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럼, 그 새는.”
굳이 보낼 필요가 없는 새였다. 되짚어 보면 그냥 위장에 불과한 말들이 나열되어 있는 전서구였다. 더 이상 전달받을 예언이 없다면 굳이 새를 보내 리안에게 둘의 관계를 노출시켜 위험 부담을 떠안을 이유가 없었다.
“아아. 그거.”
타센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걸 알릴 방법이 없잖나. 그래서.”
“…….”
“편지는 당연히 위장이었지만…… 물에 불린 편지를 새에게 먹여서 신호를 확인했다.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으면 새는 그대로 창문 밖으로 날아갔을 테고, 무언가 엇나가 우리가 접촉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난 그 새에게 치명적인 독을 종이에 발라 두기로 약속했거든.”
편지를 말소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일이 틀어지면 새가 죽을 테고, 그러면 접촉해야 한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새는, 단 한 번도 물에 푼 종이를 먹고 죽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전부 그년의 계획이었다고…….”
치료나 귀물 따위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년은 처음부터…… 처음부터…… 동생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 모두를 속이고 있었다.
깊은 살심과 제대로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자책, 그리고 헤일라에 대한 감정이 거칠게 섞여 넘실댔다. 리안은 손을 덜덜 떨면서 묶인 팔을 들어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런 아들을 보고 공작이 짐짓 자애롭게 말했다.
“괴로워 보이는구나.”
“…….”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신당하고, 밑바닥 인생이라 멸시했던 계집에게 농락당하고…… 꼴이 우습게 됐어.”
리안이 숨을 헐떡였다. 일평생 지나치게 잠잠하기만 했던, 그러면서도 헤일라에게만 반응해 왔던 모든 감각이 살갗을 뚫고 그를 휘감았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니, 사랑 같은 건 쓸모가 없다고.”
그건 너를 불행하게 해. 말을 내뱉는 타센은 묘한 표정이었다. 앞에 있는 리안을 보면서도 뒤에 있는 다른 무언가를 보는 사람처럼 몽롱했다. 그러나 리안은 깊은 좌절감에 허우적대느라 아비의 변화를 기민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육신을 갈기갈기 도륙하고 싶다는 충동만 더욱 진해질 뿐이었다.
“나를 죽이고 싶은 얼굴이야.”
타센은 리안의 속내를 단번에 꿰뚫고는 낮게 웃었다. 그리고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넘긴 뒤 천천히 걸었다. 그는 공간의 중앙, 신의 성물이 자리하고 있는 빛의 기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 하나를 꺼냈다.
“그 예언자도 그러더구나. 네가 나를 죽일 거라고.”
자, 시험해 볼까.
그는 빛 속으로 손을 뻗어 신전의 심장과도 같은 성물을 끄집어냈다. 그 천연덕스러움에는 익숙함마저 엿보였다. 타센은 리안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자아, 이제 완전해지는 일만 남았어.”
“…….”
“네가 심장을 찔러 그 사랑이라는 것만 도려내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이루어 주마.”
마치 말을 잘 들으면 아이에게 조르던 장난감을 사 주겠다 선언하는 부모 같았다. 그만큼 가볍고 다정했다.
“공작위와 모든 제물이 네 것이야. 물론, 원한다면 그 자매들도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지. 그리고, 나도.”
“…….”
“나도 기꺼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마.”
그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벅차 보였다. 중간중간 말을 멈추고 얼굴을 일그러트리거나 심호흡을 하기도 했다. 이토록 긴장하는 타센은 처음이었다.
“왜.”
아비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답지 않게 망설이며 입술을 물었다.
“내가 성물을 써서 네게 남는 게 뭐야.”
기형적인 양육 방식이었다. 정 붙일 곳을 두지 못하도록 하고, 붙이면 기어이 죽여 없애는 게 공작이었다. 리안은 타센이 자신을 증오해 그런 방법을 쓰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리안은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하지?”
리안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타센은 그런 리안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웃었다. 그는 갑자기 울고 싶은 사람 같았다.
“아니.”
단호했다. 그만큼 진실했다.
“너를 위해서.”
타센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타델리아가, 너를 잘 키워 달라고 하기에. 그래서.”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얼굴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제는…….”
너무 지쳐서…… 타센이 무어라 혼자 중얼대더니 고개를 휙 들어 리안의 어깨를 더 세게 쥐었다.
“사랑 같은 건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인간의 번뇌와 고통의 팔 할은 사랑에서 온다. 나는 그걸, 너한테서 완전히 떼어 낼 의무가 있어.”
타델리아가…… 그는 고장 난 기계처럼 죽은 부인의 이름을 불렀다. 리안은 그제서야 타센이 쥐고 있는 검으로 눈을 돌렸다. 옅게 떨리는 검은 칼날이 리안의 예측을 확신으로 굳혔다.
타센 휴리트는 이미 한 번 성물을 사용했다.
리안에게서 헛웃음이 샜다. 지난 시간 보아 왔던 아비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타델리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듯 무감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놓지 못했다. 타델리아에게 아무런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차마 버리지 못했다.
