같이 다 쓰레기들뿐이거든…….”

옛날이야기를 해 주는 자비로운 어머니처럼, 레테는 느리게 읊조렸다. 헤일라는 덜덜 떨면서도 언니의 이야기가 귓가에 흘러들어옴을 인지했다. 언니를 더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화나게 하지 않으려면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집중하려 최선을 다했다.

“너는 언제나 내가 이곳에서 치료받기를 원했지. 그래서 신전에 매일같이 아침 기도를 다니기도 했고.”

갑작스레 옛날이야기였다. 헤일라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레테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조금 우스웠어. 아니, 재밌었어.”

“…….”

“내가 이미 갖고 있는데, 그걸 언니한테 내려 달라고 신한테 비는 네 꼴이.”

물에 젖은 속눈썹이 빠르게 몇 번 팔랑였다. 헤일라는 레테의 말이 혹여나 환청이 아닐까 하고 언니의 입을 바라보았다.

“나, 사실 예언의 능력을 갖고 있었거든.”

소리를 내고 있는 건 레테가 맞았다. 헤일라는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얼어 있었다. 레테는 그런 동생을 보고도 매끄럽게 웃었다. 공허한 미소였다.

“처음에는 흐릿한 꿈일 뿐이었는데…… 점점 선명해졌어. 네가 식당에서 맞아 다리를 접질렸던 날에도 이상한 꿈을 꿨거든. 그 쓸모없는 물건을 데려온 날도. 그래, 미리 수를 썼어야 했는데 막을 수가 없었지.”

그녀는 약간 음울한 얼굴로 제 다리를 내려다봤다. 헤일라는 멍하니 그 움직임을 따라 눈알을 굴렸다. 근육이 흐물흐물해져 심하게 얇아진 다리의 윤곽이 이불 너머 비쳤다. 그와 동시에, 리안과 처음 만나던 날 아침, 나가지 말라 패악을 부리던 언니의 모습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파드득, 소름이 돋았다.

“그다음, 그다음 일들도…… 전부 알 수 있었어. 그래서 내내 신문을 배달하던 년을 이용해서 공작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일일이 일러뒀지.”

헤일라는 조금의 침묵을 둔 뒤 대답했다. 이제 얼굴에는 핏기가 아예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 자락을 잡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지? 내가 본 편지에는…….”

헤일라는 공작이 내밀었던 편지의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했다. 거기에는 미래의 내용 따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냥 리안이 어디에 머무는지,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정도만…… 리안과 언니가 어떤 거래를 했는지만 쓰여 있었는데.

“멍청하긴.”

“…….”

“공작의 저택을 한낱 배달부가 드나들 수 있겠어? 당연히 널 속여 먹으려는 수작이지.”

레테는 신랄하게 뇌까리고는 헤일라 쪽으로 바짝 상체를 들이밀었다.

“그날 공작은 리안 휴리트가 세워 둔 대역이 제 아들이 맞는지 확인하러 은밀하게 야산으로 향했어. 난 알았고…… 그래서 멍청한 배달부에게 거기서 접근하라고 했어.”

대가가 그 새끼한테 받은 목걸이였던가. 천한 년의 목숨 값치고는 비쌌어. 그렇게 이르는 목소리는 은밀했고 나긋했다. 헤일라의 머릿속에, 날조된 편지 마지막 문장이 스쳤다.

‘그리고 이 편지를 전달한 계집은 조용히 처리해 주시길.’

신문 배달부, 마리를 죽이라 공작에게 한 말.

그 문장만은 거짓된 것이 아니었나 보다. 언니는 정말로 사람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어째서?

헤일라는 정리되지 않는 머리를 붙잡고 애를 썼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언의 능력이 있었으면서 왜 고통을 참고만 있었을까.

애초에 왜 치료를, 왜 신전에 오지 않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언가 이유가 있는 걸까? 그렇겠지? 언니는 똑똑하니까, 예언까지 받는다고 하니까.

헤일라는 애써 호흡을 정리하며 묻고자 하는 것들을 입 밖으로 뱉었다. 물론 생각대로 잘되지는 않았다. 분노인지 당혹감인지 모를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쉽게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왼손이, 레테의 두 손가락이 비어 있었으니까.

