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40화 (40/97)

40화.

그는 자신의 계획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으면 수월할 테지만 그렇게 해서 이후에 새로운 목줄을 차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더 자유로운 삶이었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실패해도 괜찮았다.

죽어도 상관없다.

리안은 드물게, 자신의 운명을 신에게 맡겨 보고 싶었다. 죽는다면 그 또한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만큼 무료했고 미련 또한 옅었다.

그는 타센의 방에 들르기 전에 토끼의 재를 묻은 저택의 뒤로 가 풀이 무성해진 터를 쓰다듬었다. 박제한 뒤 속이 꺼끌대 기어이 몰래 태워 재로 만든 소동물의 작은 무덤이었다. 리안은 자신이 왜 이 장소를 찾았는지 잘 몰랐다.

그것이 그가 선택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가장 개인적인 순간에 한 행동들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기도 모호해 그저 하고 돌아선 기행이었다.

그리고 그날, 리안은 타센을 죽이는 데 실패했다.

* * *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은 혹독한 추위가 수도를 덮친 겨울의 중간 즈음이었다. 리안은 타센의 숨을 걷어 내는 데 실패했고 저택에서 도망쳤다. 그의 아비는 얼굴에 기다란 흉을 얻었으리라. 그러나 리안은 배가 뚫렸다. 피 냄새가 훅 끼쳤다.

‘아쉽게 됐구나.’

가까스로 칼을 피해 눈 아래로 흐르는 피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 같은 꼴로 말했었다. 리안은 그것이 원망과 아쉬움 어디쯤을 부유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착각이리라 넘겨짚었다. 어제까지 리안에게 사람의 가죽을 벗겨 내도록 명령한 남자였다. 리안이 아끼는 미물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 잔인한 아비였다. 죽음을 원할 이유가 없다.

눈앞이 아른대기 시작했다. 이곳은 산이었다. 수도 외곽의 이름도 모를 구석진 곳. 리안은 이곳에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는 죽음과 삶이 크게 차이가 난다고 여기지 않는 인간이었다. 오히려 죽음 쪽이 더 안온할지도 몰랐다.

“아으, 아파…….”

그때 나뭇잎이 부스럭대는 소리와 계집애가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리안은 속에 깊이 품고 있던 단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타센이 보낸 고용인일 가능성도 있었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점점 더 누군가가 다가왔다. 리안은 나무에 기대앉아 이방인이 존재를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다가오면 바로 급소를 찔러 죽일 생각이었다. 죽더라도 아비의 뜻대로 죽을 마음은 없었다.

“어?”

하지만 그날 리안이 본 여자는 그를 죽이기 위해 고용된 인간도, 위협이 될 만한 여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어여뻤다.

* * *

“우리 집에서 죽으면 가만 안 둬.”

다리 저는 계집애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부자리를 살뜰히 살폈다. 듬성듬성 잘린 기다란 앞머리 사이로 새치름하게 뜨고 있는 처진 눈매가 보였다. 먼지 쌓인 다락의 조그마한 공간을 내어주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태도가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그, 목걸이 주기로 한 거는 잊지 말고.”

그는 가볍게 웃었다.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자못 긴장한 게 여자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탓이다.

“그래.”

목걸이 따위야 리안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숨겨 주는 대가로 오랜 시간 지니고 있던 귀물을 여자에게 주기로 했다. 그리고 여자는 성실하게 약속을 이행했다.

그는 귀족이었지만, 일면식도 없는 남자를 숨겨 주기 위해 옷에 피 묻는 걸 내색하지 않고 부축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는 건 알았다. 게다가 계집애는 어디서 맞고 왔는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다리까지 절고 있었다. 그러니 약속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기로 마음먹었다.

“약속은 지켜. 걱정 마.”

물론 그게 여자를 살려 둘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숨이 붙어 있어 타센과 계속 충돌한다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접촉했던 인간을 죽이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러니 만약 자신이 내일까지 살아 있다면, 그리하여 몸을 회복하고 걸어서 이 집을 나서게 된다면 여자는 시체가 되어 목걸이를 걸게 될 것이다.

조막만 한 여자는 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확답을 들어 안심한 사람처럼 휘유, 하고 작게 한숨 쉬었다. 그리고 다시 못마땅한 사람을 연기했다.

“우리 집엔 약초 같은 거 없어. 미리 말했지만…….”

그녀는 무어라 더 구시렁댄 뒤에도 남자가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눈을 흘기고는 제 방으로 내려갔다. 고개를 돌려 나가는 모습을 관찰하는데 맨발의 동그란 발꿈치가, 오목하게 패여 얄쌍한 뒷 발목이 시야에 잡혔다.

어쩐지 시선을 끈다.

리안은 다시 작게 웃고는 찬 기운이 올라오는 바닥에 몸을 뉘었다. 계집이 준 거적때기로 겨우겨우 지혈한 상처에서 다시금 열이 올라왔다. 온몸을 잠식해 오는 기운이 열인지 바닥의 냉기인지 판단이 어수선하게 흩어졌다. 곧이어 수마가 자신을 덮치는 걸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별안간 희고 동그랗던 조그마한 발이 눈앞에 아른댔다. 코끝에 계집애의 목덜미에서 옮아 붙은 보드라운 살 내음이 감돌았다. 부축을 받을 때 스며든 향기가 분명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불쾌하지 않았다.

