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이제 다 본 거야?”
“아니. 아직.”
헤일라가 작게 한숨 쉬자, 그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와 눈을 맞춰 왔다.
“집, 마음에 안 들어?”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할 게 뭐가 있어. 네 집인데.”
“우리 집이 될 수도 있는데.”
“…….”
“네가 원하면.”
스읍,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사용인 무리에서 누군가 헛숨을 쉰 탓이다. 그러나 리안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전부 바꿔도 돼. 네 취향이 제일 중요하니까.”
“리안.”
“응.”
“우리 이미 끝났잖아.”
“…….”
“그런 말 안 했으면 좋겠어. 네가 뭘 보여 줘도 난 너랑은 안 살아.”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리안은 헤일라의 손을 꼭 쥔 채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린 듯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리 와, 헤일라.”
너한테 꼭 보여 주고 싶은 게 하나 남았어…….
마치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외면하는 아이 같았다. 헤일라는 마지못해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제 마지막이었다. 이곳만 보면 어찌 되었든 그와의 약속은 모두 지키는 셈이었다. 그녀는 리안도 약속을 지켜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파이라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리안을 따라 걷는데 나이 든 집사가 다가와 알렸다. 파이라라면…… 헤일라는 저를 이 저택에 데려다 놓은 남자를 떠올렸다. 집사의 뒤를 보니 정말로 그가 서 있었다. 상자 하나를 손에 든 채였다.
“그래.”
그는 그 말만 하고 헤일라의 손을 잡아 지하로 통하는 두꺼운 철문 앞으로 이끌었다.
“……여기로 들어가는 거야?”
꼭 감옥의 입구 같은 모양새였다. 리안이 천진한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은 불길한 쇳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그에 헤일라의 어깨가 움칠 튀었지만 리안은 그녀의 손을 더 꼭 쥘 뿐이었다.
“휴리트가의 저택에는 지하실이 아주 많아. 꽤 유명할 정도로.”
리안이 파이라에게 명령했다.
“너만 따르고 나머지는 여기 남도록.”
파이라를 제외한 나머지 시종들은 모두 문 앞을 지키라는 의미였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더 커지는 듯했다. 헤일라는 긴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굴을 더 굳혔다.
머릿속에 삐- 하는 소리가 들리고, 신전에서 리안이 저를 억지로 취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헤일라는 애써 기억을 물렸다.
“자, 이리로.”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고 싶지 않았지만 아래는 어두웠다. 손을 잡지 않으면 엎어져 창피를 당하기 딱 좋았다. 헤일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갔다. 리안의 손은 따뜻했다. 꼭 이전처럼.
아니, 생각하지 마. 떠올리지 마. 다 지나갔어.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마음속으로 중얼댔다.
“헤일라.”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모두 내려가고 문 하나가 더 나왔을 때 리안이 그녀를 불렀다. 지하 깊숙한 곳인지라 목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꼭 낙뢰가 내리치기 전 하늘이 울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헤일라는 주눅이 든 사람처럼 조용히, 응, 하고 답했다.
“지난 삼 년간 매일매일 생각했어.”
“…….”
“네가 왜 나를 떠났는지, 왜 레테에게 갔는지.”
내가 거짓말을 해서, 그래서만은 아니었잖아, 그렇지?
리안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빠르게 속삭였다. 헤일라는 문에 등이 붙은 채, 아니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바짝 얼어 그를 밀어냈다.
“너는 정말 귀여워.”
“읏, 리안.”
“작고 약한 것들이 짓밟히는 걸 싫어하다 못해 두려워해. 그게 너 때문이라면 더더욱.”
단단한 손이 얇은 팔뚝을 점점 더 꽉 움켜쥐었다.
“불쌍한 걸…… 그냥 못 지나치잖아.”
“윽, 아파!”
이제 헤일라는 필사적으로 리안을 밀어냈다. 그러나 리안은 다정한 말투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너는 내가 싫은 게 아니야, 헤일라. 싫어했던 게 아니야.”
쿵. 이 또한 이명인가. 헤일라는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너무나 선명하게 귓가에 쿵, 쿵 소리가 울렸다.
“그냥 선택을 잘못한 것뿐이야. 그년이 불쌍해서, 그래서 마음이 기운 거야.”
리안이 헤일라의 등 쪽으로 손을 둘러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끼이이이익-
불길한 쇳소리가 다시금 그녀의 정신을 지배했다.
“그래서 준비했어.”
그가 딱딱하게 굳은 헤일라의 어깨를 억지로 잡아끌어 몸을 돌렸다.
이상해. 무서워, 도망가고 싶어…….
본능이 소리쳤으나 여자는 그가 이끄는 대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축축한 바닥이었다. 다음으로는 방부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역한 기운에 입과 코를 가볍게 막으니 리안이 미안하다는 듯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리안은 저것만 보고 얼른 나가자는 말을 하고 오른쪽 벽면을 가리켰다. 헤일라는 순순히 그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저게…… 저게 무…….”
인간의 무언가였던 조각들이.
“무슨!”
잔뜩 전시되어 있었다. 헤일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렸다. 토기가 올라와 욱욱대며 헛구역질을 했다. 리안은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았다.
“고개 돌리면 안 되지, 잘 봐.”
“흑, 아아!”
리안이 토기를 참지 못한 헤일라의 턱을 쥐었다. 토사물이 손에 질질 흘렀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헤일라의 얼굴을 방 안을 향해 들이밀었다. 오른쪽, 왼쪽 벽면에 살덩이들이 빼곡히 늘어져 있었다.
