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하루 이틀 사이에 해독되는 환각제가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상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가 옆에서 무어라 떠들어 대도, 헤일라는 무슨 말인지 인지하기가 힘들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부유하는 단어라고는, 리안, 리안, 리안, 아, 그리고…….
누구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중요한 사람 같은데. 잊어서는 안 되는 이름 같은데…….
머리가 꽉 막힌 듯 답답했다. 그러나 묻힌 인간에 관해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 리안의 질문에 대답을, 대답을 해야 한다. 아, 리안이 무언가를 또 물어 왔다.
대답 못하면 화낼 거야. 혼나. 혼나는 거 싫어.
헤일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시중드는 일에 심취한 리안은 눈치채지 못하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맛있어? 이제는 속 안 울렁거려?”
작은 머리통이 천천히 아래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들렸다. 그녀의 최선이었다. 기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대답부터 한 것이나, 리안의 얼굴은 더욱 밝아졌다. 최근에 속이 메슥대어 음식들이 들어가는 족족 토해 내었는데, 이제는 상태가 퍽 호전되어 다행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는 꽤 오랫동안 그녀의 식사 시중을 들고난 뒤 손수 식기를 들어 침대 밖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에게 넘겼다. 리안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헤일라.”
바투 붙어 오는 움직임이 조심스럽다. 그는 제 여자와 나란히 침대에 기대앉았다. 어깨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여자의 배를 쓰다듬었다.
“헤일라.”
“으응…….”
리안의 눈에 기묘한 성취감이 어렸다. 시선은 헤일라의 납작한 배에 집중된 채였다. 크고 두툼한 손이 배꼽을 중심으로 느릿하게 원을 그렸다.
“레테 만날래?”
조악한 호의를 베푸는 남자는 한없이 자비로워 보였다.
“레, 테?”
“응. 레테.”
레테. 레테? 헤일라는 계속 중얼댔다. 리안은 친절하게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네 언니를 만나고 싶지 않느냐며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옆으로 넘겨 주었다.
언니.
헤일라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 변화를 감지한 리안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자신이 말을 꺼냈으면서도 심사가 뒤틀렸다.
“그래. 언니.”
“언니, 언니, 언니,”
단어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여러 번 입안에서 발음을 굴리던 헤일라는 어느 순간 뚝, 하고 입을 닫았다. 그리고 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진리를 깨달은 사람처럼 무어라 중얼댔다.
“가야 되는데…….”
“…….”
“가도 돼?”
매섭게 벼려져 있던 그의 눈매가 약간 누그러졌다. 리안은 잘했어, 하고 헤일라의 엉덩이를 가볍게 쓰다듬은 뒤 볼에 입을 맞추었다.
“응. 대신에 이거 잘 먹으면. 열 밤만 자고 만나러 가자.”
그가 하녀에게 지시해 받아든 동그란 것을 손 위에 펼쳐 들었다.
“열 밤……?”
불안한 듯 눈을 좌우로 굴리자 리안이 손을 꽉 잡아 왔다. 헤일라는 입을 꾹 다물고 그에게 바짝 붙었다.
“말 잘 들을 수 있지?”
“응, 응…….”
그녀가 조금 급하게 대답했다. 언뜻 초조해하는 기색을 보인 듯도 하였다.
“자, 아, 하자.”
리안이 시종에게서 건네받은 작은 약 몇 알을 펼쳐 헤일라에게 내보였다. 며칠 전부터 먹는 약이었다. 헤일라는 눈을 꼭 감고 입을 벌렸다. 곧 약이 혀 위에 얹어지고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꿀꺽, 삼키고 입을 벌렸다. 언제나처럼 리안이 그녀의 입안을 살핀 뒤에야 헤일라는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녀가 먹은 것은 아이에게 해가 가지 않으면서 몸에 쌓인 환각 성분을 해독할 수 있는 약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해할 수도 없는 상태인 헤일라는 그저 리안이 이끄는 대로 착실히 따랐다.
그렇게 십여 일이 흘렀다.
* * *
신전에 발을 들인 건 이번으로 세 번째던가.
헤일라는 천천히 눈을 끔벅대며 리안과 나란히 걸었다. 신전의 복도를 걷는 둘의 앞과 뒤에는 여러 명의 시종들이 포진해 있었다. 리안은 아직도 자신이 허튼짓을 할지 모른다 생각하는 듯했다.
도망 따위, 칠 수도 없는데 그걸 이 남자만 몰랐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머릿속을 정리해 버렸다. ‘감히’ 그에게서 도망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몸속에 쌓여 있던 환각제가 걷힌 뒤에도 헤일라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리안이 입에 넣어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그가 옷을 벗겨 몸을 물고 빨면 앙앙대며 울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요즘에는 리안 쪽에서 성기를 삽입하는 성교는 피하고 있어 괴로움은 덜했지만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 하게 되리라.
자신은 명실상부 리안 휴리트의 것이었다. 제 뜻과 관계없이 그리 정해져 버렸다. 반항하면 더 괴로워진다. 나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아프고…… 더 이상 그런 건 싫었다.
