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리안은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타센의 반응을 확인할 수 없었다. 타센은 잠시 침묵하다가 리안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안대 너머로 공작 특유의 집요한 눈길이 느껴졌다.
“그럴 리가.”
돌아온 대답은 시시했다. 공작은 타델리아가 그의 죽음을 바랐을 것이라는 리안의 대답을 간단하게 부정했다. 그는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랑이라는 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지. 타델리아는 그중에서도 특히 더 어리석은 편이었다. 네가 그 점을 쏙 빼닮았어.”
이상했다. 그는 마치 타델리아가 공작 자신을 사랑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사랑과 신뢰를 같은 선상에 두고, 사리 분별을 못해서 일을 그르치는……”
“미안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리안은 헤일라를 사랑했지만,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영원을 약속한다 해도 어떤 계기가 있다면 리안을 뿌리치고 달아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래서 단단한 족쇄를 만드는 데 애썼던 것이고. 하지만 아들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미간을 좁히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찰 뿐이었다.
“너는 정말로…… 네 어미와 닮았구나.”
“……”
“끝까지 의심조차 하지 않아. 이 꼴이 되고서도……”
리안은 저도 모르게 타센의 의도대로 용의 선상에 있는 이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황제는 타델리아의 몸에 불을 붙일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게 뻔해 알리지 않았다. 아는 것은 베르디안과 뒷일을 처리할 해결사 하나, 미아르와 그녀의 수족 하나. 그리고……
불안과 불쾌가 스멀스멀 목덜미를 둘러쌌다. 수작질이라 부정하며 아비에게 분노를 터트리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눈앞이 선명해졌다. 타센은 리안의 눈을 감고 있던 천을 풀어낸 뒤 옆으로 던지고 그의 앞에서 비켜섰다. 리안의 시야가 트였다.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의 시야 안에 공간 안의 모든 것이 들어찼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갇혀 있던 곳이 신전의 가장 신성한 공간, 리듀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천장을 찌르듯 높이 솟은 빛기둥도, 그 속에 있는 신의 검도, 몇 년 만에 대면한 아비의 얼굴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단 한 사람.
“헤일라.”
창백한 얼굴로 타센의 앞에 서 있는 헤일라만이 그의 눈에 또렷이 잡혔다.
“헤일라.”
그는 몇 번이고 타센의 옆에 망부석처럼 서 있는 헤일라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을 바라는 호명이 아니었다. 차마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서 존재를 부정하고자 입을 빠끔대는 것뿐이었다.
“응, 안녕.”
헤일라는 거리낌 없이 화답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해 냈다. 당신을 버렸다 고백하는 신처럼,
“리안.”
평소처럼 어여쁜 모습을 하고서. 그에게 다가섰다.
* * *
꿈은 때때로 인간을 과거의 끔찍한 중턱에 데려다 놓는다. 차라리 하늘을 나는 괴물이 나타나 인간들을 도살하거나, 불을 뿜는 용이 날아와 모든 걸 부숴 버리는 허무맹랑한 허상이면 좋으련만. 그러면 차라리 허상을 쉽게 파훼할 수 있을 텐데, 지독한 꿈은 기억에서 한 치도 빗겨 가지 않았다.
‘너한테는 기회를 주려고 해.’
헤일라는 며칠 전 과거를 답습하는 꿈속을 유영했다. 그 속에서 흰옷에 피를 흠뻑 적시고 웃는 레테는 마치 낯을 든 저승사자 같았다. 그녀는 낡은 나무 집 주방에 서서 헤일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가 어떻게 집에 왔지? 꿈속의 헤일라는 멍청하게 생각했다. 어머니께서는 언니가 서부 백작가에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로 고용됐다고 알려 주었다. 돌림병이 낫고 이 년이 지나도록 언니를 만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헤일라는 레테가 자신을 만나러 휴가를 냈을지도 모른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껏 편지에 답장조차 없던 언니가 돌아온 건 기쁜 일이었다. 그럼에도 헤일라는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주춤대며 뒷걸음질을 쳤다. 온몸에 언젠가 살아 있었을 생명의 혈흔을 두른 언니가 무서웠던 까닭이다.
‘고맙게 생각지 않아도 좋아. 어쨌든 넌 지금 선택해야 해야 하거든.’
피 묻은 칼을 발견한 건 순전히 레테 때문이었다. 그녀는 목을 빳빳이 세운 채로 눈알만 움직여 동생을 훑은 뒤, 식탁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첨예하게 벼려진 단도가 손잡이까지 시뻘게진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레테의 붉은 옷과 피로 진득해져 있는 손, 그리고 떨어져 있는 단도는 아주 잘 어울렸다.
그 순간, 헤일라는, 언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눈치챘다.
드디어 죽였구나. 지긋지긋했던 부모와 자식 간의 끈질긴 악연이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부모의 악덕이 자매의 삶에 산적해 있었으므로 살인의 동기는 충분했다. 그러나 동시에 동기가 부족했다. 레테는 언제나 자신이 부모들을 죽일 것이라 말해 왔지만 실행하지 않았으므로, 갑자기 피를 볼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지난 이 년간 레테는 부모를 찾아오지 않았고, 부모 또한 그러했다. 헤일라는 이것이 언니의 행복에 크게 기여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왜?
