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이 뽑힌 자리-38화 (38/97)

38화.

공작은 아들을 죽이지 않겠다 약속했다. 그저 저택으로 데려가 후계로 세울 것이라 말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는 리안을 죽이려 했던 남자니까. 리안은 아버지가 저를 죽이려 해서 저택을 빠져나왔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헤일라의 말을 들은 타센은 귀찮다는 듯 앞머리를 쓸어 올려 흉이진 제 이마를 보여 주었다.

‘그날 나를 죽이려 한 건 내 아드님이었는데.’

아직도 믿음을 버리지 못한 멍청한 계집을 힐난하는 어조였다. 공작은 리안이 자객이라 생각하고 방어했고, 그 과정에서 리안도 다쳤다고 했다. 리안은 계획에 실패하자 도망쳐 산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헤일라가 발견해 인연이 시작되었다.

‘난 그 애를 못 죽여.’

그 말을 하는 남자는 어딘가 아득해 보였다.

헤일라는 더 묻지 않았다.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공작이 리안을 죽이고자 했다면 헤일라 자신을 인질 삼거나 거주지를 찾자마자 등에 칼을 꽂아 넣었으리라. 그러나 타센은 그러지 않았다. 정성스럽게 판을 짜고, 수고를 들여 헤일라를 회유하고 있다.

공작은 리안이 언니에게 약속했던 치료와 재물을 자신이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미 리안이 자매를 찾을 수 없도록 거처까지 마련해 두었다고 알려 주었다. 레테와 이미 이야기가 된 부분이라고. 헤일라는 이 대목에서 실소를 흘렸다.

‘그 대가로 너는 리안을 버려 줘야겠어.’

그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확실히 아들과의 연을 끊으라고. 왜냐고 묻는 헤일라에게 공작은 침묵으로 답했다. 헤일라는 그저 타센이 무능한 평민 계집을 공작가의 안주인으로 맞을 수는 없다 여긴다 생각했다.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괜찮다.

헤일라는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밖으로 나가는 문이 지척에 있었다. 신전의 심장이라는 리듀카의 백색 문 앞에 다다랐다. 차가운 문의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렸다. 쿵쿵, 심장이 울렸다.

그런데 만약, 아주 만약에 공작이 거짓말을 한 거라면?

아들을 정신적으로 몰아붙이고 죽이려는 수작이라면?

그녀는 공작의 제안을 듣고 매 순간 생각해 왔던 리안을 위한 만약을 이 순간에도 떠올렸다. 그를 염려했다. 완전히, 놓지 못했다. 게다가 공작은 헤일라의 앞에서 리안의 머리채를 잡고 구타하지 않았나. 그도 결코 정상은 아니었다.

목이 삐걱대는 목각 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리안이 약간의 희망에 차 거친 숨 속에 헤일라의 이름을 섞어 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헤일라는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타센 휴리트는 보란 듯이 웃었다.

‘내 제안을 거절하는 건 네 자유지. 하지만.’

네 언니는 죽어.

리안을 배신하고, 타센에게 의탁한 언니였다. 만약 리안이 살게 된다 해도 언니의 치료를 도울 리가 없었다. 아니,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헤일라는 결국 다시 뒤 돌았다. 공작이 리안을 죽인다는 경우의 수는 그녀의 망상에 불과했다. 게다가, 리안은 이제껏 그녀에게 진실을 말한 적이 거의 없지 않은가.

또 속으면 안 돼.

그녀가 속삭였다. 그러나 동시에 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거짓말.

힐난하는 말은 날카롭고 정확했다.

넌 그냥 언니가 더 소중한 거야. 저 애를 버린 거야!

헤일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 활짝 열린 문을 비집고 빛이 쏟아졌다. 신전의 정원은 이전과 같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왜인지 아름다운 꽃과 푸른 잎으로 단장되어 있는 길은 끔찍한 가시밭처럼 보였다. 뒤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절규가 쉴 새 없이 들려오는 탓일까.

헤일라는 귀를 막았다. 그리고 무작정 앞으로 내달렸다.

도망쳤다.

* * *

여자가 문을 박차고 나간 뒤에도 리안은 그녀의 이름만 중얼댔다. 그리고 그녀가 나간 문 쪽으로 꿈틀대며 나아갔다. 철로 되어 있는 수갑이 발목과 손목에 채워져 있음에도 끈질기게 그녀를 쫓으려 했다. 타센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걸음 만에 아들을 따라잡아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학습 능력이라는 게 없군.”

내 아들이 맞는 건가? 그는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제 아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눈에는 살의도, 증오도 없었다. 공허만이 녹아 있는, 죽은 물고기 같은 눈이었다.

“볼 만 하구나.”

타센은 놀랍지도 않은지 그저 픽 웃었다.