리안의 말대로 나만 참으면 되었다. 모든 상황이 그랬다. 망치지 말아야지. 아무것도 선택하지 말아야지…… 주제를 알고 리안에게 복종하자. 그럼 언니를 살려서 신전에 잘 데려다 놓은 것처럼, 그는 아무도 해치지 않을 거다. 헤일라는 그렇게 머릿속에 엉킨 실들을 싹둑, 잘라 내었다.
“레테 님께서는 여기서 머무르고 계십니다.”
신전의 시종이 멈춰 서서 리안에게 고개를 조아린 뒤 설명했다. 리안은 문 너머의 모습을 점치는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헤일라가 시선을 흘긋댔다.
“……들어가도 돼?”
소심하게 묻는 목소리의 끝이 약간 떨렸다. 눈치를 보는 모습도 이렇게 귀여울 일인지. 리안은 작게 탄식하고 표정을 풀었다. 고개를 숙여 헤일라의 오른뺨에 입을 맞춘다.
“그럼. 만나러 온 거잖아.”
“응, 응.”
그녀는 안심한 듯 리안의 손을 꽉 쥐었다. 가르친 내용을 잘 따라 하는 어린아이 같아, 그가 작게 웃었다.
“언니랑 둘이 이야기할래?”
헤일라가 놀란 듯 입을 약간 벌렸다. 그래도 되냐고 되묻는 목소리에 옅은 감동이 끼어 있었다. 혈육과의 오붓한 만남을 허용해 주다니. 굉장히 자비로운 처사였다. 헤일라는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워했다.
“그래. 들어가 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방문에 노크를 했다. 언제나처럼 레테에게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헤일라는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뒤에서 저를 지켜보는 리안의 눈빛이 등허리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조금은 무섭기도 하였다.
탁.
드디어 방 안으로 완전히 몸을 밀어 넣었다.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 헤일라는 깊게 안심했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 방 안을 쭉 둘러보았다. 리안의 저택만큼 화려한 방이었다.
“언니…….”
그리고 그 사이에 앉아 있는 레테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잘 어울렸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침대에 앉아 있었지만 또 언제나와는 달랐다.
뭔가…….
“뭘 그렇게 서 있어.”
“…….”
“왔으면 앉아.”
레테가 턱을 까닥였다. 헤일라는 파드득 놀라 움칠대면서도 그 명령에 착실히 따랐다. 침대 옆 의자는 아주 푹신했다.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된 것 같은 발 받침까지 있어 편안하게 앉을 수 있었다.
헤일라는 언니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조금 딱딱하고 냉랭하게 굳은 얼굴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동생을 대했다.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하나? 헤일라는 속으로 안절부절못하며 손끝을 탁, 탁, 건드렸다. 레테는 헤일라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손.”
“아, 미안.”
레테는 헤일라가 초조할 때마다 손톱 소리 내는 걸 못마땅해했다. 헤일라는 언니의 심기를 건드릴까 황급히 맞잡은 손을 떼어 냈다. 다시금 레테를 찬찬히 살피는 얼굴이 신중했다.
오늘은 필사적으로 레테의 기분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리안과 함께 지내게 되었고, 언니는 신전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해야 하니까. 레테를 충분히 이해시키고, 그녀가 흥분하지 않도록 옆에서 잘 설명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이전처럼 데면데면하게 굴면 안 되었다. 자신을 미워하는 언니지만 오늘만큼은 애써서…….
하지만, 차마 얼굴을 보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시선을 내린 것은 그래서였다.
“아.”
그때 헤일라는 잊고 있던 폭력의 흔적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아…….”
레테의 왼손에는 세 개의 손가락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헤일라는 거기에 시선을 뺏겨 멍하니 탄식했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려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너한테 보낸다고 들었는데.”
그러나 레테 쪽은 너무나 태연했다.
“몰랐어?”
오른손으로 왼손의 비어 있는 부분을 쓰다듬는 행위는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잘랐어. 손가락을 받아 가야 한다고 하기에.”
따르지 않아도 되는 명령이었음에도 따랐다. 그럼에도 여자는 저 좋을 대로 이야기를 각색해 동생에게 털어놓았다.
“그 새끼 짓이야.”
레테의 짙은 황금색 눈이 헤일라의 반응을 꿰뚫어 보려는 듯 반짝 빛났다. 그러나 헤일라는 덜덜 떨고만 있을 뿐 다른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았다.
“헤일…….”
“언니.”
헤일라의 떨림이 멈추었다. 레테는 냉랭하게 동생과 시선을 마주했다.
“미안해.”
미안? 레테가 헤일라의 사과를 따라 했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내가 말을 안 들었거든. 그래서 그래.”
“…….”
“아, 어, 어떡해, 아, 아…….”
헤일라는 레테가 붕대를 감고 있는 손 쪽으로 제 손을 뻗어 왔다. 마른 손은 그 손길을 피했다.
“무슨 말이야? 그게 왜 네 탓이지?”
“내가, 내가아, 리안 말을 안 들었어.”
“그래서.”
“흑, 그래서 언니 손가락, 윽, 언니…….”
내가 또 언니한테, 언니를, 언니 손이…….
헤일라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댔다.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의 끔찍한 잔상과 고통스러워했던 레테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미안해…….”
또 이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