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왜 이래?”
그는 마치 삼 년 전, 아니 그보다 더 전과 비슷했다. 헤일라와 리안 사이에 사랑 말고 아무런 감정도 없던 때처럼 살가웠다. 그저 잠시 집을 나갔다 귀가한 연인을 반기는 사람 마냥 밝았다. 반드시 있어야 할 분노의 부재에 오싹하기까지 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하지만 그는 헤일라의 물음에도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더니 아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잊었다 깨달은 사람 같았다.
“미안해.”
“…….”
“이 말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내가 눈치가 없었지?”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이야기해.”
그녀는 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 리안의 재회 따위가 아니었다. 레테의 안위.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그의 기행에 홀리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다.
리안은 바짝 긴장한 연인을 염려하듯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늦게 데리러 가서 미안. 나도 보고 싶었어.”
“너 미쳤어?”
“헤일라?”
그는 몹시 당황하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헤일라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성큼 다가와 그녀의 두 팔뚝을 쥔다. 알싸하고 청량한 향이 훅 끼쳐 들었다. 왜인지 아찔했다.
3년. 3년이었다. 헤일라라고 해서 그가 증오스럽기만 한 건 아니었다. 분노와 배신감은 시간과 고됨에 의해 조금씩 마모되었다. 사막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퍽퍽한 외로움이 그녀를 덮칠 때마다 그가 그립지 않았냐고 한다면, 그래. 그건 거짓말일 테다.
왜 아니겠는가? 그는 안식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웃으며 재회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다. 추억이 아무리 아름답게 빛이 나도 그것은 깨어진 유리 조각이 반사해 내는 빛이었다. 허상보다 위험한 잔상.
게다가 헤일라는 리안을 버렸다. 조금이라도 분노의 감정이 있을 터인데 어째서 이토록 다정하기만 한가. 비상식적인 간극이 마치 갈라진 땅처럼 느껴져 두려웠다.
헤일라는 간신히 이성을 부여잡고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이거 놔.”
“다 사정이 있었어, 정말이야.”
“진짜 왜 이래!”
완강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순간 그의 얼굴에 섬찟한 무표정이 떠올랐으나 헤일라는 그를 밀쳐내는 데 사력을 다해 보지 못했다. 리안은 금방 표정을 바꾸어 어미에게 거절당한 아이 같은 올망졸망한 눈을 하고 헤일라를 바라보았다.
“다 알고 있었니? 내가 어디 사는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어?”
꽉 문 입술 아래가 아렸다. 이제까지 리안에게 들키지 않으려 모자를 눌러쓰고, 비렁뱅이를 포섭해 약을 구했던 나날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응.”
리안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네 거처를 내가 모르면 안 되잖아.”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양, 태연하기까지 했다. 그는 오히려 그런 질문을 하는 헤일라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리안은 천천히 다가와 헤일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낭창한 허리가 꼿꼿하게 굳었다. 그가 낮은 숨을 토해 낸 탓에 목덜미가 간질거렸다.
“그럼, 그럼 왜 그냥 뒀어?”
“…….”
“그럼 왜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언니를, 나를…….”
목이 꽉 막혔다. 헤일라는 더듬더듬 말하다가 갈피를 잃은 사람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말 못해. 미안.”
리안은 헤일라를 품에 안아 좋기만 한지 푸스스 웃으며 이야기했다. 완전히 미친 것 같았다. 헤일라가 그를 세게 밀어냈지만 딱딱한 남자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안긴 채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언니는.”
“…….”
“언니는 어디에 있어? 이 집에 있는 거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헤일라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여기 오면 보여 준다고 했잖아. 돌려준다고 했잖아!”
침묵을 지키는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 머리칼만 살살 쓰다듬을 뿐이었다.
“리안, 제발!”
헤일라가 다시 한번 리안을 밀쳐내자 그가 순순히 밀려났다. 그리고는 밀쳐진 제 가슴팍을 힐금 보고 헤일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요요한 검은 눈이 그녀를 범하듯 훑었다.
“제발?”
그가 되물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리안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헤일라에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 섞인 애원을 보낸 건 헤일라였다.
“언니는 잘 있는 거지? 그냥, 그냥 나한테 화가 나서 잠깐 어디 데려다 놓은 거지?”
“…….”
만약 리안이 언니를…… 끔찍한 상상이 그녀를 덮쳤다. 담아 두었던 두려움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절박함을 담아 다시금 물었다.
“아니면 내가 보고 싶은데 미안해서, 그래서 그냥…… 장난처럼, 응? 그런 거야?”
“여전히.”
리안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섬뜩했다.
“여전히 레테를 끔찍하게 챙기는구나.”
“……리안.”
“응.”