“너를 버리고 제 혈육의 안위만 좇는 여자인데.”

“…….”

“그런 계집 때문에 이런 표정이라니.”

정말 많이 변했어. 그는 퍽 유쾌하게 말하고는 머리칼에서 손을 놓았다.

“배신당해서 이 꼴이 됐는데도…….”

리안은 계속 침묵했다. 타센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는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그래, 날 도와준 이가 너한테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는데.”

“…….”

“다른 입이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겠지. 그 정도로 무능하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리안이 정한 날을 정확히 알고 기다릴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리안은 헤일라에게 정확한 날짜를 알리지 않았다. 순전히 그녀가 걱정할까 봐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그저 일을 나가겠다고만 했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을 흉내 냈었다.

그런데 그날 공작저의 지하에는 리안을 포획하기 위한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치 그가 그 시각에, 그 장소에 정확히 도착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헤일라가 배신했다는 그림은 그럴 듯했지만 아귀가 맞지 않았다. 게다가 피워져 있던 독초, 그것은 휴리트 가문의 인간들이 유일하게 내성을 갖지 못하는 ‘필로테리움’이었다. 어릴 때부터 소량의 독을 복용해 내성을 키우는 휴리트 가문도, 필로테리움 만큼은 너무 독해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필로테리움은 피웠을 때 반 시간밖에 효과를 내지 못하고, 신전이 엄격하게 관리해 공작가라 해도 대량을 구해 두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타센은 리안이 언제 침입할지까지 다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게다가 지금 둘이 마주하고 있는 신전은 또 어떤가. 리안을 신전의 중심에 가둬 두기 위해서는 관련자의 도움까지 필요했을 터. 황제와 미아르의 눈을 피해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이거나, 둘 중 하나거나. 어쨌든 헤일라만 리안을 배신한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구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헤일라의 잔상만 좇던 남자가 이제야 아비에게로 눈을 돌렸다. 멀겋게 바랜 얼굴에 박혀 있는 눈알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타센이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고 미소 짓다가 신의 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비극을 낳는 법이니.’”

리안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조심하라고 했잖아.’”

결코 생각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 애는 내 거야.’”

벌어진 입술이 닫히지 않았다. 동공이 길게 찢어졌다.

“왜, 놀랐나?”

리안은 어째서 그 계집이 한 말이 타센의 입에서 나오는지 이 순간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너무 하찮아서 경계조차 하지 않았던 병에 걸린 계집이, 네 모든 걸 망쳐 놨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

“조심했었어야지, 리안. 내가 말하지 않았나. 상대를 완전히 알지 못하면 긴장해야 한다고.”

꿇어앉은 남자는 가는 신음을 내뱉은 뒤 주먹을 꽉 쥐고 이마를 땅에 박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이고 이마를 찧어 핏물이 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순간 뚝, 하고 행동을 멈추고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는 갑자기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져서는 공작을 향해 일갈했다.

“예언.”

자신이 간과한 단 하나의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래. 레테라는 계집이 예언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더구나.”

휴리트는 품 안에서 편지 몇 장을 더 꺼내 다리를 굽혀 리안의 눈앞에서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약간 색이 바랜 싸구려 편지지는 여기저기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레테가 신문 배달부를 통해 공작에게 전달한 종이 뭉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헤일라에게 건넨 한 장을 뺀 나머지 종이들이었다.

“내가 찾은 게 아니야. 그쪽이 날 찾았지.”

공작은 아들이 몰랐을 법한 사실들을 하나둘 짚어 주었다. 영리하고 주도면밀한 예언자가 누구를 이용해 공작에게 접근했는지. 그리고 레테의 뜻대로 움직인 배달부가 어떻게 공작에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 전부.

“천한 것들이 발을 들일만큼 공작저가 만만하지는 않아. 네 여자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타센은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넘긴 헤일라에 관해 말하며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날 네 대역의 시신을 확인하러 수도 외곽에 있는 숲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웬 여자 하나가 앞을 막아서더군. 레테라는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어디로 가야 나를 만날 수 있는지. 국왕과 네 눈을 피해 나와 접촉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

“신문 배달부라는 여자는 네게서 얻은 목걸이로 꿰어 내고, 나를 이용해 필요 없어진 전달책을 죽여 없앴다. 영리한 여자야.”

게다가 레테는 중요한 내용을 여러 번 주고받을 수고를 줄이기 위해 한 번에 모든 예언을 정리해 보냈다. 리안이 언제 어떻게 저택에 침입할 것이고, 리안의 심복을 꿰어 내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리안과 연결되어 있는 신관들을 어떻게 외부로 유인해야 하는지 가감 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타센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까지 계산이 되어 있었다는 방증이었다.

“하, 하하…….”

리안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손안에 모든 것을 쥐고 있었는데, 정작 놀아나고 있던 건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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