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레테가 자신을 속인 이래로 헤일라는 그녀에게 살갑게 대한 날이 없었다. 사랑이나 애정 따위를 내보이려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레테가 화를 내도, 음식을 던져도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발작을 해도 응급처치를 하며 옆을 지키고 있을 뿐, 돈을 받고 고용된 피고용인처럼 언니의 수발만 들었다.
미웠다. 그러나 미워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헤일라에게는 그때도 지금도 언니밖에 없었다.
언니의 안위는 헤일라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자신 때문에 레테가 다쳐서는 안 되었다.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된 언니다. 언니밖에 없었다…….
리안을 버려 가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기형적인 신념이 대가리를 들었다.
그녀의 초조한 물음에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일라는 잠시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손의 떨림이 멈출 때까지 몇 분간 단순하게 호흡했다.
그리고 안정을 되찾은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갈게요.”
* * *
‘불쌍한 계집.’
파이라는 마차 안에 마주 앉은 여자를 두고 생각했다. 헤일라라는 여자는 티가 날 정도로 입안의 살을 짓씹고 있었다.
그는 동정심에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다가 입을 닫았다. 반 협박해 끌고 온 주제에 할 말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말을 건 쪽은 여자였다. 헤일라는 그를 똑바로 보고 물었다. 약간 당황한 파이라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헤일라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창밖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이라는 잠시 자신의 처지를 되짚어 보았다.
그는 병에 걸린 연인을 살리고자 리안의 아래로 들어간 남자였다. 파란 집의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는 유능한 용병 출신이었고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를 매일 감시하고 쫓아다니는 일이 면이 서지 않는다 느낄 뿐이었다. 그래도 사람을 죽여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연인의 병세가 악화되었고 파란 집의 의원들도 고개를 내저었다. 리안은 남자의 충성을 사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으나 더 이상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기적. 기적이 필요했다.
그러나 국왕도, 리안도 장기적인 신전 치료를 주선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런 파이라 앞에, 타센이 나타난 것이다.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하던데.’
타센은 무감한 낯으로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신의 계시를 받은 사자처럼 확신에 차 손을 내밀었다.
그가 건넨 것은 알 수 없는 약이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검은 알갱이. 그러나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했다. 파이라는 그날 그것을 제 연인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정말 마법처럼 사랑하는 연인의 기운이 돌아왔다.
나중이 되어서야, 타센이 죽은 뒤에야 그 약이 강한 마약임을 알게 되었다. 중독성이 강해 끊으면 고통스러운 갈증과 허기에 미쳐 죽어 가는 마약이었다. 아직 암시장에서도 거래되지 않는 바다 건너 나라의 물건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타센에게 발설한 이도, 마약을 구해 건네라 지시한 이도 레테라는 계집이었다. 예언의 힘을 가진 마지막 신관이자 헤일라의 유일한 혈육.
어쨌든 파이라는 그 약을 구하기 위해 다시 리안에게 목줄을 쥐여 준 처지였다. 조금이라도 복용 기간이 늦춰지면 연인은 괴로움에 발발 떨며 그에게 매달렸다. 연인의 죽음이 적어도 존엄하기를 바라는 파이라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런 멍청하고 미련한 인간이 저였다.
자신은 소중한 것을 지키느라 다른 이의 소중한 것을 희생시키는 전형적인 쓰레기이기도 했다.
그 결과가 이 여자의 현재였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측은지심이 들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에 자연스레 마음이 움직인다.
파이라는 타센의 명으로, 타센이 죽은 뒤에는 리안의 명으로 헤일라를 아주 오래 지켜봐 왔기 때문에 알았다. 여자는 텅 빈 껍질이 되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연인에게 배신당한 계집의 삶은 너무 쉽게 무너졌다.
그래서 때때로 파이라는, 그녀의 쇠락에 일조한 자신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언니는 잘 있는 거 맞죠.”
게다가 미련하기까지 해서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구석이 있지 않은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관심 한 조각 받으려 꺼덕대는 제 주인과 계집의 언니가 환장할 만도 했다.
이 여자는 사랑을 버리질 못했다. 자신은 놓아 버렸다 생각할지도 모르나, 몇 년간 지켜본 파이라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저 언니와 연인을 놓고 싶어 할 뿐이다.
언니가 발작을 하는 날이면 새벽 내내 옆에 앉아 돌보며 무언가 맺힌 눈빛을 한다. 연인에게 빌려주었던 손수건과 같은 천 조각을 버리지 못하고 서랍 가장 아래 칸에 넣어 두었다. 그들이 좋아하던 음식을 저도 모르게 만들고는 뒤뜰에 쏟아 버리곤 한다.
