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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뽑힌 자리-30화 (30/97)

30화.

레테는 처음 제안했을 때 이걸 받아들이는 리안에게 물었었다. 사실 그는 레테의 손을 뿌리칠 수도 있었다. 귀족이라고 지레짐작해 오는 말이야 그저 뿌리치면 그만이고, 레테는 은밀하게 죽일 수도 있었다. 더불어 그에게는 헤일라를 가둬 삼킬 힘도 충분하다. 왜 자신의 말대로 하냐는 그녀의 물음에, 리안은 끝이 다가오면 알려 주겠다 약속했다.

“그게 너한테 중요한가?”

“궁금하니까?”

그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얼굴에는 그답지 않은 후련함도 조금 엿보였다.

“웃는 게 예쁘잖아.”

“…….”

“내 품에 안겨서 매달리고, 우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하…….”

“스스로 원해서 안겨 올 때가 가장 만족스러워. 수고를 들일 가치가 충분하지.”

……게다가 적당한 부채감도 심어 줄 수 있고. 그는 헤일라가 평생 안락한 철창 안에서 자신만 바라보며 헌신하기를 바랐다.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소유이며 다정한 신을 얻는 방법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걸 위해서라면 벌레보다 증오하는 헤일라의 피붙이도 잠시 살려 둘 가치가 있다 여겼다. 그는 헤일라에 한해 굉장히 자비롭고 참을성이 넘쳤다.

“역시 그렇구나.”

“그럼 이제 네가 답해야겠어.”

이제까지는 그랬다. 리안은 정말로, 레테를 조금 더 살려 둘 요량이었다.

그가 천천히 일어나 던져두었던 천 가방을 들었다. 여기저기 흙이 묻어 있어 남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가방의 끝자락은 붉은색으로 옅게 물들어 있었다. 리안은 그걸 열어 안에 있던 내용물을 레테의 다리 위에 그대로 쏟아 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네, 역시.”

몸통이 조각난 새는 멀겋게 눈을 뜨고 있었다. 레테는 그걸 무감하게 내려다봤다.

“이게 뭔지 모르겠다는 변명할 생각이면…….”

“딱히?”

레테의 입매가 위로 휘었다. 침착함을 넘어 당당함까지 담아 그를 조롱하는 대답이었다.

“난 그냥 살 구멍을 하나 더 뚫어 둔 것뿐이야. 네가 실패하면 거래고 뭐고, 다 날아가는 건데.”

이 정도는 대비해야지? 이제 그녀는 조금 낄낄거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

“그래서 공작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리안은 종이 위에 흩어진 문자를 읽어 내리는 사람처럼 나긋했다. 레테는 토막 난 새의 다리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거 보면 안 물어도 알 텐데?”

“겁이 없군.”

새의 다리에는 작은 끈 같은 게 묶여 있었다. 그건 펴서 물에 담그면 불어나 종이처럼 펴지는 밀서였다. 그리고 발신인은,

타센 휴리트. 리안의 아버지이자 공작인 남자였다.

“공작을 죽이려는 패륜아. 물론 네가 완벽하게 미친놈인 만큼 실패할 것 같지는 않지만 패는 여러 개일수록 좋잖아?”

“하.”

“네 쪽이 실패하면 네가 주기로 했던 전부를 공작이 제공하기로 했거든. 또 궁금한 게 있어?”

창백한 손이 짚고 있던 새의 다리 조각을 레테는 리안을 향해 던졌다. 그건 남자의 단단한 배를 치고 아래로 힘없이 추락했다.

“아아, 내 쪽에서는 뭘 건넸는지 말을 안 했네. 너랑 헤일라의…….”

얄밉게 오물거리던 입이 큰 손에 의해 막혔다. 조막만 한 얼굴의 반이 리안의 손바닥으로 가려졌다.

“그만.”

“…….”

“죽여 버릴 것 같으니 그만 떠들어.”

