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41화 (41/97)

41화.

06. 어린 짐승

노을이 지는 낮과 밤의 경계였다.

져 가는 빛조차 들지 않는 낡은 골목으로 여자 하나가 숨어들었다. 낡은 로브를 걸친 여자는 옷에 달린 모자로 얼굴의 반을 덮은 채였다. 걸음을 빠르게 옮겨 골목 깊숙한 곳에 앉아 있는 남루한 노인에게 다가갔다. 여자가 바로 앞에 도착했을 때,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씨익 웃었다.

“오셨는가?”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적지 않은 돈뭉치를 꺼내 내밀 뿐이었다.

“여태 안 오시길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했다고.”

가래 섞인 걸걸한 목소리는 불쾌감이 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여자는 묵묵히 서서 노인이 무언가를 꺼내 건네길 기다렸다.

약초가 잔뜩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그녀는 안을 흘끔 열어 보고 주머니를 몇 번 흔들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뒤 꽁꽁 싸매 제 품 안에 넣었다.

“다음 달에 또 올게요.”

“그러시게.”

헤일라는 퍽 익숙한 거짓말을 하고 돌아섰다. 다시 이 노인을 만나러 올 일은 없을 것이다. 횟수로 다섯 번은 채웠으니 이제 다른 이를 찾아봐야 할 때였다.

그녀는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사람을 고용해 왔다. 신전 앞 약재상에서 레테의 약을 사기 위해 중간책이 필요했다. 헤일라는 꾸준히 중간책을 바꿨다. 입단속을 대가로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는 있으나 언제 배신당할지 모르는 노릇이니까.

누구도 믿을 수 없으니까. 누구도.

노인은 더 이상 여자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뒤돌아 걷는 헤일라의 귀에 돈 세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때, 노인 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헤일라.”

움찔.

헤일라는 걸음을 뚝 멈추었다. 자신을 숨기기 위해 적지 않은 웃돈을 주고 심부름을 시켜 왔다. 그런 만큼,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런데 왜.

“헤일라.”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등 뒤에 식은땀이 맺혔다.

“헤일라.”

아니다. 노인이 아니야.

이 목소리는…….

그 애의…….

헤일라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온 관절이 삐거덕댔다.

“뭐야, 뭐가 잘못됐나?”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는 여전히 헤일라와 노인 둘뿐이었다. 노인은 불만이 가득 낀 얼굴로 고개를 팩 쳐들었다. 돈을 황급히 품 안에 챙기는 게 헤일라가 약초에 트집을 잡을까 봐 염려하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노인을 찬찬히 훑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다시 걸었다. 헤일라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되뇌었다.

“헤일라.”

그냥 새로운 이명이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반복적인 굉음이나 울림 소리에 시달렸다. 그것은 부모의 목소리나 언니의 비명 소리로 종종 바뀌곤 했다.

“오랜만에 듣네.”

“헤일라.”

그러므로 ‘그 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

헤일라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제 귀를 주먹으로 퍽퍽 쳤다. 그래도 소리가 멈추지 않자, 어느 순간부터는 입을 헤 벌린 채 바닥만 보면서 걸었다.

그녀는 갑자기 왜 자신이 이런 이명을 듣게 되었는지를 반추해 보았다. 최근에 그 애에 관해 생각할 일이 있었나. 영영 떠올리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는데.

아, 혹시 오늘 아침 언니와의 대화 때문일까?

지난 삼 년간 헤일라와 레테의 대화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헤일라는 더 이상 레테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고 언니는 그런 동생에게 여전히 무정했다. 부양의 의무만으로 묶인 사람들처럼 둘은 냉랭하기만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레테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직도 그 새끼가 좋니?’

그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쪽 눈알을 파내는 취미까지 생겼던데.’

전쟁에 나가 인간을 무참히 도륙하고, 시신의 눈알을 찔러 죽은 자를 능멸하기로 유명한 새로운 공작가의 주인.

‘뭐, 공작까지 됐으니 그런 흠은 흠도 아닌가.’

리안. 리안 휴리트.

헤일라는 레테가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우습게 여겼다. 이미 다 끝난 사람에 관해 왜 말을 꺼내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침대 옆 협탁에 어제 사 둔 빵만 둔 채로 대답 없이 집을 나왔다. 그저 피곤했다.

어떤 변덕, 또는 옛날에 종종 부리던 패악의 연장선이라 여기고 넘겼다. 그런데 레테가 한 말이 가슴에 박혀 있었나 보다. 떨어지지 않아 잔상으로 남아 이명으로 치환된 것이리라.

“얼른…… 집에 가서…….”

그녀는 환청을 떨치기 위해 중얼댔다. 해야 할 것을 나열하는 입술이 버석 말라 있었다.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하고, 또…… 얼른 자야지…….”

