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 여자를 통해 편지를 보냈더구나. 저택으로.”
‘마리는 일 관뒀어요. 말도 없이 그만둬서 이번 달 내내 내가 대신 배달했다고요.’
무책임한 동료에 대한 불쾌감을 담아 뇌까리던 배달부의 말이 기억 어딘가를 스쳐 지나갔다. 선명해서 외면할 수도 없는.
“이게 그 편지란다. 마지막에는 아주 친절하게, 너에게 보여 주어도 상관없다고 쓰여 있지.”
그래도 외면할 텐가? 공작은 매끄럽게 웃었다. 먹잇감이 움직이는 방향을 기민하게 살피는 뱀 같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
“네 언니가 나에게 한…… 부탁이야. 믿기지 않으면 돌아가서 물어도 되는 일 아닌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언니가 원한 거라면. 헤일라는 그것을 알아야 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다시 자리에 앉고 편지를 집어 들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헤일라는 자신의 믿음이 굳건히 버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깟 편지 한 장은 아무것도 바꿔 놓을 수 없으리라. 자신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더 견고해져 있다 자신했다.
그러나 진창으로 처박히는 건 아주 쉬웠다.
‘리안 휴리트가 귀족임을 알아본 제가 먼저 그에게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정갈하면서도 독특하게 끝이 말려 올라가는 언니의 글씨체가 맞았다.
‘그가 시키는 대로 동생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죠. 리안 휴리트는 헤일라가 지쳐서 자신에게 의지하기를 바랐거든요. 아무튼, 저는 그 대가로 보름에 한 번 제공하는 카탈로그에서 원하는 장신구 하나를 골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언니일 수 있단 말인가? 종이 위에는 구체적인 폭력의 수위와, 모멸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단어들. 그리고 노골적인 만큼 확실한 패악의 대가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타바에를 구하러 가게 만든 것도 약속된 일이었습니다. 하루 늦게 돌아오면 헤일라를 구타해 상처입히는 것까지도요.’
연결되기 어려워 보이는 행위와 대가가 헤일라 자신을 중심으로 얽어 들어 완벽하게 균형을 맞추었다. 언니가 매일같이 자신에게 패악을 부리고, 남자는 자신을 달랬던 일. 레테가 타바에를 구해 오라 무리한 요구를 하고, 리안이 돕겠다고 따라나선 일.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춤을 췄다.
‘얼마 전 그는 헤일라를 완전히 꿰어 내기 위해 저에게 독약과 명약을 복용하도록 종용했습니다. 이후에는 리안 휴리트의 뜻대로 되었고요.’
그의 신분을 알게 되어 멀어지고자 했을 때 급작스럽게 나빠진 언니의 건강. 기다렸다는 듯 뻗어진 리안의 손길. 레테를 구하기 위해 혼인을 해야 한다며 안절부절못하던, 죄스러워하던 리안.
‘공작께서 내게 더 큰 것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항상 내 삶을 망가트린 게 신이라 생각했는데.
‘이후에 이걸 동생에게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그 애 또한 기꺼이 공작님의 뜻에 따르게 될 테지요.’
사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망치고 있었다.
또렷하게 쓰여 있는 문장들이 띄엄띄엄 머릿속에 입력되었다가 그대로 부서졌다. 모든 감정의 경계가 유화의 선들처럼 모호하게 흩어졌다. 어지럽다.
그 와중에도 마지막 문장은 간결해 눈에 잘 띄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전달한 계집은 조용히 처리해 주시길.’
* * *
다른 어떤 사족도 붙어 있지 않았다. 헤일라는 떨리는 턱을 악물고 손끝으로 활자들을 더듬어 보았다. 종이는 허상이 아니었다.
“너는 네 언니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 여기니까.”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여자는 새로 들이닥칠 혼란을 거부하고 싶은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러나 타센이 멈춰 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았어야지.”
“…….”
“네 언니는 너의 그 같잖은 죄책감 덕에 가장 좋은 패를 쥐고 있었던 거야.”
모든 감정이 휩쓸고 지나가 무엇을 감각하는지 스스로 가늠하지 못하는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타센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텅 비었지만 아름다운 금안을 정확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레테라는 계집은 끝에 가서 리안이 자신을 죽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
“너와 달리 영리하지. 어디 붙어야 저가 사는지 잘 알아. 그러면서 분에 넘치는 이득까지 취하지.”
태생이 아까운 계집이야. 그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헤일라는 벌이 귓구멍 안을 파고들 듯 괴기스런 소리가 귓속을 지배해 공작의 목소리에 집중하지 못했다.
타센은 그런 헤일라를 보고 나직이 한숨을 쉬고 등받이에서 몸을 떼었다. 그리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탁자 위에 두 손을 모아 올렸다. 그는 헤일라가 어떤 상태이든 저 할 말을 마치고 싶은 사람 같았다.
“자, 이제 너에게도 선택지를 줘야겠지.”
