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레테는 무섭도록 담담했다. 그녀는 잠자리의 날개를 다 떼어 두고 혼이 나면서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아이처럼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헤일라는 자신의 안에서 자그락대는 환청을 들었다.
“왜?”
그만.
“왜 그랬는데?”
물어보지 마.
헤일라 속에 있던 것이 그녀를 다그쳤다. 그러나 입은 멋대로 추궁을 이어 갔다. 입에서 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답이 돌아오지 않자 호흡이 더 가빠지며 목소리가 째질 듯 커졌다.
“왜! 왜! 왜!”
안 돼!
헤일라의 속에서 무언가 퍽,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직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네 삶은 내 것이라고 했잖아.”
일말의 희망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선고였다.
레테는 변치 않는 진리를 읊는 사람처럼 단호하게, 동생의 마지막 염원을 짓밟았다. 망설임이나 후회 따위는 모르는 사람처럼 거침이 없었다.
“날 위해 모든 걸 하겠다며?”
그녀는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의 아찔함으로 헤일라를 밀어 넣었다. 숫제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인내심 깊은 포식자 같기도 했다. 헤일라는 헐떡이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꿈, 그래 꿈이라 생각하자. 호수에 푹 빠졌다가 나오면, 깰 수 있을 테다. 그렇게 해도 안 되면 집에 있는 무딘 식칼로 손을 찔러 보자. 그것도 안 되면 낭떠러지로 가서……
자신이 무슨 사고를 이어 가는지도 모르고 뒷걸음질 치다가 등에 단단한 문의 감촉이 닿음을 느꼈다. 그녀는 얼른 뒤를 돌아 문을 열려고 했다.
그때 레테의 황금색 눈이 맹금류처럼 반짝, 빛났다.
“설마 이 정도 일로 날 버리려고?”
그녀는 뒤돌아 현실과 자신을 갈라놓으려는 동생을 손쉽게 되돌려 놓았다.
“좋은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거니? 응?”
아, 또다. 헤일라는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지겹도록 되감기는 언니의 의심증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반응을 지켜보는 눈. 어떤 결과가 나올지 빤히 안다는, 분노에 절인 목소리.
“나를 버려도 불행할 텐데.”
결코 하지 않을 배신의 대가를 친히 읊어 주는 잔인한 나의 언니. 모든 것이 끔찍하게 익숙한 만큼 현실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동생의 애정과 헌신을 의심하고 불신하며 짓밟는 나의 유일한 가족.
천천히 뒤를 돌아본 레테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건조하고 냉정했다. 헤일라는 비틀대면서 다시 언니 쪽으로 걸어갔다. 정말인지 확인해야 했다. 아니, 확인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망가진 정신을 붙들고 간신히 호흡하며 나아갔다.
“더 불행해질 거야.”
“아니야.”
“널 물건처럼 휘두르려는 새끼 밑에 깔려서 몸 파는 것밖에 못하는 인생을 살게 될 테니까.”
“아니, 아니…….”
“넌 그렇게 될 거야. 오히려 내가 알려 준 덕에…….”
짜악!
“입 닥쳐.”
* * *
레테의 얼굴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손바닥으로 제 뺨을 문질러 본 뒤 헤일라를 마주했다. 그때 다시 한번 더 헤일라의 손바닥이 뺨을 가격했다.
“닥쳐, 닥치라고!”
이제 헤일라는 제 언니의 비쩍 마른 몸 위에 올라가 미친 듯이 얼굴을, 어깨를, 몸통을 때렸다. 레테는 반항하지 않고 모든 폭력을 감내했다. 레테의 코에서 피가 흐를 때 즈음 되어서야 헤일라의 손찌검이 멈췄다.
“흐, 으, 아! 아아……!”
풀썩 무너져 레테의 몸 위에 쓰러진 헤일라의 입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샜다.
“아아아악!”
그녀는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르고, 울다가 겨우겨우 숨을 고르고 레테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까지 레테는 미동도 없었다. 마치 헤일라를 기다려 주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헤일라는 그것이 너무나 우스워서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한순간 돌변해 레테의 목을 두 손으로 쥐었다.
“왜 그랬어?”
“……”
“왜 그랬냐고! 왜! 나한테,”
“안 그랬으면.”
“…….”
“네가 날 버렸을 테니까.”
하. 헤일라의 목에서 쉰 한숨이 세었다.
“그 새끼를 선택할 테니까.”
찰싹!
다시 한번 헤일라가 레테의 뺨을 쳤다. 그러나 아주 약한 힘으로 뺨을 쓰다듬듯 때린 것뿐이었다. 레테가 돌아간 고개를 느릿하게 돌려 동생과 눈을 맞추었다. 헤일라는 일그러진 얼굴로, 울면서 웃었다.
“내가 언니 거라서, 내가 배신할 것 같아서 나를 속였다고? 아니!”
헤일라는 탈력감에 물들었던 몸에 분노가 북받침을 느끼며, 가증스러운 언니를 향해 울음 섞인 비웃음을 흘렸다.
“언니는,”
그녀는 절망에 허우적거리는 채로 처연하게 떨었다. 언젠가 레테가 바랐던 모습 그대로.
“언니는 그냥 날 망가트리고 싶었던 거야.”
언젠가 레테가 바랐던 모습 그대로.
“너는 날 증오하니까. 그것밖에 안 남았으니까.”