악력이 레테의 하관을 으스러트릴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여자의 입에서는 어떤 신음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옅은 식은땀만이 고통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리안은 그 모습을 훑고는 손을 떼어 냈다.

“헤일라 없이는 구걸도 못하는 계집년이 할 수 있는 거야 빤하지. 병든 몸뚱어리로 다리를 벌릴 수도 없었을 테니까.”

“…….”

“우리 둘을 살피고 입을 놀릴 수 있다는 것. 딱 그 정도가 네 가치야. 굳이 네 입으로 들을 가치도 없어.”

“그래. 꽤 정확하게 맞췄네. 네가 생각한 게 맞아. 그런데,”

“…….”

“대비라는 건 정말 중요하거든. 너처럼 운이 좋은 인간들이야 평생을 모르고 살았겠지만.”

레테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났다. 그녀는 의뭉스런 얼굴로 엉망이 된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한숨 쉬었다.

“조심해.”

한순간이지만, 그 모습은 마치 고요히 진리를 읊는 신처럼 경건해 보였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비극을 낳는 법이니.”

인간에게 신이 내린 세 번째 가르침. 성서의 첫 번째 페이지에 자리한 글귀였다.

“네 것이 아닌 걸 탐내는 주제에 허점까지 보이면 큰일 날지도 몰라.”

공허한 공간에 여자의 키득대는 웃음소리만 부유했다. 리안은 미동 없이 듣고만 있다가 천천히 왼쪽 입꼬리를 올렸다.

“겁이 없는 줄 알았는데.”

발치에 떨어져 있는 새의 다리 조각이 무자비한 발에 의해 천천히 으깨졌다. 잔여물들이 바닥에 새겨지듯 눌어붙었다. 리안은 그러면서도 레테에게 고정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마치 지금 밟아 뭉그러트리는 대상이 레테인 것처럼.

“그냥 멍청한 거였네.”

둘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맺어졌다. 리안은 메마른 전신을 훑고 뒤를 돌았다.

* * *

“웁, 으웁…….”

“더.”

“후우, 욱.”

“더 쑤셔 넣어. 그래, 그렇게 목을 열어서…….”

낮은 조도의 방안, 너른 의자에는 남자 하나만 앉아 있었다. 베르디안은 낄낄대면서 다갈색 머리칼을 콱 쥐어 제 사타구니 쪽으로 여자의 얼굴을 당겼다. 우욱, 하고 괴로움에 묻힌 신음이 낮게 퍼졌다.

“한 발도 못 빼겠어, 이러다가.”

그는 낄낄대면서 더 정성을 들이라며 여자의 볼을 톡톡 쳤다. 거대한 성기를 목 끝까지 밀어 넣은 여자가 간신히 구역질을 참고 혀를 쓰기 시작했다. 아아, 하는 낮은 탄성을 뱉은 남자가 소파 등받이에 완전히 상체를 기댄다.

“적당히 끝내.”

리안은 남의 정사를 지켜보는 게 불쾌한지 얼굴을 구기고 채근했다. 당장이라도 방을 나설 기세로 몸을 일으키자, 베르디안이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젠장. 내가 좆물 못 빼서 뒤지면 그건 전부 네 탓이야.”

저급한 농에는 대답도 주지 않은 채 리안이 작게 한숨만 쉬었다. 정말로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방증이었다. 베르디안은 다시 여자의 머리채를 쥐고 빠르게 몇 번 흔들었다. 그렇게 수 분 동안 자위에 가까운 봉사를 받은 뒤에야 걸쭉한 절정에 다다를 수 있었다.

“사람을 불러 두고 일을 치르고 있던 건 너다.”

“서운한데. 같이 쑤시는 걸 꽤 좋아하는 누구를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것뿐이라고.”

