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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31화 (31/97)

31화.

처음 리안은 레테의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그녀를 죽이고, 헤일라까지 완벽하게 취할 계획이었다. 레테에게는 헤일라를 영영 보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헤일라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일 년 정도는 정기적으로 만나게 해야 했다.

그리고 신전에 데려다 놓고 천천히 중독되는 마약류와 약을 함께 복용하게 만들면 교묘하게 몸을 쇠하게 만들 수 있었다. 워낙 몸이 약해져 있으니 신전에 들어간다 해도 완전히 회복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헤일라도 받아들이지 못할 결과는 아니다.

리안은 시간을 들여 헤일라가 레테의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판을 짜려 했던 것이다. 그래야 슬픔을 온전히 극복하고 자신에게 안겨 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제거 시기를 앞당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완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적이니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되겠지만…….

“타센 다음은 그 계집이 될지도.”

어찌 되었든 레테를 제거해야 하는 때가 조금 더 앞당겨지기는 할 것 같았다. 베르디안이 한숨 쉬듯 웃었다.

“그래. 그럼 이제 들어 보자고.”

공작을 죽일 묘수.

그 밤 내내 둘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비를 죽이려는 아들의 치밀한 계획에 관한 것이었다.

* * *

어둑한 시간에 귀가한 리안은 대문을 열고 맡아지는 새콤한 스튜 냄새에 작게 웃었다. 언제나처럼 헤일라가 그를 위해 준비해 둔 식사일 테다. 그는 모퉁이를 돌아 있는 허름한 식탁에 헤일라가 앉아 있기를 기대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작고 누추한 집이라 그의 걸음 몇 번만으로 부엌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를 맞이하고 있는 건 텅 빈 식탁뿐이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구나. 항상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용히 붙여 둔 심복에게서 다른 연락이 없는 거로 봐서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매일 헤일라의 손길이 닿는 나무 조리대 위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자연스레 곧 닿을 헤일라의 감촉이 상상되어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정말…… 괜찮아?’

얼마 전 집을 나서는 길에 그녀가 건넨 말이 문득 떠올랐다.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하는 입술은 사랑스러웠다. 헤일라는 요즈음 타센에 관한 것을 넌지시 물으며 낮게 심호흡하곤 했다. 오늘은 입술을 세게 깨물기에 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아비를 죽이려는 남자가 끔찍하냐고 반문하니 그녀는 사색이 되어 도리질 쳤었다.

‘다른 방법이 있는 건데 나 때문에 살인을 결심한 거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머뭇대는 게 어여뻐서 잠시 뜸을 들였더니 울먹임이 새었다.

‘언니를 살리는 데 정신이 팔려서 생각 못했어. 그런데…… 괜히 나 때문에 모르는 척 안 보고 살 수도 있는 아버지를, 굳이, 굳이 죽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안 그랬으면 좋겠어…… 흩어진 말들을 후회하는지 눈을 질끈 감는다. 리안은 그런 심정을 이해할 수는 없으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짧게 웃었다.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오래전부터 준비했거든.’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저택에 함께 살 때부터 아비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지금의 준비는 지난한 여정의 과정일 뿐이었다. 헤일라를 만나지 않았다 해도 필시 타센을 죽였으리라.

‘레테 상태가 좋지 않아서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야. 신경 쓰지 마.’

‘……미안해.’

실상 레테 때문이 아니라 황제와의 언약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임에도 적당히 부채감을 심을 수 있을 만한 말을 골랐다. 그는 본격적으로 거사를 준비하며 헤일라에게는 레테의 핑계를 대곤 했다.

‘위험한 건 아니지? 정말 지하에 불만 지르고 나오는 거지?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거, 안전한 곳인 거 맞지?’

‘고용한 자객들이 많아. 걱정하지 마. 그리고 정말 내가 하는 일은 불을 놓는 것뿐이야. 폐하와 약속까지 했는걸.’

물론 황제가 리안의 계획을 안다는 것도, 자객을 고용했다는 것도 거짓이었다. 불만 지른 뒤 빠져나온다는 것도 거짓이었다. 그는 타센이 끔찍하게 아껴 지하에서 절대 내돌리지 않는 ‘어떤 것’에 독을 바른 뒤 불을 지를 예정이었다.

타센은 반드시 제 손으로 그걸 지하에서 빼내려고 발버둥 칠 테고, 닿기만 해도 감각을 마비시키는 특수한 독은 그를 화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 전에 호흡기관까지 마비돼서 죽어 주면 더 좋고.

리안은 건조하게 생각하면서 천천히 걸어 손끝으로 나무 조리대를 끝까지 쓸었다. 그런데 그때, 방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레테의 방은 아니었다. 헤일라가 집에 있었던 걸까? 그는 묘한 의구심을 느끼며 나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헤일라?”

헤일라였다. 그녀는 침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 서 있어.”

나직한 음성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춰 온다. 아아, 리안은 흐트러진 눈동자를 감상하며 그 속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를 잠시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그런 무익한 상상은 도톰한 입술이 열리자 금세 사그라들었다.

여자는 무어라 말하고 싶은지 입술만 달싹였다. 묘한 위화감이 둘 사이를 갈랐다. 헤일라의 눈매가 엉망으로 일그러지고 눈물이 쏟아질 즈음 되었을 때 리안이 다시 한번 물었다. 조급증이 일었다.

“무슨 일 있었어?”

