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무슨 소리야?”
그는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묻는 사람 같았다. 헤일라는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꽉 찌푸리고 언성을 높였다.
“누가 봐도 네가 손해야.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귀족은 이해타산에 아주 충실하다고. 귀족? 아니! 모든 사람이 그래. 그리고 모든 사람의 눈엔, 아니 내 눈에도! 난 공작가에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고.”
“…….”
“내가 너와 혼인해야 언니가 치료받을 수 있다는 말을 전하면서 네가 그렇게…… 그렇게…….”
약간의 울먹임이 새어 나왔다. 헤일라는 말끝을 흐리면서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헤일라는 여전히 리안이 미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순간은 견디기 힘들었다. 높은 지위를 갖고 있음에도 그녀에게 절절 매는 남자를 보면 어쩔 도리 없이 약해지고 마는 것이다.
리안은 헤일라가 리안의 감정을 의심할 수 없게끔 만든다. 그것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왜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느냐고 원망하고 싶다. 왜 나의 초라함을 탓하지 않아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드냐고 패악을 부리고 싶다. 차라리 헤일라를 천대했다면 이토록 이상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아니야.”
“…….”
“헤일라, 나 봐.”
“흐으, 싫어, 놔, 놔아,”
리안이 무릎을 구부려 침상에 앉은 헤일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이려 하자 볼을 쥐고 고개를 들도록 했다.
“나는 네가 없으면 미쳐서 죽어 버릴 거야.”
“흣, 흐윽…….”
“너한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냥 나한테는 늘 넘쳐서…….”
리안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헤일라를 껴안았다. 그의 품 안은 따뜻했다. 헤일라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에게 제 얼굴을 파묻었다.
숨이 벅찼다. 모순적이게도, 아주 조금, 행복하다 여겼다.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줘, 헤일라.”
마치 자애로운 신이 귓가에 속삭이는 듯 아득했다.
* * *
레테가 깨어난 건 삼 일 뒤였다. 파란 집의 의원이 준 약을 꾸준히 먹이자 낯빛이 천천히 돌아왔고, 의식을 찾았을 때는 바로 물을 마실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았다. 평소 같았으면 속에 있는 걸 모두 게워 내고 신경질적으로 손을 쳐 냈을 텐데, 이번에는 그저 헤일라의 수발을 가만히 받아 들이는 모습이 낯설었다.
“기분은 좀 어때?”
조마조마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될 정도로 투명한 눈빛이다. 레테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약간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쿠션으로 등받이를 만들어 앉게 해 달라는 의미였다. 헤일라는 능숙한 간병인답게 빠른 몸놀림으로 언니의 상체를 일으켜 주었다.
“적당해.”
“……응.”
“그렇게 눈치 볼 거 없어. 안 좋아질 일밖에 안 남았잖아.”
“언니.”
“죽는 건 두렵지 않아.”
“…….”
“인간은 누구나 죽어.”
레테의 자조적인 목소리를 듣는 헤일라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날 버리지 마.”
마치 그것이 죽음보다 더 두렵다는 듯. 레테는 그렇게 속삭이듯 말을 흘리고 입을 닫았다. 무언가 속에서 울컥 차올라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언니의 몰골을 뜯어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창백함이 좀먹은 얼굴. 입술은 허옇게 일어나 있었고 볼에는 생기가 없다. 거무죽죽한 눈 아래는 오래된 병증을 방증하듯 축 처져 있었다.
헤일라는 또 지겨운 눈물이 차오름을 느꼈다. 이제 울지 않을 때도 되었는데 또 비져 나오는 게 지긋지긋하다.
“안 버려.”
레테는 동생의 눈물을 끔찍이 싫어했다. 유약한 성품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부러 눈에 힘을 주고 또박또박 선언했다.
“절대, 안 버려.”
“그래?”
마지막 기회를 주는 사람처럼 조금은 의미심장하게, 조금은 서글프게 물어 온다. 헤일라는 고개를 거칠게 끄덕이면서 언니의 품에 안겼다. 레테의 몸이 더 깊게 베개 속에 파묻혔다.
“언니를 가장 사랑한다고 했잖아. 정말, 정말이야.”
“…….”
“죽지 마. 그러니까 죽지 말라고.”
“……그래.”
헤일라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이런 식의 대답은 처음이었다. 죽지 말라는, 건강 하라는 말에 언제나 레테는 비소를 지었으니까.
“네가, 나를 버리지만 않으면.”
“…….”
“안 죽을게. 살 거야.”
설핏 웃기까지 한다. 헤일라는 그게 너무 감격스러워서, 벅차올라서 어쩔 도리 없이 푹 안겨 울고 말았다.
“응, 응, 고마워, 고마워, 언니…….”
내가 꼭 언니를 구할 거야……. 속으로 다짐하며 주먹을 꼭 쥐는 낯이 약간의 희망과 행복에 젖어 있었다. 마치 신이 그녀에게 기회를 준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어쨌든 헤일라는 그날, 리안에게 찾아가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둘은 한참 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가만히, 온도를 공유했다.
* * *
타론 제국의 의료 체계는 굉장히 기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급 꼭대기의 인간들은 이걸 누구보다 잘 파고들었고 아래의 인간들은 말 그대로 ‘먹고 사는’ 일에 치여 나라의 체계나 부조리 따위에는 눈 돌릴 틈이 없었다.
