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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34화 (34/97)

34화.

“식사 챙겨 올게! 오늘은 특별히 더 맛있을걸?”

나무 쟁반에 음식을 담아 나른 헤일라는 침대에 간이 탁자를 펴 올린 뒤 따끈한 음식을 차렸다. 언제나처럼 정성을 들인 식사였다. 레테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어 수프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식사 내내 말없이 수저만 놀렸다.

평소에는 반도 먹지 못하고 남기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그릇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깨끗하게 음식을 비웠다. 헤일라는 그것이 못내 감격스러워 활짝 웃었다.

“괜찮네.”

레테는 동생의 반응이 멋쩍은지 어중간한 칭찬만 남기고 상을 치우라고 닦달했다. 헤일라는 실실 웃으며 자리를 정리하고 약을 챙겨 준 뒤 다시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오늘도 마을에 가지?”

오늘은 언니 기분이 정말 좋은가 봐. 헤일라는 레테가 먼저 말을 걸어 주었다는 사실에 사뭇 감동하여 속으로 중얼댔다.

“응! 혹시 저녁에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지금 다 말해! 뭐든 다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됐어. 필요 없어.”

“에이, 그러지 말고. 방금처럼 잘 먹어야 얼른……”

낫지. 헤일라는 언젠가부터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자책했다. 말을 조심했어야 하는데. 언니는 자신의 몸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비관적이었고, 그래서 동생이 희망적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악을 썼다. 환자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헤일라 또한 어느 순간부터 병이 낫는다는 말 따위를 하지 않게 되었을 정도였다.

그녀는 날아올 레테의 폭언을 예상하고 침묵했다. 하지만 헤일라가 받은 답의 정말로 의외였다.

“닭고기를 넣은 스튜.”

레테는 화를 내지 않고 동생의 물음에 친절하게 답해 주기까지 했다. 게다가 닭고기를 넣은 스튜는, 헤일라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어릴 적 레테가 자주 해 주던 음식이다.

“왜 그렇게 봐?”

“……아니, 아냐, 아무것도. 또 먹고 싶은 거 없어?”

“없어.”

“응, 그럼 얼른 다녀올게!”

레테의 묘한 변화가 긍정적인 신호임을 확신한 헤일라는 신이 나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눈가는 약간 붉어져 있었다. 헤일라는 몇 번이나 레테의 이부자리를 점검한 뒤 방을 나서려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런데 손목을 뒤틀어 한 치 정도 문을 움직였을 때 레테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헤일라.”

단단한 쇠 위에 얹어져 있던 얇은 손이 움칠 튀었다. 자신이 호명되어서가 아니었다. 이름 한 글자 한 글자를 읊는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나……

“조심해서 다녀와.”

너무나 그리운 때와 겹쳐 있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찍 들어와야 해.”

걱정과 애정을 담은 차분한 목소리. 분명히 레테의 것이었던, 그러나 지난 몇 년간은 레테의 것이 아니었던 다정함이 녹아 있는 걱정이었다. 헤일라는 천천히 뒤돌아서서 응, 하고 작게 대답했다. 언니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하고 바닥만 응시한 채였다. 얼굴을 보면 눈물을 쏟아 내어 레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게 뻔했다.

헤일라는 방을 빠져나와 삐져나오는 콧물을 씩씩하게 휴지에 푼 뒤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가벼웠다.

* * *

언제나처럼 식재료를 사기 위해 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둘에게 먹일 음식을 직접 한다는 데 자부심이 있었고, 그래서 매일 부지런을 떨며 시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날 헤일라는 계획했던 그 무엇도 해내지 못했다.

시내에 도착하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붙잡혔기 때문에.

복면을 쓴 사내들은 헤일라 같은 가녀린 여인 정도는 아주 손쉽게 납치하여 끌고 갔다. 마침내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한 그녀는 달달 떨면서 리안과 레테를 걱정했다. 어두운 방 안에 앉아 감히 눈앞에 앉아 있는 이를 볼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사랑하는 둘에 관해서만 생각했다. 자신을 납치했다면 리안과 레테에게도 해를 끼칠지 모르니까.

잠깐 찾아온 행복으로 족하니, 제 목숨 하나로 둘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리라 맹세하며 신에게 빌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남자가 둘 사이의 탁자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헤일라의 턱을 들어 올렸을 때 모든 생각이 정지했다.

리안과 착각할 정도로 닮은 얼굴. 그는 무료함과 건조함을 섞은 표정까지 사랑하는 남자를 닮아 있었다.

“흠.”

그는 창백한 볼을 꽉 잡고 거칠게 얼굴을 돌려가며 외모를 감상했다.

“예쁜데.”

후한 평가를 내놓은 타센은 손을 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제 나를 보지. 아래는 그만 보고.”

그는 의외로 신사적이었다.

“……당신, 공작이죠.”

“그래.”

“저를 죽이실 건가요?”

“나는 그냥 이야기를 하러 온 것뿐이야.”

이야기? 의심이 가시지 않은 헤일라는 그저 고개만 한 번 까닥였다. 그리고 정면으로 바라본 공작의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아아, 만난 적이 있던가.”

언젠가 리안의 뒤에 서 있던 사람. 리안이 이것저것 일을 시키는 것을 봤었다. 둘이 집을 비웠을 때 레테를 돌보는 일을 맡기기도 했었다. 지금 공작과 함께 있다는 건,

“리안이 네 뒤에 붙여 둔 놈이야. 이제는 내 사람이지만.”

