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오늘은 내가 깜빡하고 시장을 못 가서 닭고기 스튜는 못했어. 그래도 언니 식사는 꼭 해야 약을 먹으니까…….”
그녀는 이제껏 해 왔던 말을 줄줄 뱉으며 레테를 내려다봤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미동이 없다. 언니가 왜 화가 났지? 역시 해 달라고 한 음식을 안 해 줘서 그런가 봐. 헤일라는 가볍게 자책하고 재차 미안하다 사과했다. 그러나 레테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 약이랑 같이 두고 갈 테니까 꼭 먹어, 알았지?”
그리고는 평소처럼 일어나 방을 나섰다. 곧 돌아올 리안을 맞아 주어야 하니까.
그 뒤에 헤일라는 젖은 수건으로 몸에 묻은 흙을 대충 닦아 내고 옷을 갈아입은 뒤 자신의 방 침대에 앉았다. 앉아서는 해야 할 일들을 곱씹었다.
리안이 오면 식사를 챙겨 주고, 같이 호수에 가서 몸을 씻은 다음, 아, 또,
“뭐였지?”
또다시 삐- 하는 소리가 머릿속에 꽉 찬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귀를 퍽퍽 내리치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 생각났다. 공작에 관해 이야기해 줘야 해.
헤일라는 떠오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계속 중얼댔다.
공작이 언니랑 연락하고 있었어. 공작이 언니랑 이상한 일을 꾸미는 것 같아. 네가 위험해질지도 몰라. 리안, 조심해. 조심해. 조심해. 조심해. 조심해…….
“그런데 왜 이걸…… 말해 주려고 했더라.”
사고가 엉켜 하나로 귀결되지 못하고 여기저기 부유했다. 헤일라는 다시 머리를 퍽퍽 때린 뒤 눈을 끔뻑거렸다.
“아, 위험해서…….”
또…… 아, 생각났다. 헤일라는 실실 웃었다. 여자가 낄낄대는 목소리가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위험하니까 말해 줘야지. 리안한테…….”
분명 놀라겠지. 리안은 자신에게 어떻게 알았냐며 당혹함에 젖은 얼굴을 할 테다. 그러면서, 널 위해서였다고, 언니에게 매일 구박만 받는 너를 위해 그랬노라고 울면서 용서를 구할 것이다.
그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가 그렇게 행동할 이유는 그것뿐이다. 헤일라는 그런 남자에게 마땅히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리안이 울며불며 매달려도 처음에는 받아 주지 말아야지. 화를 내고, 때리고, 꼬집고 소리 지르면서 악을 쓸 생각이었다. 쉽게 용서해 주지 않아야 앞으로 그러지 않을 테니까. 그러다가 그가 정말로, 정말로 뉘우치는 것 같으면 용서해 주겠다 선언하겠다.
그와 이야기가 잘되면, 그래. 언니랑도 다시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레테를 쉽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언니는 아프니까. 몸이 나으면 나에게 미안해할 것이다. 분명히 그러겠지. 언니가 그렇게 된 건 내 탓이니까 내가 참아야 해. 참아서……
잘할 수 있을 거야. 이제까지 최선을 다했으니까.
* * *
그녀는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중얼대고 다시 일어섰다. 헤일라는 자신이 느꼈던 모든 감정을 발끝까지 눌러 내리며 입술 끝을 올렸다. 두 팔로 스스로를 감싸 안았다. 온몸이 달달 떨림에도 웃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앞으로 일어나 살아갈 수 있는 구석을 남기기 위해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고통으로 더 큰 고통을 막아야 견딜 수 있었다. 방을 천천히 걸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달칵.
그때 문이 열렸다.
“헤일라?”
아.
“왜 그렇게 서 있어.”
리안.
헤일라는 자신이 소리 내어 그를 불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이 아니었는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응, 응, 사실은…….
“헤일라.”
그가 성큼 다가와 자신의 뺨을 쥐었을 때가 되어서야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꼴이 왜 이래.”
리안이 화가 난 얼굴로 무어라 묻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고자 했던 말도, 해야 하는 말도 모두 눈물과 함께 뽑혀 나간 듯했다. 헤일라는 잔뜩 젖은 목소리로 무어라 대답을 하려 하다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매달렸다. 파고들었다. 애원했다.
훌쩍 뛰어들어 목에 팔을 두르고 입을 맞추었다. 그만큼 따뜻한 품이 절박했고 확신이 필요했다. 이 남자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혀를 섞고 체온을 나누며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리고,
“나한테 숨기는 거 있으면, 지금 말해.”
“너까지, 나한테 못되게 굴면, 나 정말로, 정말로……”
“그러니까 숨기는 거 있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줘.”
“다 용서해 줄 테니까, 앞으로가 중요한 거니까, 응?”
쿵. 쿵.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의 입에서 속죄의 말들이 쏟아지기를 고대하며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리안이 잘못했다 말하면, 언니에게 매번 구박받는 네가 가여워 그리했다 하면 나는, 그게 변명이라도 고개를 끄덕거려 줄 테니까.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으니까 제발……
그러나 파도가 배를 피해 가지 않듯, 불행 또한 헤일라를 피해 가지 않았다.