그의 아비는 타델리아의 육신을 그대로 보존해 둔 채 울지도 웃지도 않고 시간을 죽였다. 그것이 사라진 감정의 잔재임을 이제야 알았다. 사랑 없이 껍데기만 남은 남자가 감정의 그림자만을 안고, 맹목적으로 죽은 여자의 유언에만 매달렸던 것이었다.
“사랑을 버려. 그래야 인간은 완전해져. 너도 이제는 알게 됐잖니.”
헤일라라는 아이는 결국 너를 버렸어. 지금 네 꼴을 봐.
타센은 아들을 세뇌시키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난한 여정에 마침표를 찍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차가운 돌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는 영원을 맹세하는 고결한 기사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애걸하는 비렁뱅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묘한 부조화가 타센을 감쌌다.
“그 애도 선택을 했다. 이젠 네 차례야.”
공작이 리안에게 검을 쥐여 주었다. 리안은 손목이 마주 묶인 상태로 검은색 검을 쥐었다.
“하나를 버리고 모든 걸 얻는 거다.”
“하나를 버리고, 모든 걸,”
“그래.”
리안의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그려졌다. 타센은 그 속에서 과거의 잔상을 발견하고서 흠칫, 떨었다.
그리고 곧이어 첨예한 신의 칼끝이 살을 파고들었다. 푸욱, 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05. 그
아비는 기본적으로 무심하고 차가웠다.
다른 아비들은 아들의 키나 얼굴 생김새를 관찰하며 저와 닮은 부분을 찾아내거나, 성장한 면모를 발견해 내곤 한다는데 타센은 달랐다. 그는 리안에게 관심이 없었다.
검술이나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는 데에도, 어딘가 다치거나 아파 의원을 불러야 할 때도 걸음 하지 않았다. 오로지 리안이 결점을 보일 때, 기대 이하의 결과물을 가져올 때만 그를 찾았다. 그런 날엔 리안은 지하 깊숙한 곳에 처박혀 벌이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집 안의 사용인들이 리안을 먹이고 입혔으며 돌보았다. 그러나 그들 또한 공작이 홀대하는 리안에게 살가움을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타센의 학대 또한 그들에게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누구도 막지 않았다. 그들은 아이의 입술이 터지거나 뺨이 부어올라도, 때때로 공작의 명을 어겨 사흘 동안 냉골의 창고에 물 한 병과 함께 아이가 방치되었을 때도 가만히 두었다.
리안이 최초로 애정을 가진 작고 보드라운 생명을 도려내라 교육받을 때도 그들은 침묵했다. 그러라고 고용된 이들이었으므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공작의 사람들이 리안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는 양질의 식사와 교육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리안의 유년기는 사치스러운 방치로 얼룩져 있었다. 감정의 거세는 타고난 기질과 맞물려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아이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성년을 맞이했다. 이후에는 그저, 뻔하디뻔한 그런 일들.
몸 섞을 계집을 누군가가 방 안으로 밀어 넣으면 짐승들이나 할 법한 교미를 즐겼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배설 그 이상 이하도 아닌 행위. 그러나 계집의 몸은 부드러웠으며 온도가 높았다. 리안은 그것이 꽤 마음에 들어 여러 계집을 찾았다.
타센이 의도한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따뜻한 것이 좋았다. 그것은 어릴 적 맛봤던 짧고 강렬했던 감각을 갈구하는 마음이었으나, 애정에 대한 어떠한 가르침도 받지 못한 남자는 그것을 몰랐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죽여 가던 어느 날, 리안은 모든 게 지루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주변에 몰려드는 냄새나는 귀족들은 역겨웠고 자신을 위해 준비된 창부들은 지겨웠다. 리안은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타센이 준비해 내어주는 것들로는 즐거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차츰 눈치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즐거운 일이 생기지?
그가 고민하던 차에,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너랑 잤던 년들은 전부 멱이 따였어.”
베르디안이 퍽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타센의 짓이야.”
죽이자.
명분은 충분했다. 애를 밴 여자 하나를 구해 아비가 아들의 연인을 죽였다 명분을 붙이자. 제국에서 임산부를 죽이는 것은 중죄였다.
라움 신이 이르기를, 이미 완성된 몸으로 태어난 아기나 성인은 지상의 것이지만, 태 안의 생명은 신의 소유였다. 그러므로 여인은 신이 내린 미성숙한 생명을 품어 완성시키고, 남자는 그를 지키는 게 천명이라 하였다. 신이 내린 미완의 생명을 거두는 행위는 신에 대한 모독이었다. 즉결처분이 가능했다.
게다가 황제는 누구보다 공작의 죽음을 바랐다. 리안의 앞에서도 그 기색을 숨기는 법이 없었다.
리안은 조건이 충족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자신이 오래도록 패륜을 꿈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슴이 두근댔다. 그 거치적대는 인간을 없애면 귀찮은 일도 반으로 줄어들 것이고, 묘하게 기대되는 것을 보니 죽이는 행위 자체가 즐거울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날 밤 리안은 독을 바른 칼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