혼 없는 몸뚱어리 두어 개가 집 안에 있다 생각하니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헤일라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움직임을 무어라 해석했는지 레테가 핏방울 묻은 볼을 씰룩이며 웃었다. 그리고는 우아한 귀족처럼 나붓하게 걸어 부엌 바로 옆의 방 문고리를 잡았다. 부모라 부리던 이들이 쓰던 방이었다.
달칵, 하고 문이 열리면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마찰음이 들렸다. 어쩐지 헤일라는 그 순간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았다.
‘자, 어느 쪽이지?’
문이 활짝 열렸을 때, 도축장에서나 흐르는 고약한 내음이 훅 끼쳐 들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살덩이들, 해체되어 있는 내장, 낭자한 핏물…… 그리고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어미의 금색 머리칼과 아비의 투박한 손가락들.
헤일라는 아찔한 기분에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그럼에도 레테는 차분하게 읊조릴 뿐이었다.
‘여기?’
그녀는 빼빼 마른 손으로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돌연 웃음을 머금고,
‘아니면, 저쪽?’
고깃덩이가 된 인간들 쪽을 가리켰다. 가여운 동생에게 고약한 심술을 부리는 언니는 미소 짓고 있음에도 어딘가 초라해 보였다. 아니, 그보다는…… 부모에게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불안한 낯가죽이 아닌가.
반짝.
지나치게 선명한 과거를 보여 주던 꿈이 부서졌다. 눈을 뜬 여자의 얼굴에는 온통 눈물이 흠뻑 적셔져 있었다. 헤일라는 그걸 무성의하게 손등으로 닦으며 일어났다.
재수 없는 꿈이다. 일어나려 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헤일라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발을 디뎠다. 그녀를 숨어서 지켜보며 조롱하는 이는 있지도 않거늘, 그녀는 보란 듯이 힘주어 걸었다. 일종의 오기였다.
“다 지난 일이야.”
나직하게 쉰 소리를 내 봤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헤일라는 비척비척 걸어 주방을 확인했다. 간단한 아침 식사 거리가 준비되어 있는 걸 보니 리안은 일찍 집을 나선 모양이었다.
그녀는 언니를 살피기 위해 레테의 방으로 향했다. 아침잠이 많은 편인 레테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파란 집에서 구해 온 약을 먹인 뒤로는 혈색도 점점 좋아졌다. 리안의 말대로 신전에 가서 좋은 치료를 받으면 침상에서 일어나 이전처럼 걸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이 지긋지긋한 불행이 조금은 떨어져 나가게 되는 거다. 헤일라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약간 나아졌다.
빈민들이 으레 그러하듯 헤일라 또한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이들에 비해 특히 더 불행한 편에 속했다. 언니가 사창가에 팔려 가 난치병을 얻고, 조각난 부모의 시신을 손수 묻는 경험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헤일라는 신이 자신을 미워해서 인생을 망친다 생각하곤 했다. 언니와 리안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끝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언니는 곧 좋은 치료를 받아 이전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올 테고, 리안과는 혼인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의 헤일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음날을 고대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더 좋은 미래를 마음껏 욕심내게 되었다. 리안과 레테가 자신의 세상을 구했노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 잘될 거야.
헤일라는 꿈 때문에 뒤숭숭한 마음을 다잡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불안해할 이유가 없는데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언니가 좋아하는 버섯 요리와 따뜻한 수프를 정성스레 끓이기 시작했다. 뻑뻑한 식감을 선호하는 레테의 취향에 맞추어 오래도록 서서 수고를 들였다.
적당히 간을 하고 오래도록 저어 뭉근히 졸인 뒤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한 김 식힐 겸 식탁 위에 음식을 놓아두고 깨끗한 물을 대야에 담아 레테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질 만큼 벽이 얇아서 그런지, 레테는 깨어 있었다.
“잘 잤어?”
배시시 웃으며 묻자 레테는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약간 잠에 젖어 있는 얼굴이었다. 헤일라는 익숙하게 침대 옆에 앉아 수건에 물을 적시고 꼭 짜서 레테에게 건넸다. 레테는 그것을 받아 들고 젖은 천으로 얼굴과 손을 닦아 낸 뒤 헤일라에게 다시 주었다.
헤일라는 물에 수건을 다시 적신 뒤 이불을 조심스레 걷어 언니의 다리를 부드럽게 닦아 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새로 구입한 목욕 천은 언제나처럼 보드라웠다. 아무리 돈에 쪼들려도, 헤일라가 언니의 몸 닦는 천만큼은 결이 좋은 것만 구입해 사용한 덕분이었다.
“이제 그만 닦아도 돼.”
“아, 응.”
헤일라는 반점이 올라와 약간 거뭇한 복숭아뼈 주변을 살짝 문질러 준 뒤 손을 거두었다. 자잘했던 반점이 약간씩 커지는 게 느껴져 울적했지만, 티를 내면 끔찍이 싫어하는 언니를 알기에 애써 더 밝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