“그를 배신했군요.”

헤일라는 분한 얼굴로 공작 뒤의 남자를 쏘아봤다. 그러나 동요하는 사람은 헤일라 혼자였다.

“선택이지. 충성을 얼마에 팔지 정하는 건 본인이야.”

“그게 배신이에요.”

“이상한 것에 집착하는구나. 네가 궁금해야 할 건 따로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가 제일 궁금하네요.”

“물론 그것도 꽤 중요하겠구나. 하지만 내가 ‘어떻게’ 아들의 사람에게 접촉했고 회유했는지가 조금 더 중요하단다.”

그는 사뭇 다정한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리안은 조심성이 꽤 좋은 편이지. 거처를 알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어.”

리안은 황제의 도움으로 자신의 대역 여럿을 두고 제국 각지를 움직이도록 했다. 그중 몇 명은 공작이 눈치챌 수 있을 만큼 허술하게 숨었고, 몇 명은 치밀하게 몸을 숨겼다. 이것까지 리안이 명령한 부분이었다. 공작이 아들을 오래도록 찾지 못한 이유였다.

“네 언니라는 여자가 알려 주지 않았다면 널 데려오지도, 리안의 사람을 회유하지도 못했을 거야.”

“……언니?”

여기서 왜 레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언니는 혼자서는 걷지도 못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공작과 접촉해 은밀한 이야기를 나눈단 말인가. 얼이 빠진 와중에도 분기가 찼다. 지금, 감히, 누구를 걸고넘어지는 거지.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삶을 견뎌 보려 안간힘을 썼던 언니였다. 그럼에도 매번 진탕을 뒹굴어 종래에는 모든 희망을 빼앗긴 가족이었다. 그리고 레테를 절망으로 처박은 건 항상 이 남자처럼 파렴치하고 교활한 인간들이었다.

“보아하니 믿기 힘든가 본데, 레테라는 여자가……”

“그 입 닥쳐.”

끔찍했다. 레테는 아무렇게나 다루어지고 밟혀도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소중하고 소중한, 헤일라의 유일한……

헤일라는 거칠게 의자를 밀고 일어난 뒤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그가 쥐어 잡아 폭력을 행사한다 해도, 레테를 기만하는 행위에 동참할 수는 없었다. 잘 짜인 각본 속에서 아픈 언니가 휘둘러지는 꼴을 보지 않을 테다.

주먹을 꽉 쥐고 등진 헤일라를 붙잡은 건 차분한 음성이었다.

“높은 나무의 열매일수록 낮은 곳에서 취해야 하는 법인데.”

헤일라의 발끝이 주춤, 하고 멈췄다.

“타바에는 나무에 올라가서 따는 나무가 아니야. 아래에서 도구를 사용해 떨어트리거나 나무를 거칠게 흔들어서 수확하지.”

“……”

“성격이 어지간히 급해. 숨을 죽이고, 어떻게 해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지 진득하게 고민할 줄 알아야 쟁취할 수 있는데. 타바에를 구할 때도, 지금도 너무 성급하지 않나.”

그가 성가시다는 듯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헤일라는 천천히 뒤돌아 다시 타센을 응시했다. 리안과 헤일라 단둘만 있었던 장소의 일을 그가 어떻게 알고 있나. 혼란에 잠겨 숨이 턱 막혔다.

“네 언니는 리안이 너를 따라나설 걸 몰랐을까.”

“……”

“리안은 그날 산 깊은 곳에 있던 오두막을 어떻게 찾았을까.”

그가 품에서 질감이 나쁜 싸구려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던지고 그것을 펴 보라 턱짓했다. 분명 종이 한 장일 뿐인데 묘한 위압감이 감돌았다. 이상한 일이다.

별거 아닐 거야.

나비처럼 가뿐하게 나무 책상 위에 내려앉았건만, 들어 올리려 하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추처럼 느껴졌다. 까끌한 봉투를 겨우 들어 올려 매만지니 불규칙한 굴곡이 손끝에 잡혔다. 한 손으로 봉투의 양 끝을 눌러 벌리고 탁자 위에 내용물을 쏟아 냈다.

나온 것은 두 번 접어 둔 종이 한 장과 약으로 보이는 붉은 조각 하나, 그리고 같은 모양의 푸른 조각 하나였다. 헤일라는 이게 무어냐는 듯 물음을 담아 타센을 응시했지만, 그는 침묵을 지키고 조각들과 함께 나온 종이에만 시선을 주었다.

……읽어야 할까?

그녀의 입이 잠깐 달싹였다. 이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저걸 펼쳐 읽었는데, 혹시, 아주 만약에……

“읽, 지 않을 거야.”

종이를 든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남자가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였다.

“당신이 하려고 하는 모든 일은, 전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테니까.”

“아아, 내가 원하는 대로는 움직이지 않겠다.”

미처 맺지 못했던 진심을 그가 대신 내뱉었다. 정말로 재미있는지 목소리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속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떤가.”

“……”

“네가 이 편지를 보기를 바라는 게 네 언니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언니가 왜. 무슨 이유로? 그럴 이유도 없었다. 어찌 되었든 리안은 언니의 치료를 도왔고, 나는.

“신문 배달하던 여자, 기억하고 있겠지. 웃돈까지 얹어 주면서 집 안으로 일간지를 나르게 했다던데.”

나는 언니의 동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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