공작의 입에서 나오는 선택지는 죄다 헤일라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고통을 주입시키는 그에게 욕을 퍼부을 힘도 없는지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럼에도 타센은 멈추지 않았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뒤에 그는 잠시 침묵했다.
누군가 무너지는 모습을 관찰하는 남자는 바위처럼 메말라 있었다. 세월의 풍파에 마모되어 연약해진 바위. 그만큼 지치고 고통에 차, 언제고 부서지기만을 염원하는, 그리하여 가장 거대한 파도만을 고대하는 낡은 인간의 모습이었다.
“답은 내일까지 준비하도록.”
* * *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헤일라는 리안을 배신한 수하가 안내하는 대로 작은 방에서 나와 다시 산의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미친 듯이 뛰었다. 뛰고, 뛰고, 뛰어 집으로 향했다.
낡고 낡은 나무 문을 부수듯 밀쳐 집으로 들어가서 언니의 방을 찾아 앞에 섰다. 그 앞에서 헉헉대며 숨을 골랐다. 손을 문고리 위에 올려 두니 서늘한 온도가 손바닥 안쪽으로 기어들어 왔다.
얼른 들어가야 했다. 서두른 만큼 얼른 문을 열고 언니를 마주한 뒤에, 자신이 들은 허무맹랑한 말들을 언니에게 털어놓고, 또 한심스레 멍청한 말에 넘어간 자신을 언니가 타박하길 기다려야 하는데……
‘너에게 기회를 주려고 해.’
왜 갑자기 그날이 떠올랐을까?
“들어와.”
딱딱한 명령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문 너머의 레테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언제나와 같은 언니의 음성이었다. 평소 가슴을 선득하게 만드는 냉정함이 오늘만큼은 정겹게 느껴졌다.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헤일라는 살포시 웃으며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손이 떨렸으나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레테를 마주하면 이깟 떨림은 금세 잦아들 테다.
“언니.”
나 정말 이상한 말을 들었어. 언니가 나를 리안한테 팔아넘기려고 이제까지 연기를 했대. 리안은 언니한테 피를 토하는 약을 주고, 언니는 그걸 먹은 거래.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도 공작이 너무 사실처럼 이야기해서 정말인 줄 알았어. 나는 너무 놀라서…….
마차를 타고 산 아래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준비해 둔 말들이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침대로 달려가 종알종알 불안과 안도를 동시에 늘어놓으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앞에 서서는 한 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다.
레테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이 헤일라를 외면하는 모습일 뿐인데 불길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저 자신의 문제라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헤일라는 오른발을 떼 한 걸음 다가갔다.
“언니.”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녀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레테가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그래.”
“……”
“잘 다녀왔니?”
그 순간 헤일라는 자신의 입이 왜 얼어붙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내 말대로 빨리 돌아와 줬네.”
이런 얼굴을 볼까 봐 겁이 나서였다. 모든 것을 다 알고서 매끄럽게 웃고 있는 가증스러움을 마주할까 봐.
돌덩이 같은 발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이라도 더 확실히 레테의 얼굴을 봐야 했다. 그리고 입을 열어 무어라도 물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성대는 얼어 버린 수도관처럼 아무런 목소리도 내놓지 못했다.
“지친다.”
“…….”
“너도 그렇지?”
짧은 시간 어둡고 긴 호수처럼 음침한 고요가 둘 사이에 흘렀다. 레테가 잠시 입을 달싹이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말했다.
“이제 돌아가자.”
“……어디로?”
“예전으로.”
예전으로. 헤일라는 귀로 들은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녀의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가늠해 보려는 최대한의 노력이었고 부정해 보려는 발버둥이었다. 그러나 파도가 배를 피해 가지 않듯, 불행 또한 헤일라를 빗겨 가지 않았다.
“오늘, 너도 들었으니 알 거야. 리안 휴리트가 어떤 남자인지.”
“…….”
“네게 얼마나 미쳐 있는지. 그 남자는 널 망칠…….”
“거짓말.”
그녀는 마치 묵직한 돌을 움직이는 사람처럼 천천히, 힘겹게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해. 내가 들은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
“평소처럼 화내면서, 그걸 믿었냐고, 모지리라고 욕해 줘야지, 응?”
헤일라는 그녀가 언니를 사랑했던 만큼의 믿음을 담아 레테를 마주 봤다. 무슨 변명을 하든 믿을 요량이었다. 아무리 허무맹랑한 말을 한다 해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못된 악인의 꼬임에 넘어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할 참이었다.
그녀는 언니의 말을 아주 잘 듣는 착한 아이니까. 레테가 하라고 하는 대로 하고, 사실이라 이르는 것을 믿고, 가르치는 대로 행동하는 동생이니까. 그렇게 살면 버림받지 않고 영영 언니와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일방적으로 쏟아붓는 헌신에 애정으로 보답받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었다 해도.
“왜?”
그게 혼자 맺은 약속임을 지금 알게 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은가.
“내가 한 게 맞아. 아마 네가 들었을 말들 전부다. 공작에게 그렇게 부탁해 두었으니까. 내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믿음이 가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