레테의 뒤치다꺼리를 한 뒤에는 언제나 수면 속으로 자신을 잠갔다. 요즘은 잠이 한없이 달았다. 어느 날에는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자는 시간이 더 많기까지 했다. 그만큼 수면이 주는 안온함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헤일라에게 있어 유일한 안식이었으므로.

하염없이 걷다 보니 번듯한 제집이 보였다. 이전에 살던 집에 비해 훨씬 깔끔하고 튼튼한 거주지였다. 타센이 은밀하게 준비해 내어준 집이다.

3년 전 신전에서 나온 뒤 헤일라는 바로 이 집으로 왔다. 이후에는 계속 여기서 기거했다. 타센은 약속대로 집 안에 레테를 안전하게 옮겨 두었고, 그곳에는 몇 년간 생활하며 레테의 약값을 충당할 돈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람 하나 버리고 돌아선 대가치고는 과했다.

하지만 여기가 싫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 문고리를 잡았다. 벌써부터 하루를 마친 듯 탈력감이 몰려왔다. 헤일라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기름칠이 잘 되어 있는 문은 아무런 잡음도 내지 않고 매끄럽게 열렸다. 익숙해질 법한 낯섦에 헤일라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누군가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들일 일 없는 낯선 남자의 투박한 신발. 헤일라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익숙한 낯 하나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당신이…….”

“…….”

“당신이 왜.”

리안을 배신하고 타센에게 정보를 제공한 남자다. 헤일라를 타센에게 데리고 간 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남자는 입을 다문 채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몇 번 입을 달싹대다가 답했다. 그 모습은 언뜻 초조해 보였다.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무슨…….”

“리안 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리안? 헤일라가 멍청하게 그의 말을 따라 했다. 그리고 불길함을 감지한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녀는 그를 밀치고 레테의 방 쪽으로 달렸다. 남자는 쉽게 물러나 주었다.

“언니.”

다급한 음성을 비웃듯 침상은 텅 비어 있었다. 깨끗하지만 쓸쓸한 방에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주인이 없었다.

“언니!”

비명에 가까운 부름이었으나 레테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집에 없는 것이다.

그 애, 리안의 짓이다.

“헤일라.”

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목덜미에 소름까지 쭈뼛 돋았다.

다 잊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건 다 잊었다고, 공을 세우면서, 인정받으면서 잘 지낸다고 믿고 싶었는데. 헤일라는 그가 이제 와서 이런 짓을 벌이는 이유를 가늠해 보았다. 눈앞이 뿌옜다.

리안이 자신을 찾을까 봐 자취를 감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정말 적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일 뿐이었는데. 정말로 찾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섞였다.

죽였을까? 언니를 죽였을까?

나한테 복수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아직…….

배 속의 내장이 뒤섞이는 듯 아찔했다. 모든 가정이 끔찍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으려던 순간이었다. 남자가 헤일라의 어깨를 부축했다. 그녀는 그것을 쳐내려 허우적댔지만 힘이 부족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무력했다.

진절머리가 난다.

“가셔야 합니다.”

“당신…… 이번에는 리안한테 붙은 거야?”

분노의 불씨가 다른 이에게 튀었다. 시뻘게진 눈이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리안은 당신이 배신자라는 걸 알아?”

“알고 계십니다.”

맥이 탁 풀린다. 알고 있다고 한다. 모든 걸 알고도 이 남자를 보냈다고…….

그녀는 이제 어느 것도 가늠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서 저를 보내신 겁니다.”

“그게 무슨,”

“헤일라 님께서 가지 않으시면 저는 죽습니다. 그분을 배신한 대가로.”

“…….”

“누구라도, 죽게 내버려 두실 분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

어처구니가 없었다. 리안은 자신 때문에 남이 다치는 걸 못 견디는 헤일라의 성정을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언니와 관련된 과거 때문이라는 사실까지도 안다.

레테를 납치한 것도 모자라 이런, 이런 저열한 방식까지 써서……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가지 않으실 겁니까?”

“……나한테 선택권이 있기는 해요?”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헤일라는 멀건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금발에 약간 까무잡잡한 남자는 이전처럼 침착한 표정이었다. 이전에, 타센의 뒤에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이런 표정이었다.

“온전히 선택하실 수 있도록 배려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배려? 우스웠다.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조롱이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자신을 찾고 있는 이상, 그저 리안이 닦아 놓은 길을 걷는 게 그녀에게 준비된 몫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면.”

“…….”

“가면, 언니가 있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살아 있죠? 그녀의 목소리는 작고 가냘프게 떨렸다. 거기에는 약간의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후회까지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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