그러다가 정말 견딜 수 없이 과거가 그리워지면, 그래서 힘에 부치면 여자는 잠 속을 자신을 파묻었다.
“그보다는 헤일라 님 스스로를 챙기십시오.”
“저는…….”
“그분에 관해 알아 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그러니 미쳐 버린 제 주인에 관해 경고해 두자. 이 여자가 주인 옆에 가능한 한 오래, 더 망가지지 않고 버텼으면 하니까.
알량한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한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 * *
파이라는 저택의 정문까지만 헤일라를 안내했다. 그는 하녀로 보이는 여자에게 헤일라를 넘겨주고 떠났다. 명 받은 다른 일이 있다고 했다. 레테가 이 안에 있는 것이냐는 물음에도, 그 일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도 파이라는 답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이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고만 이야기했다.
“다른 신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피고용인임이 분명해 보이는 젊은 여자는 쌀쌀맞게 헤일라를 맞이했다. 상대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꼿꼿한 자세였다. 헤일라는 제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흙투성이의 낡은 구두. 깔끔한 메이드복을 입은 하녀는 더러운 것이 저택을 어지럽히는 게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헤일라라는 미천한 여자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됐어요.”
이곳은 리안의 저택이었다. 그에게 속하는 무엇도 더는 받고 싶지 않았다. 하녀는 성가시다는 듯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감정을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무례함이 엿보였다. 그녀의 시선에는 약간의 경멸도 묻어났다.
“지저분한 신발을 신고는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알았어요.”
헤일라는 조용히 신발을 벗었다. 맨발로 차가운 돌바닥에 발을 디디니 찬 기운이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하녀는 그것을 보고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앞장서서 걸었다. 헤일라는 자박자박 소리를 내며 뒤따랐다.
저택에 들어서기 전, 파이라라는 남자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분은 광증을 앓고 계십니다. 심기를 거스르지 마십시오.’
신전에서 전대 공작을 죽인 이후로 그는 병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다른 이의 왼눈을 광적으로 탐하게 되는 광증. 그가 주기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파이라는 리안이 신전에서 제 아비의 왼눈을 찔러 죽인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헤일라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녀가 신전에서 도망친 뒤 열흘 만에 타센 휴리트가 죽었다고 공표되었다. 그리고 리안 휴리트가 곧바로 공작위를 승계받았으니, 부자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리안은 아비에게서 벗어나는 대가로 영원한 저주를 얻은 것이다.
“그가 저주받은 데는 네 역할이 크지 않았니?”
“네가 버리고 가서 그는 평생 남의 눈알을 파고 다니게 되었네.”
“기쁘지는 않아 보이는구나.”
죽은 어미와 아비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헤일라는 애써 익숙한 힐난을 무시했다. 그녀는 계단을 오르며 발을 내딛기 위해 근육을 쓰는 데 온정신을 다하려 노력했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 층에 다다른 뒤 긴 복도의 두 번째 방문 앞에서 둘은 멈춰 섰다. 헤일라를 데리고 온 하녀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물러났다.
감시하는 듯한 눈빛. 그녀는 헤일라가 들어가는지 아닌지 매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 따위, 헤일라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이 문고리를 잡아 돌리면.
그렇게만 하면 이 너머에 리안이 있는 것이다.
헤일라는 그 사실에 압도되어 주먹을 쥐었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눈을 질끈 감고 문고리를 잡았을 때는 심장 박동이 손끝까지 전해지는 듯하였다.
끼익-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삼 년 만의 재회였다.
* * *
“헤일라.”
이번에는 이명 따위가 아니었다. 리안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줄 때의 울림과 목소리. 아니 이전보다는 조금 낮아졌나. 덩치도 더 커진 것 같았다. 거리가 조금 있는데도 눈에 띈다. 헤일라는 빠르게 눈을 깜빡거려 보았다.
“헤일라.”
리안이었다. 그는 널찍한 업무용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일어났다. 검은 눈이 조금 커졌다. 그는 잠시 입술을 벌리고 벙긋댔다. 이는 헤일라가 예상했던 반응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리안은 아주 가볍게 놀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빨리 왔네.”
금세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와 인사를 건넬 정도로.
“오는 길에 불편한 건 없었지?”
생각보다 약간 빨리 방문한 객을 대하는 태도 같았다.
“헤일라?”
아니, 아닌가.
헤일라는 그가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뒷걸음질 쳤다. 등에 문이 닿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당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렇지 않은가?
“마중을 나가려고 했는데 일이 많아서…… 화났어?”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볼 수가 있지.
“너…….”
“응?”
“너, 왜…… 왜 그런…….”
어떻게 옛날과 같은 얼굴로 나를 대할 수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