리안은 난잡했던 과거사를 들추는 친우를 다시금 무시하고 아직 방에 남아 있는 여자를 향해 턱짓했다. 그녀는 베르디안의 아래에서 떨어져 나간 뒤 능숙하게 젖은 천을 가져와 그의 아래를 닦아 주는 중이었다.

“나가 봐, 예쁜아.”

베르디안은 마음껏 욕망을 배설해 만족감이 어린 목소리였다. 허공을 향해 건넨 지폐는 꽤 큰 액수여서, 여자는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리다가 문밖을 나갔다.

“매음굴 출신인가?”

“왜, 관심이 가?”

이제 취향이 조금 바뀌었어? 그는 흥미가 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안은 밋밋하게 침묵하며 베르디안을 응시했다. 대답을 종용하는 귀족적인 방식이었다. 베르디안은 시시하다며 툴툴댔다.

“지방 매음굴에서 넘어온 계집이 꽤 반반하다고, 마담이 소개해 줬지. 입도 쓸 만하고, 아래도 꽉 조이는 맛이…….”

“그렇군.”

중간에 잘린 말이 허공에서 부유한다. 베르디안은 멋쩍은 얼굴로 어깨만 으쓱했다.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었다.

사실 리안은 남자가 휘두르는 대로 성을 팔면서 비굴하게 굽신대는 여자를 보고 레테를 떠올렸다. 헤일라를 위해 매음굴에 팔렸었다는 여자는 과거에 어땠을지 궁금했다. 고고하기로는 여느 귀족과의 여식들 못지않은 계집이니 길들이기가 어지간히 고역이었겠지.

하지만 리안은 누군가의 아래에서 굴복하고 복종할 레테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헤일라의 자매는 고귀한 무언가에 더 잘 어울렸다. 집요하고 탐욕스러운 면이 더더욱 그런 면을 돋보이게 했다.

“내가 공작이 되면 신전에 사람을 하나 둘 생각이야.”

“그 여자 언니라고 했나?”

“그래.”

“죽이려고?”

베르디안이 여상한 태도로 물었다. 리안이 바로 답하지 않자 그의 얼굴에 흥미가 돌았다.

“아마도.”

애매한 대답은 조급증을 부추긴다.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가 눈썹을 위로 들어 올리고는 등받이에 팔 하나를 올렸다. 바지만 꿰어 입었다면 꽤 귀한 태가 났을 법한 자세였다.

“애매한 답인데.”

“애매한 여자라.”

처음에는 그저 성가신 걸림돌이라 생각했다. 헤일라의 머릿속을 온통 메우고 있는 거머리 같은 계집. 하지만 그래 봐야 몸도 성치 않은 계집 하나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손을 잡은 게 실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근래에 들어서야 하게 됐다.

“그년이 타센과 내통하고 있다.”

순간 베르디안의 눈에 놀라움이 스몄다. 그는 날카로워지거나 염려하는 대신 몸을 앞으로 바짝 숙이고 입술을 혀로 핥았다.

“불구가 된 계집이라며?”

“새.”

“…….”

“며칠간 비슷한 새가 자꾸 창가에 앉는다는 보고를 받아 확인했는데 전서구 역할을 하고 있었어.”

“공작 쪽에서 먼저 접촉했네.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으니.”

“들킨 것도 이미 알고 있어. 놀라지도 않더군.”

공작은 그리 어설픈 인물이 아니었다. 아마 이후에 들킬 것까지 염두에 두고 레테에게 접근했겠지. 레테는 그걸 알고도 제안을 받아들인 거다. 간이 큰 계집이었다.

“이야, 대단한 여자잖아?”

“여러모로 대단하지.”

“다리도 못 쓰는 계집한테 크게 데였는데?”

베르디안은 낄낄대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여자에 대한 호감이 서린 눈빛이었다. 재미있는 대상만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만하게 구는 남자다웠다.

“인정해야겠지…….”

자존심이 상하지만 리안은 레테를 얕봤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 완전히 속을 알 수 없다는 점도 확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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