“걱정 마, 헤일라.”
리안 휴리트는 끝내 그녀를 배신했고,
“약속은 지켜. 무슨 일이 있어도 배신 같은 거 안 하니까.”
기만했으며,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다정했다.
그녀의 세계가 무너지는 데는 몇 마디면 충분했다. 그제야 비로소 헤일라는 그의 사랑에 자신이 질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붙잡고 있던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가차 없이 짓밟혔는지 깨달았다. 모든 진심을 쏟아부어, 목숨도 바칠 수 있을 만큼 사랑했던 이들에게 자신은 그저 정복하고 싶은 계집이었고 쓰다 버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아, 나는 이제 죽고 싶지 않았다.
“울지 마.”
나를 기만한 당신들을
“사랑해.”
죽이고 싶다.
* * *
신전에 널브러진 남자를 보면서 읊조리는 헤일라는 침착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어 온몸을 떨고 있는 리안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정말로…… 뭐가 잘못된 건지 오래오래 생각해 봤어.”
“헤일라.”
“역시 그때 죽어 버렸어야 했던 걸까? 언니가 팔려 가기 전에 쓸모없는 몸뚱이를 불 속에 집어 던져서라도 사라졌으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헤일라.”
그가 자신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속이 메스꺼워져 얼굴을 와락 구겼다.
“너랑 엮여서 이렇게 고통스러울 일도, 언니한테 배신당할 일도 없었을 거야. 응, 그랬겠지.”
“헤일…….”
“역겨우니까 내 이름 부르지 마.”
리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의 입에서 결코 나오지 않을 말을 들은 사람 같았다. 헤일라는 그것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나를 기만했으면서 다정을 기대한 걸까?
거짓으로 만든 세계에 그녀를 담가 자신으로 함빡 적셔 놓으려던 리안 휴리트. 그가 처음으로 멍청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습다 생각하는데도 속이 짓무르듯 명치가 알알했다.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모르고 싶었다.
“……죽을지도 몰라.”
그를 버려야 할 시간이었다.
“네가 나를 버리고 가면 나는 죽을지도 몰라…….”
리안은 이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토해 내듯 지껄였다. 그러니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걸하는 꼴이 비참했다.
하지만 헤일라는 이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럼 죽어야지.”
그는 벌을 받아야 했다.
“네가 여기서 죽어도 나는 어쩔 수 없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 다 끝나 버렸잖아.”
그게 공평했다. 그게 맞았다. 헤일라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웃었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리안은 심판을 받는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묶인 손을 뻗어 헤일라에게 닿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그의 손길을 쉽게 피했다. 아주 약간의 거리가 벌어진 것뿐인데도 리안은 발작하듯 헐떡이며 무릎으로 기었다.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 믿는 사람 같았다.
그가 어떤 모습이든 헤일라는 잔인한 심판을 이어 갔다.
“약속, 잊지 않았지.”
‘이 족쇄 풀고 집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 앞으로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 그리고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겠다고 약속해.’
‘내 안에서 너는 끝난다는 말이었어.’
“네가 끝낸 거야.”
꽃이 개화하듯 천천히 그녀의 눈이 뜨였다. 넓게 퍼진 황금빛 꽃잎처럼 눈동자가 곧게 빛났다. 눈물 때문에 반질반질한 표면이 그를 더 선명하게 담았다. 리안은 헤일라 쪽으로 천천히 기어가 그녀의 발끝에 손끝을 올렸다.
“헤일라, 제발…….”
애원이 길게 늘어져 그녀의 발치까지 닿았다. 그러나 헤일라는 다리를 뒤로 물리면서도 그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끝내 외면할 생각이었다.
“네가 끔찍해, 리안.”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완성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영영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레테는.”
매몰찬 마지막 말을 내뱉고 뒤를 돌아서려 했을 때, 리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까지 절절 끓는 애원을 퍼부었던 남자는 없었다. 그는 형형한 눈을 하고 그녀만을 바라봤다.
“그년도 널 속였어. 그년이 먼저 나한테 접근했다고.”
“……그래.”
오늘 그의 앞에서 한 말 중, 이것 하나만이 진심이었다. 헤일라는 레테를 버리지 못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언니는 내가 끝까지 책임질 사람이야. 너랑은 달라, 리안.”
“거짓말.”
신경질적인 웃음이 터졌다. 이제 리안은 낄낄대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 모습이 기괴했다.
“너는 그냥 나를 버리기로 한 거야.”
“……”
“넌 그년을 더 사랑하는 거야. 그래서 날, 나만 버린 거야……”
그는 버림받은 어린 짐승처럼 흐느꼈다. 그 모습을 보는 헤일라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울고 있는 연인들은 더 이상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 공작을 지나, 리듀카를 나가는 문을 향해 걸었다. 울음소리가 새지 않도록 입술을 콱 깨물며 나아갔다.
리안은 죽지 않는다. 헤일라는 그렇게 되뇌며 다리를 움직였다. 그의 꺽꺽거림을 훌륭하게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