헤일라의 부름에 그가 히죽, 웃었다.
“걱정하지 마. 레테는 잘 있으니까.”
불길했다.
“네가 그 애를 이렇게나 걱정하는데, 어떻게 해치겠어.”
그의 말은 이상했다. 마치, 헤일라가 레테를 아끼지 않으면 결코 살려 두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는 듯하였다. 사람의 목숨이라는 걸 아주 하찮게 여기는 사람 같았다.
헤일라는 그 말의 저의에 대해 차마 묻지 못하고 숨만 골랐다. 그의 입에서 무슨 미친 소리가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자극해서는 안 되었다.
“레테는 잘 있어. 그러니까 나랑…….”
헤일라의 목울대가 가볍게 울렸다. 몇 초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갖 음탕한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자신에게 바랄 것은 그런…… 그런 나쁜 짓밖에 없을 테다.
하지만 리안은 내민 것은 의외로 아주 쉽고 간단한 선택지였다.
“저택 구경이나 하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다 구경하면, 보내 줄 거야? 언니도, 돌려놓고?”
“음.”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안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다 보고도 그럴 마음이 든다면 그렇게 할게.”
저택의 호화로움에 넘어가 그녀가 레테를 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리안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내 마음이…… 바뀌는 일은 없을 거야.”
리안은 답하지 않았다.
* * *
“자꾸 붙지 마.”
더욱 단단해지고 넓어진 몸뚱어리가 헤일라에게 바짝 붙어 걸었다. 헤일라는 널찍한 복도를 걸으면서 그녀의 옷자락에라도 한 번 닿아 보려고 애쓰는 남자를 두고 경고했다.
리안은 이 층 복도에서부터 내내 그녀에게 딱 붙어 걸었다. 이제 응접실 하나 봤는데 벌써 피로했다. 뒤에 사용인들까지 줄줄 달고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연인 사이를 과시하려고 안달 난 사람 같았다.
“발은 왜 그래?”
그가 그녀의 맨발을 보고 물었다. 리안이 화제를 전환했으나 헤일라는 냉랭하게 답할 뿐이었다.
“말 돌리지 말고.”
“발 차가워지는 거 싫어하잖아?”
움찔. 헤일라의 검지가 약간 꿈틀했다. 손발이 쉽게 차가워지는 헤일라는 발이 차가워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걸 기억하는 그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또, 이 대화가 너무 옛날과 비슷해서 짜증이 났다. 꼭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금방 나갈 거니까 상관없어.”
헤일라는 왜인지 변명하는 사람처럼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더러워질까 봐 벗고 온 것뿐이야.”
“누가 그러라고 했어?”
일순 복도에서 둘을 뒤따르던 하녀들 모두가 긴장했다. 물론 리안은 여전히 상냥했다. 올라간 입꼬리, 적당히 휘어진 눈. 그러나 기묘하게 무언가 엇나간 느낌이었다.
“……제가 다른 신발을 드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흙투성이 신을 신고 계시기에…….”
헤일라를 방으로 안내했던 하녀였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주변 시종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으나 하나같이 리안의 반응에 집중하고 있었다.
언제나 집 안을 돌보는 데에는 무심하던 주인이었다. 처음 공작이 되었을 때 집 구조며 가구를 뜯어고치라 명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가끔 남루한 차림의 인간들이 저택을 방문하긴 했지만, 리안은 사용인들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이들이라고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어떤 의도로 왔는지도, 무슨 일을 하고 나가는지도 사용인들은 알지 못했다. 밤에는 사용인들이 모두 저택 밖의 숙소에서 지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가끔 방문하는 객들이 깊은 밤이 되어 저택을 나갔다는 파이라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리안의 객에게 깍듯했던 하녀들도 그들의 차림새에 따라 대우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주인이 돌보지 않는 집의 기강은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져 있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여도 주의를 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헤일라라는 여자에게도 냉랭하게 대했을 뿐인데.
엄청난 실수를 해 버린 걸까. 이런 식으로 따라다니며 시중들라고 한 것도 처음이라, 안 그래도 책잡히지 말라고 하녀장이 신신당부했는데. 하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긴 침묵 끝에, 마침내 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것으로 끝이었다.
역시!
하녀는 긴장이 확 풀림과 동시에 입가에 작은 미소를 걸쳤다. 그리고 조금은 의기양양하게 다시 제자리에 섰다.
저 여자도 별것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리안과 헤일라는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가 온갖 방을 다 열어 보았다. 헤일라는 점점 지루해져 가는 낯빛이었지만 리안은 집에 관해 열심히 설명했다. 서재, 침실, 응접실, 다이닝 룸, 손님방까지 전부 둘러본 뒤에야 그는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