“……”

“헤일라.”

왠지 모르게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샅샅이 살핀 남자는 헤일라에게 성큼 다가가 한 손으로 뺨을 쥐어 올렸다.

“꼴이 왜 이래.”

자세히 보니 턱이며 손등이 까져 살이 물러져 있었다. 또 그 계집인가? 그는 레테가 헤일라를 상처 입혔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제 여자가 저렇게 엉망인 꼴로 눈물을 흘릴 일이 없었다.

하루빨리 죽여 버리고 싶다.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옆방으로 달려가 목을 졸라 숨을 거두고 싶다. 리안의 분노가 명치까지 밀려 올라왔을 즈음 헤일라가 무어라 젖은 목소리로 웅얼댔다. 그는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고 헤일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야트막한 몸을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헤일라가 빛나는 금발을 팔랑이며 그에게 안기는 것이 먼저였다.

움칠, 단단한 어깨가 위로 튀었다. 헤일라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푹 묻고 볼을 부비적댔다. 그때가 되어서야 리안은 능숙하게 여체를 품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매달리는 걸 본 적이 있던가. 헤일라는 강박이라도 앓는 사람처럼 그에게 매달렸다.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히뜩대며 달라붙었다. 사랑스럽게도.

“레테가 뭘 집어 던지기라도 한 거야?”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헤일라는 그냥 고개만 약간 끄덕이고 숨을 죽였다. 색색대는 게 꼭 아기 같아, 리안은 저도 모르게 픽 웃고는 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은 뭐 때문이었는데?”

혈육의 패악을 너무나 당연하게 감내하는 여자였다.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그러했다. 떼어 놓기 전까지는 맞춰 주어야 하는 부분임을 이제는 알았다.

“……너무, 못되게 굴어서 싸웠어.”

“싸워?”

의외였다. 그녀는 결코 레테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다. 고분고분한 정도를 넘어 설설 기는 수준인데. 선 듯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를 너무 미워해서…… 싸운 거야.”

아아. 리안은 작게 탄식하고는 헤일라의 머리칼을 다시금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레테가 도를 넘어 폭언을 퍼부은 게 분명했다. 그의 여자는 결코 쉽게 화내는 성정이 아니었다.

“나는 언니가 너무 좋은데, 정말 소중한데, 없으면 안 되는 가족인데, 언니는 아니었나 봐.”

내가 밉기만 한 가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몸이 그를 타고 주룩 흘러내렸다. 리안은 재빨리 헤일라를 안아 들어 침대에 앉혔다.

“나, 죽고 싶어.”

순간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헤일라.”

“죽고 싶어. 죽고 싶어, 리안.”

어떤 순간에도 꿋꿋하기만 한 여자였다. 언제든 한계에 다다를 수 있을 정도로 위태로웠으나, 죽음을 입에 담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할까.

리안은 헤일라가 절망에 짓무르고 있는 순간조차 자신을 위해 소비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는 잠시, 어떻게 행동하는 쪽이 그와 그녀의 아름다운 미래에 도움이 될지 고민해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만약 너까지 나를 배신하면, 나는 못 살아.”

그럴 거야. 분명히 그렇게 되어 버릴 거야…… 그녀는 홀린 사람처럼 중얼대며 그의 옷깃을 뭉쳐 쥐었다.

“그러니까.”

홀리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황금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쳐 온다.

“그러니까 안 그러겠다고 말해. 잘못한 거 있으면, 지금, 지금이라도 다 말해. 다 용서해 줄 테니까, 앞으로가 중요한 거니까, 응?”

대관절 레테가 무슨 말을 했기에 이렇게 예쁘게 미친 걸까. 그는 이 와중에도 헤일라의 눈이 탐나서 눈가를 살살 매만졌다. 그리고 태연자약한 얼굴로, 그러나 숭고한 맹세를 하는 기사처럼 속삭였다.

“걱정 마, 헤일라.”

어차피 스스로가 모르는 기만은 언젠가 공기처럼 흩어질 테니.

“약속은 지켜. 무슨 일이 있어도 배신 같은 거 안 하니까.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그는 지금의 배신이 훗날 우리를 더 완전하게 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울지 마.”

그러므로 헤일라는 눈물 흘릴 필요가 없었다. 영영 알지 못할 남자의 잘못에 두려움을 품는 건 덧없는 행위였다. 리안은 약간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채로 헤일라를 꽉 안고 사랑을 속삭였다.

헤일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닫았다.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등 쪽으로 팔을 둘러 리안을 더 꽉 껴안았다. 리안은 그것이 무언의 대답이라 넘겨짚었다.

이후에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리안은 헤일라에게 붙여 둔 수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레테에게도 찾아갔다. 밖에서는 별일이 없었다는 수하의 대답에 안심했고, 헤일라에게 죽어 버리라 폭언을 퍼부었다는 레테의 말을 듣고는 살심을 억눌러야 했다.

어쨌든 그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언제나처럼 헤일라는 그를 의지했고, 앞으로는 더더욱 불안에 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지근한 침묵만 남긴 그날 이후, 헤일라는 어느 시간에 멈춰 선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리안이 공작가로 나서는 그날 아침까지 혼이 빠진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라 여겼으며, 공작을 처리한 뒤 내내 함께 생활하며 어르고 달래면 아물 상처라 여겼다.

남자는 그것이 감정이 문드러진 사람의 모습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영영 곱씹으며 후회할 만한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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