게다가 ‘신’이 존재하는 것이 자명한 땅이 타론이었다. 한 치의 굽음도 없는 빳빳한 땅에 터를 잡고 서 있는 세니르 신전이 그 증명이 아닌가. 고로 우민들은 신전의 말을 곧 신의 말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병이란 신이 내리는 형벌임을 그저 감내했다.
정당하게 일한 값을 치러서, 신전의 발전에 기여하지 않으면 그 벌을 사할 최소한의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게 신전의 논리였기 때문에, 신전이 모든 의약품과 의술을 관리하는 데도 이견을 두지 않았다. 난치병을 치료할 기회가 귀족과 황족, 신관에게만 있다는 사실 또한 별로 놀라울 게 없었다. 어차피 보통 평민이나 노예는 어마어마한 치료비를 댈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돈이 아주 많지만, 태생의 한계를 안고 있는 제국민들의 불만이었다.
본디 가진 자들의 고통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법. 그들은 병이 제 목숨 줄을 위협할 때가 오면 반기를 들 수 있었다. 돈이란 그런 힘을 부여해 주는 수단이니까.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파란 집.”
비공식적으로 신전이 관리하는 의료원의 이름이었다. 돈을 가진 미천한 자들의 입은 뒷거래로 쑤셔 막고, 신전은 막대한 금전적 이득을 취득한다.
귀족들과 황족은 몰래 숨어서 치료받는 이들을 보고 우월감을 느끼며 다디단 와인을 마신다. 돈은 많지만, 태생적인 한계를 끊임없이 주지당해 온 평민들은 제 몸이 평안을 되찾으면 다시 안락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체계를 바꿀 필요도 딱히 느끼지 못했다.
제국은 이런 방식으로 제국민을 ‘관리’했다.
“처음부터 뒷거래는 다 해 뒀었던 거지?”
“역시 똑똑해.”
리안은 레테의 침대 옆에 서서 바짝 야윈 레테에게 선심 쓰듯 칭찬을 던졌다.
“네가 고분고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처음부터 예상했으니까.”
잔뜩 꼬아 놓은 비아냥도 잊지 않고 덧붙인다. 레테는 그저 침대에 누워 창문 쪽을 흘긋 바라봤다. 헤일라가 뒤돌아 마을로 내려가는 뒷모습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가증스러운 새끼.”
둘만 있을 때 레테가 혐오를 드러낸 건 오랜만이다. 기분이 퍽 좋은 남자는 그저 흘려들으며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면서 들고 있던 둥근 천 가방 하나를 바닥에 가볍게 던졌다. 두 팔을 허벅다리에 얹은 채 상체를 조금 숙인 리안은 다소 위험한 기운을 풍겼지만, 레테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내가 시키는 대로 했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콱, 하고 누워 있는 여자의 볼을 잡아채는 손길이 꽤 험악했다. 공중에서 마주친 둘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그는 지금 이전에 주었던 붉은 독약을 한꺼번에 음용한 행동에 관해 지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했어야지. 둘이 붙어먹으면서 희희낙락하는 꼴을 내가 언제까지 지켜봐 줄 거라 생각했어?”
매일 밤 헤일라에게 들러붙어 결국에는 엉엉 울게 만드는 남자였다. 그는 연인의 애원대로 삽입하지는 않았지만, 깨어 있는 레테가 들을 수 있도록 충분히 공을 들였다. 리안에게는 그저 영역을 표시하는 짐승 같은 행동이었다. 언니만 머리에 담고 있는 헤일라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아아, 그래.”
그가 레테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양손을 들어 보였다.
“네 덕분에 일이 빨리 풀린 건 인정하지.”
“알았으면…….”
“곧 신전으로 가게 될 거야.”
그의 말을 끝으로 꽤 긴 침묵이 둘 사이를 갈랐다.
“원하는 치료, 재물, 뭐든 약속한 대로 지급해 주지.”
“…….”
“……끝까지 약속만 잘 지킨다면.”
“헤일라를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
“그 애의 인생에서 사라지는 게 서로에게 좋을 테니까.”
서로? 레테는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리안은 레테의 소리 없는 조롱을 기민하게 읽어 냈다.
“먼저 제안을 한 건 너야.”
“나도 알아.”
그의 말이 맞았다. 헤일라를 기만하고 그의 아가리에 집어넣을 수 있게 해 주겠다 제안한 건 레테였다. 그녀는 그 대가로 평생 사치스럽게 살 수 있는 돈과 치료를 요구했다. 사창가에서 어리고 아리따워 고급 창녀로 분류되던 레테는 귀족들의 말투와 행동거지를 질릴 정도로 봐 왔다.
그런 레테가 첫눈에 리안의 태생을 알아차린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녀는 네게서 귀족 냄새가 난다며 제 손을 잡으라 유혹했다. 리안은 탐욕스럽고 동생을 증오하는 레테의 제안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그 애가 어디서 어떻게 굴려지든 난 신경 안 써. 네 손에 죽어도, 아니 죽으면 오히려 좋지. 개운할 것 같아.”
리안의 미간이 구겨졌으나 레테는 언제나처럼 주저하지 않고 입을 놀렸다.
“그러니까 굼뜨게 행동하지 말고 얼른 진행해. 내가 생각보다 참을성이 없거든.”
“서른 날.”
“…….”
“서른 날 안으로 모든 게 정리될 거야.”
너와 헤일라의 관계까지 전부. 뒷말은 나오지 않았으나 영리한 레테는 다음 말을 능히 읽어 냈다.
“그럼 이제 들을 수 있겠어.”
“…….”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그냥 나를 죽이고 가둬서 취하면 그만인 헤일라에게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저의.”