“……아……야, ……다고…… 잖아…….”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당혹감에 젖은 눈과 그 뒤에 뭉개져 있는 누더기 솜이불이 안개처럼 뿌옇게 보였다.

“야아…….”

따뜻한 손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쳐 주었다. 간지러워 신음을 흘렸는데, 그걸 뭐라 받아들였는지 여자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너…….”

바르르 떨리는 입술이 겨울에 형편없이 흔들리는 얄따란 나뭇가지 같았다. 여자는 옷을 헤치고 몸 위에 손을 얹어보며 리안의 몸 상태를 살폈다. 천 조각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는 부러 떼어 내지 않고 놔두었다. 궁금했다.

그의 반 토막만 한 계집애는 우선 리안을 다른 방으로 옮기려는 심산인지 단단한 팔을 어깨에 둘러메고 일어나려 시도했다. 그러나 저보다 훨씬 크고 골격이 단단한 몸을 일으키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낑낑대는 걸 멈추고 다시 리안을 바닥에 눕혔다. 이번에는 꽤 따뜻한 것이, 아래에 푹신한 솜이불을 깐 것 같았다. 헤진 천에서는 희미하게 부드러운 향기가 배어 있었다.

눕혀지고도 계속 의식이 꺼졌다가 켜졌다가 산발적으로 옮겨지기를 반복했다. 열이 가득 오른 몸에 시원한 무언가가 닿는 촉감, 상처에 뭉근한 덩어리가 얹어지고 다시 천에 쌓이는 느낌만이 선명했다. 그리고, 입술.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고백하자면 그는, 물 한 모금 삼킬 여력조차 남지 않았었다. 아주 약간의 방치만으로도 손쉽게 생명의 불꽃이 꺼질 수 있는 몸뚱어리였다. 그래서 리안은 계집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죽어 나자빠진 채로 그토록 원하던 목걸이를 멘 채 집과 함께 불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나 이 순진한 계집은 살아나면 저를 죽일 궁리를 하는 남자를 위해 제 입술을 맞대어 왔다.

보드랍고 습윤했다.

리안은 정신없이 도톰한 살점이 내미는 물을 빨아들였다. 사실 그가 그때 탐한 것은 수분 따위가 아니었다는 걸 둘 다 몰랐다.

완전히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어스름이 낀 새벽녘이었고 옆에는 계집애가 바짝 붙어 한 이불을 덮고 있었다. 추운지 잠결에 코를 찡긋대기에 손끝으로 눌러 보고 싶었지만 그러면 깨 버릴 것을 알았기에 놔두었다. 그러나 그의 인내가 무색하게 그녀는 곧 천천히 눈을 떴다.

여자는 입술을 작게 오물대다가 슬며시 웃었다. 안도와 기쁨 그 어딘가를 부유하는 미소였다.

“일어났어?”

환희에 물든 얼굴 위로 새벽의 몽롱한 빛이 흩뿌려져 있었다. 낭창하게 휘어진 눈꼬리와 끌어올려 진 선홍색 입꼬리가 호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여자가 왜 이런 표정인지 고민해야 했다.

영락없이 그의 회생을 반기는 미소였음에도 리안은 무지했다. 무리는 아니었다.

애타게 신을 좇아왔던 신도라 해도, 알현한 바가 없는 신의 형상을 바로 알아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충분히 자비로운 신은 열렬한 신도의 앞에 현신하여 기회를 주기도 한다.

“다행이다.”

헤일라의 진솔한 다정이 그것이었다.

쿵.

갑자기 심장이 왼 가슴 아래에서 터진 듯하였다. 찌릿하기도 하고 축축하기도 하였다. 장기 하나가 손실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겠구나 싶은 멍청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어느 때보다 열심히 기능하고 있는 심장이 자신의 존재를 세차게 알리고 있었다.

리안 휴리트는 살아남았다. 존재한다.

그녀가 살렸다.

여자의 이름은 ‘헤일라’라고 했다.

* * *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는 산에서의 만남에 관해 물었다. 어째서 피 묻은 남자를 보고 도망가지 않았느냐고. 이에 헤일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 봤을 때…… 네가 산 요정이나 천사님인 줄 알았거든. 너무 예뻐서…….”

그새 그의 유일한 신이 되어 버린 여자는 대답하며 얼굴을 붉혔다. 리안은 그 순간 자신의 껍데기에, 아니, 그녀와 만날 수 있도록 설계된 그날의 실패에, 지난 했던 과거의 시간들을 반추하며 행복감에 젖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순간이 아무 의미 없이 흩어져 버렸다.

리안은 피가 뚝, 뚝 떨어지는 검을 든 채로 멀건 얼굴로 웃었다. 피가 남긴 궤적은 돌바닥에 닿자마자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리고, 사라진 죄의 흔적 끝에는, 여린 살갗과 왼쪽 눈이 관통된 채 널브러져 있는 남자의 시신 한 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헤일라…….”

그의 귓가에 신의 저주가 울렁였다. 신전에서 혈육을 죽인 배덕한 이에게 신이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명이 그를 둘러쌈에도 리안은 제 여자의 이름만을 되뇌었다.

어미를 잃은 아이처럼. 신에게 버림받은 열렬한 신도처럼.

지독한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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