몸이 서서히 무너지며 바닥과 무릎이 닿았다. 헤일라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눈물을 떨구었다. 차마 믿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스스로의 입으로 내뱉는 이 상황이 치가 떨렸다.
“바보 같았어. 언니 말이 맞아. 머저리처럼 혼자 붙잡고 있었던 거야. 그러면 언젠가, 언젠가 다시 언니 동생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기회가 올 거라고……”
“헤일라.”
“이미 다 끝난 건데…….”
레테가 계속 불러도, 그녀는 어딘가 망가진 사람처럼 중얼댔다.
“그래서.”
“……”
“그래서 날 버릴 거니?”
헤일라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언니와 눈을 맞췄다. 이 꼴이 되고도, 자신을 이 꼴로 만들어 두고도 믿음과 약속을 운운하는 레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도 그런 게 중요해?”
“버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어리석지 않은 여자였다. 그녀는 영리하고 계산이 빠르며 이치를 파악하는 데 능했다. 그러니 헤일라가 느끼는 분노와 상실감, 그리고 분노를 전혀 모르는 게 아닐 터였다.
“내가 이렇게 안 했으면 넌 날 버렸어. 그 새끼를 선택했을 거라고. 결국에, 그렇게 됐을 거라고!”
그럼에도 이렇게 악을 쓰는 건, 이토록 잔인하게 구는 건, 정말로.
“……그냥.”
나를 한 치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그냥 그때 죽을걸.”
헤일라는 멍하니 중얼댔다. 피비린내가 온 집안을 휩쓸고 옷소매까지 닿았을 때, 언니가 고깃덩이들을 가리키며 저 꼴로 죽고 싶은 거냐고 물었을 때 그냥 죽을 걸 그랬다.
“그때 언니한테 죽어 줄걸.”
헤일라는 그 말을 남기고 한참을 서 있다가 천천히 뒤돌아 방을 나왔다. 침대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헤일라는 텅 빈 눈으로 대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정처 없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무작정 산을 올랐다.
죽었어야 했는데. 그때, 그냥, 그때…….
천천히 걷던 걸음이 어느샌가 빨라졌다. 그러다가 점점 더 속도가 더해져 미친 듯이 위를 향해 뛰었다. 그녀는 달리고, 달리고, 달리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철푸덕,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으나 반응하는 것은 작은 산짐승들뿐이었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헤일라는 그 사실을 깨닫고 일어나지 않았다. 흙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몸을 구부려 무릎을 안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옆으로 줄줄 흘러내려 가 귓가까지 닿았다. 그녀는 아무래도 좋은 사람처럼 그냥 눈만 깜빡, 깜빡 감았다 떴다. 시야가 자연스레 발끝에 닿았다.
“아.”
그곳에는 리안이 선물한 신발이 흙투성이가 된 채 발에 끼워져 있었다. 아주 값비싼, 편안한, 익숙한, 신발이.
“욱…… 우욱…….”
갑자기 헛구역질이 올라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나 결국 낮에 먹었던 모든 걸 흙 위에 게워 냈다. 토기가 멎지를 않아 결국 가슴을 치며 모든 걸 게워 냈다. 하지만 멀건 쓴물만 흘러나올 때가 되어서도 속에 무언가 얹힌 듯 꽉 막힌 압박감은 옅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그녀를 짓눌렀다.
“흐, 으윽, 으으으…… 흐, 허어…….”
그녀는 깊은 바다에서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처럼 숨쉬기가 힘들어져 가슴을 퍽퍽 쳤다.
“아, 흐으으으……. 으윽…….”
차라리 정말로 익사해 버렸으면.
몸을 늘어트리고 힘을 뺐다. 헤일라는 몇 시간 동안 그렇게 스스로를 방치했다. 해가 움직이며 자신의 그림자가 휘어지는 것만을 응시하다가 점차 어두워져 그조차 희미해졌을 때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멀건 얼굴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그녀는 엉망이 된 제 몸을 추스르지도 않고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어둑한 산이, 높은 나무가, 축축한 흙이 낯선 사람처럼 한참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아, 닭고기 스튜 해야 하는데.”
헤일라는, 언니가 화내면 어떡하지, 하고 중얼댄 뒤 비척비척 걸었다. 그녀는 어두운 산길을 내려가면서 몇 번이고 넘어졌다. 그러나 저 혼자 히죽, 웃은 뒤 다시 일어나 서둘러 산을 내려가 집으로 향했다.
자신이 갈 수 있는 유일한 집으로 쉬지 않고 걸었다.
* * *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헤일라는 천천히 레테의 방문을 열었다. 불이 꺼져 있는 방은 어두웠고 레테는 몸을 돌린 채로 미동이 없었다. 헤일라는 굳이 확인하지 않고 언니가 자는 것이라 여기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서 닭고기 스튜를 대신할 음식을 고민하다가 채소와 토마토를 꺼내 손질하기 시작했다.
탁탁탁, 스걱, 스걱.
텅 빈 공간에는 칼질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헤일라는 다듬어진 재료를 기계처럼 썰고, 썰고 썰다가 채소가 심하게 짓물렀다는 걸 깨닫고 냄비에 옮겨 담았다. 낭패감이나 당혹감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물을 붓고, 스튜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잘 저어 주었다.
몇 시간 뒤 걸쭉하게 끓인 스튜를 그릇에 옮겨 담고 쟁반 위에 올렸다. 그리고 익숙하게 언니의 방에 들어가 레테의 침대 옆 탁자에 쟁반을 올려 두고,
“언니, 밥 먹자.”
하고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