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04. 탈피
우웅, 우웅-
리안은 기묘한 울림소리에 눈을 떴다. 손발이 결박되어 있고 눈까지 가려져 있어 자신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건지 눈치채기가 쉽지 않았다. 다만 명확하게 감각할 수 있는 어떤 냄새가 이곳이 범상찮은 공간임을 방증하고 있었다.
피 냄새.
옅은 피 냄새가 코끝에 감돌았다. 그는 손목과 발목에 찬 족쇄가 단단한 철쇄 재질임을 눈치채고 침착하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몸을 조금씩 돌려 보니, 천으로 가려진 눈임에도 어느 한 부분이 강하게 빛나고 있음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무언가가 있나 보다. 리안은 침음을 흘리며 혀를 찼다.
아비를 죽이려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리안이 자신만 알고 있는 저택의 지하실 통로로 들어서는 순간, 강한 수면초와 독초 향을 맡고 몸이 마비되어 쓰러졌다. 리안이 독에 내성을 갖도록 어릴 때부터 관리해 온 사람이 타센이었으므로, 리안에게 통하는 독의 종류를 아는 이도 타센뿐이었다. 그러니 이건 공작이 준비해 둔 술수가 맞았다.
리안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부드럽게 기름칠 된 문이 열렸다. 방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자신의 등장을 숨길 마음조차 없는지 발소리를 죽이지도 않았다. 저택에서 리안을 포박해 여기까지 옮긴 이들이리라. 그리고 어쩌면.
“많이 컸구나.”
리안은 가장 아니었으면 싶은 인간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욕설을 뇌까렸다. 지척까지 다가온 중년의 남자는 앉아 있는 리안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를 관찰하듯 뜯어보았다.
“아이들은 금방 자란다더니. 타델리아 말대로야.”
그는, 리안의 아버지 타센 휴리트는 제 아내였던 여자가 했던 말을 짚으며 건조하게 웃었다.
“함께 살 적에는 몰랐는데 몇 년 새 이렇게 덩치가 커져서는……”
뭇 아버지들이 했다면 은은한 감동과 서운함을 담았을 말이거늘, 타센의 목소리는 공허하기만 했다.
“그 여자는 어디로 옮겼지?”
“그 여자?”
“지하에서 썩어 가던 네 여자.”
리안은 혐오하는 어떤 존재를 입에 담는 양 타델리아에 관해 물었다. 그 순간 두꺼운 손이 억세게 검은 머리칼을 틀어쥐었다. 두피까지 얼얼해질 고통에도 리안은 신음 한 자락 토해 내지 않았다.
“어머니라고 해야지.”
호칭을 정정하는 타센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모욕당해 분노하는 남자 같지 않았다. 공문서를 처리하는 행정가처럼 무미건조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는 타델리아의 부탁대로 좋은 아버지여야 했고, 좋은 아비는 아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마땅히 벌을 주어 행동을 교정해야 한다. 그러니 이것은 그저 마땅히 해야 할 훈육이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가 보이는 괴이한 모습에 공포감을 느끼고 복종했겠지만, 리안은 익숙한 듯 그저 침묵했다. 타센은 길게 숨을 내쉬고 약간 성가시다는 표정을 한 뒤 머리채를 쥔 손을 약간 뒤로 젖혔다.
곧이어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리안의 이마가 돌바닥에 사정없이 박혔다. 타센의 옆에 서 있는 이가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건만, 비정한 아비는 멈추지 않고 머리를 잡아 올려 다시 땅으로 내다 박았다. 땅이 옅게 진동할 정도로 센 강도였건만, 리안은 입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뜨끈한 피가 줄줄 흘러 얼굴의 반을 덮을 때가 되어서야 타센은 폭력을 거두었다.
“정말 변한 게 없군.”
그는 머리가 으깨져도 타델리아를 어머니라 하지 않을 아들을 알았기에 리안을 놓아 주었다. 언제부턴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아들을 보는 시선이 오묘했다.
“타델리아는 다른 곳에서 쉬고 있다. 친절한 네 사람이 알려 주어서.”
죽어 박제된 여자에게 쉬고 있다는 표현은 부적절했다. 그러나 이미 미쳐 버린 아비에게 짚어 줄 의욕 따위는 들지 않았다. 리안은 비린 피가 붉게 적셔 놓은 안대 안에서 눈을 끔뻑였다.
누구일까.
그는 궁지에 몰렸음을 알았는데도 태연하게 가늠해 보았다.
누가 입을 놀린 걸까.
다시 한번 속으로 중얼대 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이가 많지는 않았다. 원래부터 공작을 살해할 계획에 관해 아는 이들은 몇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인즉, 배신자를 색출하는 게 어렵지는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리안은 여기서 빠져나간 뒤, 며칠이 지나든 몇 년이 지나든 반드시 색출해 낼 작정이었다. 그는 꽤 치밀하게 이 계획을 준비했다. 그런 만큼 실패한 데 대한 화풀이는 결코 간단하게 끝나지 않으리라. 밀고자는 리안이 타센의 손에 죽으리라 생각하고 재물을 선택했겠지만, 리안은 결코 죽을 일이 없었다.
타센 휴리트가 타델리아 공주의 아들을 죽이는 일을 저지를 리가 없으니까.