“네가 나를 떠난 시간 동안 너와 닿았던 이들의 조각이야.”
“아, 아, 아…….”
말도 안 된다 읊조리는 그녀의 목덜미에 리안이 고개를 처박고 쿡쿡 웃었다. 헤일라의 머릿속에 언제 닿았을지 모르는 이들의 얼굴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리안은 친절하게 조각들의 주인을 소개해 주었다.
“가장 오른쪽에 위에 있는 건 네가 작년 겨울에 만졌던 아이의 머리칼.”
“하, 지마!”
“그 옆에 있는 건 저번에 네가 신전 심부름을 시켰던 늙은 여자의 손…….”
“그만, 그만!”
“아래에 있는 건 이 년 전 시장에서 네 발을 밟은 남자의 발이야.”
코끝에 피비린내가 스치는 착각이 일었다. 방에 있는 수십 개의 신체 조각들이 자신을 향해 기어 오는 듯 아찔했다.
다 죽은 거야? 나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자신 때문에. 리안이 죽였다고 한다. 정신이 혼미했다.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헤일라가 그의 품에서 허우적댔다. 리안은 기쁘게 그녀를 품 안에 들여 안아 주었다.
“너는 불쌍한 것들에 약해.”
“흑, 으윽, 으으…….”
“그래서 이렇게 하기로 했어. 네가 나랑 떨어져 있으면…….”
“허윽, 윽, 흐읍…….”
“너랑 닿은 모든 것들은 더 불쌍해질 거야.”
비명에 가까운 애원, 그리고 원망의 말들이 엉망으로 섞여 토해졌다. 그러나 리안은 품 안의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가를 부드러이 닦아 줄 뿐이었다.
헤일라가 옛날에 주었던 그 천 조각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때와 완벽히 똑같은 모양으로 그의 손에 들려 있다. 헤일라가 발발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충격을 넘어선 공포감이 그녀를 지배했다. 꿀렁, 하고 몸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는 기분이었다.
“이제 나랑 계속 같이 있을 거지?”
“아, 아아, 아아아……!”
헤일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것이 끔찍했다. 믿고 싶지가, 믿을 수가 없었다.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 리안을 제치고 이 끔찍한 공간에서 벗어나, 얼른 어디로든……!
“아직 마음을 못 정한 거야?”
리안은 시종일관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헤일라는 팔을 흐느적대며 울음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파이라 쪽을 바라봤다. 무언의 지시. 파이라는 굳은 얼굴로 제 품 안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리안이 그것을 받아 들고 헤일라와 눈을 마주했다.
텅. 헤일라의 머릿속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이걸 먼저 보여 줄 걸 그랬나.”
헤일라의 심장이 퍼덕댔다.
그녀는 이전에, 리안에게서 종종 일반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하곤 했다. 그것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에서 가끔 발견되는 순수한 광기였다. 물론 그것에 놀라기는 했으나 공포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일반에 관한 학습이 부재한 탓이라 여겼으므로.
그러나, 그러나 지금은…….
저 눈은 너무…….
헤일라가 그의 모든 것에 압도되어 있을 때, 리안이 보석 상자처럼 고급스러운 붉은 원단의 상자를 달칵, 하고 열어젖혔다. 그것이 헤일라의 눈앞에 들이 밀어진다. 그리고, 그리고…….
“어, 어, 어, 어…….”
작은 함의 중앙, 꼭 반지가 끼워져 있어야 할 것 같은 자리에.
“설마, 이거.”
손가락이 있었다. 뼈에 살가죽이 들러붙어 있는 마른 손가락 두 개.
헤일라는 리안에게 붙잡힌 채 우두커니 두 살덩이를 내려다보며 꺽꺽댔다. 리안이 키득대며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 맞췄다.
“네가 매일 지겹도록 닦은 손가락이야.”
레테의 손가락.
저것은 레테의 손가락이다.
“그러니까 내 곁에 있어, 응?”
그렇지 않으면 그년이 더 불쌍해져…….
그의 말이 점점이 들러붙어 헤일라를 미치게 했다. 눈물이 마르지 않고 쏟아 내렸다. 그러다가 호흡이 가빠질 때 즈음, 남자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얼굴을 핥았다. 굉장히 안타까운 사람처럼 걱정스레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사람처럼 머뭇대다가 말했다.
“입 벌려 봐, 헤일라.”
그가 고백하는 남자처럼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니, 명령했다.
“키스하자.”
뜨거운 살덩이가 헤일라의 입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 * *
“헤일라는?”
“아직 주무십니다.”
으음. 리안은 의자에 손을 괴고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제 공간에서 곤히 잠든 헤일라를 상상했기 때문이리라. 파이라는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흐, 어으, 흐으, 사, 살려, 주,”
어두운 지하실에 신음 소리와 애원이 섞여 울렸다. 리안은 행복한 기억을 잠시 접어 두고 아래쪽으로 힐금 눈길을 주었다. 아래에는 하녀 하나가 제 종아리를 부여잡고 널브러져 있었다.
“안 죽여.”
그는 자못 자상한 주인처럼 이야기했다. 그리고 칼을 들고 발발 떨고 있는 하녀장에게 명령했다.
“얼른 해.”
자지러지는 소리가 다시 공간을 메웠다. 애원과 원망, 그리고 두려움이 섞인 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