“왜, 그랬는데? 왜, 왜, 죽였, 아니, 왜, 신전에 안, 오고, 이제까지…….”

“…….”

“병이, 병이 심해질 때까지 왜…… 죽이지 않아도 되는데, 왜…….”

더듬대는 목소리가 약간씩 젖어 들어갔다. 그럼에도 헤일라는 최선을 다해 제 할 말을 했다.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헤일라의 인내가 부질없음을 비웃듯, 레테는 천진하게 웃었다.

“하하하.”

“언, 언니.”

“넌 언제나 이랬어. 순진한 얼굴로 울면서…… 왜 그랬냐고 물어. 어차피 말해 줘도 이해 못할 텐데.”

“아니, 아니야, 나는, 난…….”

“알려 줄게.”

레테는 동생을 밉지 않게 흘기며 웃었다.

“배달부 계집을 죽인 건 아주 개인적인 일이니 말 안 할 거야. 대신에 다른 거. 그래, 예언자인 사실을 숨긴 이유 정도는 네가 알 권리가 있겠네.”

헤일라가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약한 희망이 스민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희망은 얼마나 쉽게 바스러지는 것들이던가.

“숨기지 않으면 널 묶어 둘 수가 없잖니.”

결국 버림받았을걸. 레테는 세상의 하나뿐인 혈육의 마지막 소망을 짓밟으면서도 웃는 낯이었다. 눈물에 흩어져 언니의 얼굴을 선명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헤일라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웃고 있었다.

“그런, 그런 것 때문에.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겨우?”

“그래! 겨우, 그런, 말도 안 되는,”

나를 신뢰하지 못해서 자신을 망쳤다고. 내가 언니를 버릴까 봐 몸 망가지는 걸 방치했다고?

고통스러웠다. 느꺼운 속이 타오르면서 속에 켜켜이 재를 쌓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나 슬픔 따위의 간결한 감정이 아니었다. 확실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레테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믿으라고, 믿으라고 했잖아.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었잖아…….”

지난했던 과거가 헤일라를 찔러 왔다. 비참함에 적셔지는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견딜 수 있었던 일터, 세상에 찌들어 가며 울었던 날들, 그러면서도 언니 앞에서는 웃었던 자신.

“우리는 가족도 아니었던 거야?”

놀랍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얼굴에 그어졌다. 비참하게.

“무슨 말이든 좀 해 봐……!”

“가족?”

레테가 정면을 보면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언뜻 보인 그녀는 무표정이었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게 가족이야?”

그러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가히 최초라 해도 될 정도로 낯선 모습에, 헤일라가 바짝 긴장했다.

“그럼 넌 내 가족이 아니네.”

“…….”

“헤일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동생과 눈을 마주쳤다.

“난 그날의 너를 알아. 신전에서, 너.”

레테는 울고 있었다.

“다시 돌아갔었지?”

이런 모습은 언니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처량하게 울면서 매달리듯 묻는 모습 따위는.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를 버렸잖아.”

그녀를 울게 만든 건 헤일라 자신이었다. 아찔할 정도의 두통이 몰려왔다.

아. 신이 있다면.

신은 정말로 나의 편이 아니구나.

헤일라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 * *

삼 년 전, 리안을 버리고 신전을 나가던 헤일라는 열심히 달렸다. 달리다가 신이 벗겨진 사실도 모른 채 발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흙길을 밟았다. 그러나 발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통이 있어야 발이라도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었으리라.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리안 휴리트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리안. 리안. 리안. 리안. 리안.

리안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과 찰나의 감정들이 헤일라를 난자했다. 눈물 때문에 눈앞은 잘 보이지도 않는데 리안과의 추억만은 선명하게 펼쳐졌다.

그와 처음 만났던 날, 그의 웃는 모습을 처음 본 순간, 최초의 설렘으로 달아올랐던 뺨의 열감, 사랑한다 속삭였던 남자의 목소리, 나붓하게 휘어지던 눈꼬리와 제 어깨를 쓰다듬던 다정한 손길, 리안이 퍼붓던 사랑…… 그리고 마지막 순간 애걸했던 비참한 얼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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