“네 어미가 아니었다면 넌 진즉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그런데도 타델리아를 화마 속에 처넣으려고……”
리안은 부러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다 들통난 데다가, 영혼마저 떠난 껍데기를 불 속에 집어넣는 게 뭐가 잘못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죽은 여자를 못 잊어 그대로 방부 처리해 둔 공작 쪽이 더 악질적이지 않은가.
공작저에는 휴리트 가문의 가주만 알고 있는 지하실이 존재했다. 가주의 서재, 서재의 가장 오른쪽에서 세 번째 칸 책장을 뒤로 세게 밀면서 특정한 위치에 있는 책을 뽑으면 책장이 완전히 뒤로 밀리면서 지하로 가는 계단을 만들어 낸다.
리안은 다섯 살 때부터 나흘에 한 번씩 아비의 명에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타델리아와, 정확히 말하면 영원히 시간이 멈춘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공작은 최초로 지하실을 내려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함께 지하실로 걸음 하지 않았다. 그저 리안에게 지하실에 내려가서 해야 할 일들에 관해 짚어 주었다.
어머니라고 부르며 인사할 것, 무슨 음식을 먹었고 어떤 인간을 만났는지 이야기할 것. 경외와 사랑을 담아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투명한 유리관에 입 맞출 것.
공작은 타델리아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리안은 그녀를 사랑하길 바랐다. 적어도 리안이 느끼기에는 그러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며, 리안이 어미를 사랑하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 같았다. 이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시간이 지나 리안이 그 지루한 의식을 하지 않게 되었을 정도로 머리가 컸을 때, 그는 타델리아의 시신에 말을 거는 무익한 일 대신 지하실을 꼼꼼하게 둘러보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과 사용감이 남아 있는 책상과 의자, 두꺼운 책들이 잔뜩 꽂혀 있는 책장, 꽤 큰 침대까지.
지하실은 누군가를 가둬 두기 위해 여러 가구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대상이 죄인은 아닌 게 확실했다. 이렇게 너르고 안락한 감옥은 죄수에게 주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그러니 아마도, 감금의 대상은 타델리아였으리라.
그의 어머니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지하에 갇혀 타센에게 얽매여 부자유했다. 시시한 사실을 알아낸 리안은 부모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책장에 있는 여러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가 열다섯이 되었을 즈음, 아주 좋은 통로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타델리아가 읽었을 책을 꺼내는데, 묘하게 양장 제본된 책등 중앙이 오목하게 파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여러 번 책을 빼내기 위해 힘주어 누른 모양새였다. 유독 책들이 뻑뻑하게 꽂혀 있는 책장의 세 번째 칸에 꽂힌 책이었다.
여인의 힘으로는 한 번에 책을 빼내기 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타델리아의 관을 흘금 보았다. 그리고 다시 책장을 여러 번 살펴보다가 책장을 세게 밀면서 그 책을 반쯤 뽑아내 보았다. 지하로 들어올 때와 같은 방식이었다.
리안은 책장이 뒤로 매끄럽게 열리는 걸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책장의 뒤에는, 비밀스러운 통로가 있었다. 타센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그날은 통로의 존재만 확인하고 지하실에서 올라왔지만, 그는 몇 번의 탐색 끝에 리안은 통로가 외부와 연결되어 있음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저 여자는 왜 탈출하지 않았을까? 지하실로 들어설 때 내부에 있는 통로 안쪽으로 들어가 레버를 내리면 다시 책장이 원위치 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지하실 책장도 마찬가지니 손쉽게 탈출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궁금증을 품은 리안은 아비의 눈치를 살피며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떠봤지만 타센은 비밀 통로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언젠가는 탈출할지도 모르는 어머니를 왜 지하에 홀로 가둬 두었냐고 물었었다. 이에 타센은 문이 오직 하나뿐이고, 그 앞은 번견이 지키고 있으니 상관없었다는 답만 들려주었다. 번견은 공작 본인을 이르는 것이리라.
서재를 집무실과 겸해서 쓰는 이유가 타델리아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는 뜻이었다. 그는 자신이 집무실에서 일할 때는 타델리아를 지하에 가둬 두고, 일과가 끝나면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들에게 자신이 아내를 감금했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었다.
이후에도 리안은 그 지하실 비밀 통로의 존재를 함구했다. 언젠가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는 어미의 흔적으로 찾아낸 구멍을 통해 도망칠 수 있었다. 타센에게서 부상을 입고 저택에서 도망친 날, 그는 통로를 이용해 수도 외곽으로 도망쳤다. 헤일라와 마주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타센이 그 통로를 알고 있을 줄이야.
“불을 지르면 무슨 방법을 써서든 뛰어들 걸 알았거든. 그러면 일이 더 쉬워질 테니 거리낄 이유가 없어.”
리안은 지하실에 들어와 불을 지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 피부에 닿기만 해도 마비가 시작되는 강한 독을 타델리아의 온몸에 발라 두려고 했다. 타센이 불길 속에서 시신을 옮길 때 독에 중독되어 쓰러지면 여러모로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 일찍 발견되어 구조되어도 독 때문에 평생 침대에 누워 눈알만 굴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 흔적으로 찾은 통로라. 이렇게 써먹으면 ‘어머니’도 좋아하지 않으셨겠어? 널 죽일 수 있는 기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